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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꽃이 된다는 것
양명여자고등학교
2학년 9반 나윤하
벽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줄줄 흐르는 그것은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무섭지 않았을텐데.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둘걸.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큰이모가 나를 데리러 오기까지 세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그 세시간동안 엄마와 내가 살아왔던 조그만 반지하방이 물에 잠겨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네 엄마 눈에 노란 호박꽃이 피어버렸어야.”
엄마가 죽기 세 달전 큰이모가 처음으로 울면서 했던 말이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있었다. 담낭암 때문에 엄마의 눈에 황달이 생긴 것이다. 한 번도 꽃처럼 살지 못했던 엄마는 마흔 즈음에야 처음으로 꽃을 가졌다. 그러나 그 꽃은 죽음으로 피어나는 꽃이었다.
애타는 큰이모의 속도 모르는지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누워 끝이 갈라진 손바닥으로 얼굴만 쓸어내렸었다. 모텔 침대 시트를 주름 한 점 없이 당겨넣느라 잠시도 쉬지 못한 엄마의 손이 퉁퉁 부은 얼굴을 빳빳하게 지나갔다. 한 달에 28일, 하루에 14시간 모텔 청소일을 하던 엄마는 나를 키우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객실 청소하기, 침대 시트 갈기, 캔 음료수 채워넣기, 화장실 닦아내기. 하얗게 보이기 위해 표백제 범벅이 된 시트를 수십 장씩 만지고나면 엄마의 손은 붉은색 반점들로 뒤덮이곤 했다. 다른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모텔 일에 엄마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숱하게도 무릎을 구부려가며 일해야 했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던 아빠로부터 도망친 후, 잘 곳이 없던 엄마는 어린 나를 안고 모텔 청소부 일을 시작했다. 모텔은 나에게 방이 많은 놀이터가 되기도 했지만 손님이 있을때는 감옥같기도 했다. 엄마와 내가 잠자던 보일러실 옆방에서 절대로 나오면 안됐기 때문이다. 괜히 복도를 얼쩡거리다 CCTV에 찍히기라도하면 사장님께 혼줄이 났다. 어쩌면 엄마의 소원이 제대로 된 집 한 채를 갖는 것이 된 것도 나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 모텔을 벗어나 주택가 반지하 전세방을 얻었을 때, 엄마는 엉엉 울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은 좋은 곳에서 살게 할거야.”
큰이모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울지 말라고 너까지 울면 엄마는 어떡하냐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나는 왠지 엄마의 그때 그말이 생각나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짜증나요.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와 버린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입을 막아야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내 마음 속 깊이 있던 말들은 제발 들어달라고 애원하듯 비어져 나왔다.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한 번도 행복했던 적, 좋았던 적 없었는데. 그건 정말 너무 해요. 엄마도 한 번 쯤 행복해 봐야 하잖아요.”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토록 원했던 영구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우리집이 생긴 얼마 후 엄마는 담낭암이라는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 두어 달 전부터 몹시 피곤해 하고 구토 증세를 보이던 엄마는 새벽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쓰러졌다. 내가 병원에 달려갔을 때 링거 한 병이면 된다던 엄마는 그날 오후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 몸속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담낭이란 것에 암이 있다는 것도 또 담낭암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죽음까지 몰고간다는 것도 나는 알지 못했다.
담낭암 진달을 받고도 엄마는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우리 딸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참 좋다.”
노랗게 뜬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나는 한 번도 엄마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힘든 모텔 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았다. 그런 엄마를 나는 한 번도 돕지 않았다. 모텔을 벗어나 작은 방으로 이사했을 때도 생활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오면 싱크대에는 피사의 사탑처럼 삐뚜름하게 접시들이 쌓여있었다. 엄마는 집에 와서도 청소부 일을 쉬지 못했다. 내가 어지른 것을 치우고, 빨래하고 내가 먹을거리를 준비해야만 했다.
어느 새 세상이 어둑어둑 했다. 별이 잘 안보이는 것을 보아 조만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나는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맞았다. 바람에게 흠씬 두드려맞고 나자 한결 정신이 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최대한 맑은 산소를 폐에 담고 싶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나는 병실로 돌아왔다.
큰이모는 없었다. 엄마는 손거울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습기의 물을 갈았다. 엄마가 나를 불렀다.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딸아’라고 불렀을 뿐이다. 엄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동무가 되어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 불을 끄고 의자에 앉았다.
의료기기의 비상등이 병실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엄마의 눈에 새겨진 호박꽃 색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늘 큰 이모가 내 눈에 호박꽃이 피었다고 울더라. 처음 피어본 꽃이 고작 호박꽃이냐고.”
나는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넌 아닌거 알지? 난 18년 전에 세상에서 가장 멋진 꽃을 피웠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꽃을 말이야.”
엄마의 입은 웃었지만 손등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모자른 잎사귀이긴 하지만 모든 생을 걸고 한송이의 꽃을 피워내서 행복하다고까지 했다. 엄마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아꼈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18년 전 피워낸 ‘나’라는 꽃을 보고 항상 에너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조금더 빨리 알았더라면 엄마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을텐데. 마음이 저려왔다.
그때야 선명해졌다. 내가 태어난 이유, 내가 살아갈 이유. 일을 나가는 엄마 뒤에서 하고 싶었던 말. 지친 몸을 끌고 돌아와 쓰러지듯 잠들던 엄마의 등을 보며 하고 싶었던 말.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어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정말 오랜만에 갈라진 엄마의 손을 잡았다. 수세미처럼 거친 엄마의 손이 내 손에 힘없이 붙들렸다. 나는 엄마의 눈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말을 했다.
“엄마 나랑 조금만 더 있어줘.”
비가 이제는 현관문 사이에서도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혼자라고 울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는데. 물이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나오려고한다. 그 순간 현관문이 철컥하고 열린다. 복도에는 긴우산을 든 큰이모가 서있었다. 내 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눈물을 참은 게 언제냐는 듯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엄마, 오늘까지만, 진짜 오늘까지만 울어도 봐주세요. 여기서 슬픔을 다 떨어버리고 가서 내일부터는 엄마의 자랑스런 꽃이 될게요.’
<차상>
물 속의 집
고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1반 전수현
벽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물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무렵 빗소리가 끓이지 않던 커튼 뒤의 세상이 조금씩 밝아왔다. 날이 밝고 있었다. 두번째 물방울이 내 이마를 적셨다.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천장 구석에 깊은 웅덩이처럼 변색되어있는 얼룩이 보였다. 시든 나뭇잎 색을 띈 그것은 주변의 연갈색 벽지들을 조금씩 좀먹어가면서, 천장 위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더 굳건히 하고 있었다. 세번째 물방울이 내 이마로 톡, 떨어졌다. 오늘은 꼭 말하리라, 그런 다짐을 할 무렵 거실에서 아득하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습기를 먹어 눅눅한 이불을 천천히 걷어 냈다. 모든 게 어제에서 그대로 정지 되어 있을 것만 같은 하루였다. 널어놓은 빨래도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일테고 엄마가 밤늦게 돌아오진 않을까 식탁 위에 차려놓은 밥상도 그대로일 터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거실에서 새어나오는 부스럭 소리가 천천히 내 귓가를 울려왔다. 교복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니 식탁에 앉아 내가 어젯밤 차려놓은 밥상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내가 나왔다는 것도 모를만큼 엄마는 넋을 놓고 식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에 졸음이 가득하다. 다녀오셨어요, 내가 말하자 그제야 눈 뜬 잠에서 깨어난 엄마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일어났구나, 이거 네가 차려놓은거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구나……. 엄마는 낮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학교 잘 다녀오라는 말을 끝으로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밥 그대로 둬, 한숨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 멀어져가는 엄마의 등을 향해 내 입이 뻐끔거렸다. 엄마, 엄마 저 할말이 있어요. 그 순간 마치 벙어리라도 된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지친 등을 향해 도저히 방에서 물이 샌다는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우산을 찾기 위해 신발장 옆 서랍을 열었다. 우산꽂이 안에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않은 짙은 남색의 장우산이 홀로 꽂혀 있었다. 우산을 꺼내들자 신발장 아래로 물기가 뚝, 뚝 떨어져내렸다. 나무로 만들어진 손잡이 부분에서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엄마는 집에서 열일곱정거장 떨어진 공항의 화장실 야간청소부 일을 시작했다. 엄마가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기에 나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잠을깨는 날이 반복되다가, 나중에가선 엄마가 현관문을 열기 전에 먼저 눈이 떠졌다.
엄마와 나는 서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마치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처럼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갔다. 주말에 엄마는 대부분 부족한 잠을 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의 시간을 방해하는 게 두려워졌다. 벽에서 물이 샌다는 말 같은걸로 엄마의 빈틈없는 시곗바늘을 건드리는 게 무서웠다. 엄마와 나는 하나의 시계 안에서 시곗바늘의 양극에 존재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멀어져있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섭섭하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엄마의 선택은 나를 위한 거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엄마도 밥상도 사라지고 없었다. 우산을 접다가 문득 엄마는 우산도 없이 어떻게 갔을까 하는 늦은 걱정이 스쳤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려 내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어두운 분홍색으로 얼룩진 내 배개를 발견했다. 천장의 얼룩은 아침보다 더 커져있었다. 만약 오늘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얼굴에 저런 얼룩이 생겼을까? 교복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젖은 배개에 머리를 기댔다. 밖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오고 빗물이 내 이마 위로 다시 뚝, 둑 떨어졌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깊고 탁한 호수를 이룬 얼룩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왜 벽에선 물이 샐까. 천장 위의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린것일까. 그럼 그 벌어진 틈 사이엔 습기를 머금은 곰팡이가 자랄까. 검은 상처같은 곰팡이들이 천장과 천장 틈 사이를 가득 메울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꽉 채우면 스멀스멀 우리 집 안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제야 엄마는 나의 방관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쓸쓸히 웃으면 엄마는 뭐라고 할까. 어디선가 현관문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 안에 물방울이 가득 찬 듯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이윽고 다시 뚝, 벽에서 새어나온 물 한줄기가 내 이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차상>
검은 집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1반 김지민
벽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흐르는 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가만히 놔두면 안된다. 불행은 그렇게 증폭되므로. 나는 얼른 등으로 벽을 막아 섰다. 벽의 균열을 따라 등이 젖어들었다. 문득, 집이 어두워졌다. 정전이었다.
집안을 배회하던 소음들이 일순간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의 얼굴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불 켜라.” 아버지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그렇게 말했다. 정전인가 봐요. 내가 대꾸했다.
“에이. 시팔…… 술맛 떨어지게.”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술잔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던진 술잔은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다가 이내 오빠의 발치에 가 멈춰 섰다. 술잔에서 흘러나온 술이 오빠의 양말을 적셨고, 오빠는 자신의 젖은 양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등을 벽에 기댄 채로 계속해서 스위치를 껐다. 켰다. 에이, 시팔…….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처럼 스위치는 내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야, 라고 불렀다. 아버지 성이 김씨이니 우리의 이름은 ‘김야’쯤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증오했던 건 야, 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앞에 붙은 빌어먹을 김씨 성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야.”하고 우리 중 하나를 불렀다.
“그래. 너 말야. 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쥐포 다 구워놔.”
아버지가 부른 야는 오빠였다. 오빠는 꺼져버린 가스레인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 간다.” 아버지는 그 말이 무슨 술값이라도 된다는 양 던져놓고 집을 나섰다.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가 집을 나서기 전 남기고 가는 말 한마디가 아버지의 유언이길 바랐다. 이번엔 꼭, 이번엔 꼭……하며 높으신 분께 기도했다.
아버지가 나가자 오빠는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 쿵, 쿵. 방에선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오빠의 이마는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쥐포를 불도 없는 무슨 수로 구워?”
내가 묻자 오빠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라이터 위엔 복동 노래방, 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복동이네 노래방에서 받아온 모양이었다. 복동이는 우리 동네 유일의 저능아였다.
틱, 틱……. 집안엔 라이터를 켜는 소리만 나지막이 울려퍼졌다. 고등학생인 오빠가 라이터를 쓸일이 뭐 있나 싶었지만 우습게도 라이터는 거의 다 닳아 있었다. 화르륵. 라이터 끝에서 불길이 휘청거렸다. 오빠는 라이터로 쥐포를 지지기 시작했다. 쥐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이윽고는 약간 타버리고, 결국에는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릴 때까지, 오빠는 라이트를 놓지 못했다. 참으로 집요한 분노였다. 집안엔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좁고 물새고, 이젠 어두컴컴하기까지 했다. 화나 나도, 시팔, 눈물도 났다.
“나 간다.”
나도 아버지처럼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나기로 했다. 벽에서 등을 떼자, 가로막혀있던 물들이 투두둑 쏟아졌다. 나는 개의치 않고 현관으로 갔다. 집을 나서기 전 돌아본 아빠의 뒷모습이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물론 오빠의 몸에도 술값처럼 던지고 갈 말들이 한 가득 쌓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말들을 던져 줄 사람이 없어서 오빠가 이 집을 못 벗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오빠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 집에 남아 오빠의 말을 받아 주기엔 내가 너무 어리고 못됐다. 결국엔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
집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곧 복동이네 노래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기 가서 복동이 친구라고 하면 얼마든 공짜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복동 노래방이 위치한 상가로 가고 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경찰차 한 대를 동네 주민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났다 싶어, 냉큼 달려가 주민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웬 걸, 복동이네 아줌마가 경찰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쁜 년아!’하고 소리 질렀다. 그 옆에는 복동이네 아저씨와 복동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빌어먹을 년.”
복동이네 아저씨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서 있던 복동이도 따라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년. 복동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막 지껄이는 것 같았다. 나는 복동이에게로 가 복동이의 손을 잡아 끌고 사람들 밖으로 나왔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복동이가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다.
“아까 엄마가 저녁 차려줘서 할머니랑 나랑 같이 밥 먹는데, 아빠가 지나가면서 보니까 할머니 밥이 이상하게 파랗더래. 이상하다 싶어 경찰에 신고하니까, 경찰 말이 밥에 쥐약을 탄 거래. 할머니가 늙어서 자꾸 이상한 짓을 하니까 죽이려고 한 거지.”
진짜 빌어먹을 년이야. 복동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쪼르르 저 아빠에게로 달려갔다. 복동이도 참, 자기 엄마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건 그렇고 쥐약을 넣으면 밥이 파랗게 변한다고? 그러면 밥이 파랗지만 않았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었다는 거네. 나는 우리 집에 사는 빌어먹을 년, 아니 놈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집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오빠, 하고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보니 바닥에 옷가지들이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 방을 샅샅이 살폈다. 오빠의 물건들이 전부 사라졌다. 오빠가 아끼는 것들은 대개 구리거나 후졌는데……. 그때, 거실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거실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지금쯤 좋은 사람 만나 살겠지. 함께한 시간들에 아프겠지만…….”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거실 한 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조용조용 노래를 불렀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아버지는 노래를 꽤 잘 불렀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이를 테면 눈이 녹는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죽여야겠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밥이 푸른지, 노란지도 신경 안 쓸거야,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랑이 무어냐 묻지를 마라.”
아버지는 읊조리듯 노래하며 까맣게 탄 쥐포를 길게 찢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막힌 운명이 어찌 우리뿐이랴……. 아버지는 그 가사와 함께 술 한 잔을 삼켰다. 기가 막혔다.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아버지의 노래가 이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것이고, 그 빛이 내게 싸구려 위로를 던진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싸구려 위로가 내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라, 달려가 꼭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오빠는요?”
나는 아버지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가 그렇게 물었다. 아버지가 나를 돌아봤다.
“걔는 간다더라.”
오빠를 보고는 ‘야’가 아니라 ‘걔’랬다. 기어이 오빠는 집을 나간 것일까. 나 간다, 라는 말을 술값처럼 남겨놓은 채로? 어쩌면 오빠는 매번 가장 먼저 집을 떠나는 아버지에게 혼자 되는 외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집은 외롭고 또 어두우니까. 벽에서 흘러나온 물이 아버지의 발치에 가 닿았다. 아버지의 발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리고 깜빡, 거실 형광등이 켜졌다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