「봄꽃편지」
1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한 1977년의 가을, 나는 육군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제1하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물론 이 편지 속에는 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심리적 변화와 애절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한창 철없던 시절의 연애편지가 대부분이어서 유치하고 낯간지러운 표현들도 많이 들어 있지만 나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보고 싶다, 그립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고, 그녀는 건강하게 훈련을 잘 받으라는 당부와 함께 자신의 일상과 우리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으며, 내가 부탁하는 시집(詩集)이나 가곡테이프, 공부를 위한 참고서, 약이나 안경, 사진, 손수 뜨개질한 장갑 등을 보내주었다.
물론 그녀도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든 날에는 우울한 말도 하고 기다림에 지쳐 방황하기도 했으며, 군(軍)에 비상이 걸리거나 나에게 사정이 생겨 편지가 늦어지는 기간이 길어지면 나에 대한 확신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비록 훈련이 힘들거나 군 생활이 고단하여 애타게 그녀를 부르면서 눈물 젖은 편지를 쓴 날들도 많았지만, 그녀가 나를 떠나지 않고 기다려줄 것이라는 믿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나 역시 다른 병사들처럼 군 생활 내내 여자 친구의 편지와 면회를 기다리고 그녀에게 온갖 투정을 다 부렸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흔들리면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그녀를 위로하고, 그러다가는 매달리고 애원하면서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애를 태웠다. 나는 그렇게 군에 입대한 날부터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고 일기를 적고 하였기에 내 체력에 비해 힘들었던 군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군 생활 내내 나를 지켜준 것은 그녀가 보내준 가곡테이프를 듣고 노래를 불러보는 것과 틈틈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감정이 북받칠 때 나도 모르게 어설픈 시(詩)를 쓰는 것 등이었다.
나는 2021년,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누렇게 색이 바래고 낡은, 군 시절의 편지와 일기를 차근차근 읽고 정리하면서 그 시절에 우리가 주고받았던 편지와 글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입대하던 날, 그녀는 내 가방을 챙겨주며 논산까지 따라와 주었다. 기차 안에서 나는 그녀가 내게 준 메모지를 펴서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그녀는 언제부터인지 내 이름 자 중 한 글자를 따서 나를 聖이라고 불렀다).
성.
성의 가방을 챙기려니 마음이 착잡해. 부디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랄뿐야. 성의 말대로 나 열심히 기다릴게. 밥 잘 먹고 잠 잘 시간 맞춰 자고 그러면 되지?
성은 정말 건강해야 돼. 정말.
실을 감으면서 웃음이 나와 혼났어. 성이 바느질하고 빨래하는 모습. 와, 우습다. 옆에서 구경하며 놀려주고 싶은데. 씨~
성, 우리 서로 믿고 기도하며 살자.
나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아. 손가락 내밀어봐, 걸어줄게.
진정으로 사랑해. 맘 변하지 말고 또 많이 변해서 돌아와야 한다.
믿고 기다릴게.
만날 때까지 열심히 충성하고. 안녕(1977. 9. 10.)
그녀는 일부러 아주 간단하고 가볍게 편지를 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처럼 가벼운 농담이 담긴 편지를 쓸 수 없었다. 이 편지는 군에 입대하기 전 미리 써놓은 것으로 기억한다(나 역시 그녀를 이름 중 한 글자를 따서 信이라고 불렀다).
사랑하는 信,
나는 이제 조국의 부름을 받고 병사(兵士)의 길을 떠나면서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대의 남자답게 성실하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그 길을 갈 것을 약속할게요.
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를 기다려주겠지요? 이제 곧 낙엽이 지고 찬 서리가 내리겠지만, 다시 또 봄이 오고 낙엽이 지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나를 기다려주겠지요?
그때쯤이면 나도 더 굳세고 강한 사나이가 되어 그대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하여도 나는 꼭 그대 앞에 돌아올 것입니다. 오늘 밤 달이 뜨는 것을 기다리듯 그렇게 기다리겠다고 말해줘요.
신,
철없이 방황하고 툭하면 넘어지던 나를 그래도 내 사랑이라고 불러주며 어루만지고 쓰다듬어주고 일으켜 세워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이 아니더면 누가 있어 나를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일으켜주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하였으랴.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려고 했지만 내가 너무 가엾어서 떠나지 못하였음을. 막상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그대에게 행한 나의 행실이 얼마나 한심하였는가 통감하게 됩니다. 넘치는 행복보다는 아련한 아픔만을 드린 일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 그것만은 진실하고 순결한 것이었다고. 그리고 약속합니다. 내가 돌아오는 날 당신이 꿈꾸던 영토보다 몇 배 비옥한 아름다운 영토에 당신을 안주케 할 것을. 눈물밖에 드릴 게 없었던 당신의 빈 가슴에다 내 모든 정성을 다 바치겠다고.
문득 을왕리에서 바라보던 별들이 생각납니다. 북두칠성 일곱 개 별이 찬란하던 그 밤에 당신과 나는 모든 것이 활활 함께 타서 밤하늘에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유성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요. 이제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우리들이 함께 바라보는 하늘에도 밤마다 어디선가 이름 없는 별꽃들이 지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봐요 신,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고나면 당신의 심장 가까운 곳에 묻혀 있을 나의 운석들을. 빛을 밝혀 주리다. 나의 운석들은. 그것은 그대의 곁에 서서 총검을 들고 서 있을 나의 그림자이기에.
때로는 외로울 때도 있고 아프거나 괴로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피아노를 쳐봐요. 아름다운 그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출 때마다 그리스도상이 밝은 빛으로 당신을 지켜주고, 그대의 책상 위에는 나의 편지와 시(詩)가 배달될 것입니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신,
당신 앞에 다시 서는 날, 나의 정신과 육체는 거듭 생성되는 과정을 거쳐서 그대 앞에 설 것이며, 나는 우리의 온전한 생(生)을 책임질 것입니다. 말해봐요. 우리들은 온전히 하나라고. 우리는 결코 분리되어 흩어져 부서지는 분수(噴水)는 될 수 없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분리된 당신이 아니라 내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다”라고.
사랑이 헛되고 헛되다고 제발 말하지 말아요. 나의 눈동자에 거짓이 있다면 그 눈을 멀게 해줘요. 나의 가슴에 거짓된 진실이 있다면 내 가슴을 짓이겨줘요. 마지막으로 듣고 싶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대의 음성을.
(1977.9.10.軍門을 향해 떠나면서)
어두워지는 주일저녁에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오는 텐트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어둠을 밝히며 환하게 떠올랐다.
바람이 불어오면 몇 번씩 성냥불을 켜대고
초가 떨어지면 후레쉬를 비춰가며 글을 썼다.
나의 영토 안에서 네가 살고 있는 한
나는 춥지 않고 따뜻할 것이라고 썼다.
나의 사랑의 샘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1978. 10. 일기)
엊그제 저녁에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의 편지에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고독이 묻어났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림의 세월은 그녀의 아픔만큼이나 길고 절실하다.
무엇으로 나는 저 숭고한 영혼 앞에 기쁨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진심으로 나의 사랑을 원한다고 썼다.
“아버지 같은 사랑으로 변함없이 사랑해줘” 라고 썼다.
그 말을 들으니 눈물겹도록 기쁘고 고마웠다.
(1978. 11. 일기)
그녀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무너지지 않는 사랑의 절대적인 힘을 느꼈다.
그녀의 영혼을 그리면 언제나 찬란하게 나타나던 성좌(星座)
유성은 아주 멀리 사라져가도 내 영혼의 빛은 사라지지 않으며
가혹한 운명이 엄습한다 해도 나의 사랑은 변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편지에서 시(詩)를 쓰고 있다.
눈으로 쓰고 가슴으로 쓰는 그녀의 편지는
언제나 그리움으로 젖어 있고
언제나 사랑과 애정이 맑고 아름답게 승화되어 빛나고 있다.
백합 같은 그녀의 편지는
내 깊은 영혼 속에 따뜻한 온기를 보내주고 있다.
불빛으로 그윽하게 타오르는 그녀의 사랑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황홀한 기쁨으로 살고 있다(1978. 12. 일기).
聖에게,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물을 관조하며 그 모든 고뇌에서 해방되어 조용한 기쁨으로 살고 싶다. 깊은 산 속이나 전원에서 작은 생활의 즐거움과 조용한 미소의 의미를 알며, 나날이 새로 일깨워지는 생명의 희열 속에 일락을 꿈꾸며.
불신과 부조리, 배신과 위선의 낱말을 모르는 채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 너와 나의 가슴이 한 줄기 눈빛으로 통하고 푸른 하늘아래 마주서면 두 생명의 감사가 한 가지로 펼쳐지고, 너의 소망과 나의 소망이 주님의 손끝까지 이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싸늘한 대기 속에서 차디찬 미소를 보내는 저 달빛이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이렇게 달빛 밝고 아름다운 날에는 나도 어울리지 않게 작은 소녀가 되어 공상의 나라로 찾아가고 싶어. 아주 아주 아름다운 꿈꾸는 소녀 되어.
그러면 성은 멋진 소년 되어 나를 맞아줘. 달빛이 밝은 넓은 강가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잔잔한 은파의 리듬에 맞춰 멋진 왈츠를 추고 싶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서로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1978. 11. 14. 편지)
목련이 지고,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다고 信에게서 편지가 왔다.
이제 29일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매일 매일 날짜를 세는 편지가 왔다.
보고 싶어 잠이 안 올 때면 내가 돌아왔을 때를 꿈꾸었다고 하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음성이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성,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이야. 꿈이고 삶이고 영원이고 행복인...
그녀의 편지에는 빛나는 눈물로 가득하고 기대와 환희로 가득하다.
(1980. 5.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