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빚(負債)
로마서 8:12, 열왕기하 4:1-9, 본(本) 1:14,
고린도전서 9:16-23, 본(本) 4:4
홍제동(弘濟洞)교회
1931. 9. 28.
◇主施恩於人, 不望報于神. 卽望報于人也. 主審人亦然, 不審人事神, 只審人報人如何也. 요한曰, 不愛兄弟, 何能事不見之神乎? 主曰我在獄爾慰之, 在病爾問之, 徒反問曰何意也? 爾在世行于小兒者, 卽行于我也. 此皆報施之意, 而◇保羅欲以負債爲警人, 受主恩如負債, 債必當報, 然則◇報于何也? 報于神耶, 報于人耶? 報人者卽報神也. 故保羅曰, 我等皆負債者, 而◇負于富者, 負于貧者, 負于智者, 負于愚者, 無人不負也. 使徒欲報賞, 而欲得無律者爲無律者, 欲得猶大人爲猶大人, 西人欲中人爲中人也. ◇今西人之來韓者, 彼自彼我自我, 故敎會之興, 惟皮道秀一人而已也. 蓋負債者持心當如何也. 債者必報乃已也. ◇若有債帳則, 坐不安席, 食不甘味, 今日勞苦皆虛事而已也. ◇歲暮或月終, 債鬼雲集者, 不思所以報償故也. ◇報償之道, 當謙遜以待債權者, 又勤勞以辦備, 是乃債務者之道也. ◇吾等於不信者, 非以物資與之, 當以謙遜對之, 彼乃悅服, 一入敎會, 亦學此道理. ◇主負世人之債, 以己血償之, 血者愛也. 吾等以愛償世人之債可也. 主蕩五百兩之債, 吾不蕩五十兩之債乎? ◇愛之道恕而已也. 堯舜之道忠恕而已云者, 亦此意也. 償債之道又有一焉, ◇觀 王下四章十九. 有一寡婦負債甚多, 故祈禱而得油償債, 得活油卽神之恩也. 吾等不依神則不能償債矣. ◇神於無之人, 賜生命使之至道, 是謂恩惠. 夫恩惠云者, 不臨于自滿者, 無識無義無能不潔, 賤而弱之人, 以謙遜爲家. 如許之人能受恩. ◇比如尖岩之上, 水不能聚, 惟聚於淵陷之地也. ◇阿伯蘭知己如塵灰之時, 主擧爲萬民之父. ◇예리이아知己如幼兒之時, 主擧爲大先知. ◇保羅知己如未滿朔之兒, 主擧爲大使徒. 由是觀之, 則從古大先知, 皆非己欲成而成之也. 自己知識, 自己偉大, 自己權利, 一切否認之時, 大恩臨之, 故 四章六節. 神斥驕者, 恩賜謙者, 豈非聖訓耶?
주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람을 살피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살피지 않고, 사람이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살핍니다. 요한이 이르기를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내가 옥에 있을 때에 네가 위로해 주었고, 병들어 있음에 너의 위로가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은 무슨 뜻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네가 세상에서 어린 아이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나에게 행한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빚진 것으로 사람을 깨우치게 하려 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빚진 것과 같으니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갚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갚아야 할 것인가, 사람에게 갚아야할 것인가? 사람에게 갚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갚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다 빚진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빚은 부자에게도 지고, 가난한 자에게도 지고, 지혜 있는 자에게도 지고, 어리석은 자에게도 지니,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使徒)는 보상을 하려고 율법이 없는 자를 얻기 위하여 율법 없는 자 같이 되었고, 유대인을 얻으려고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서양 사람이 중국 사람을 얻으려고 중국 사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서양 사람으로 한국에 온 자는 모두 저는 저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아니한 이는 피도수(皮道秀) 한 사람뿐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마음 가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빚은 갚아야 끝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빚진 장부가 있으면 앉아 있어도 자리가 편하지 않고, 밥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오늘 한 일이 모두 허사가 될 뿐입니다. 섣달 그믐이나 또는 매달 마지막 날에 채권자[債鬼]가 구름처럼 모여 드는 사람은 빚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빚을 갚는 방법은 마땅히 겸손하게 채권자를 기다리고, 또 열심히 노력하여 갚을 돈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채무자의 도리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을 지니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물질을 줄 것이 아니라, 마땅히 겸손으로 상대하게 되면 그는 끝내 기쁘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이 도리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의 빚을 자기의 피로 갚아 주셨습니다. 피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의 빚을 갚아야 됩니다. 주님은 오백 냥의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우리는 오십 냥의 빚도 탕감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의 도는 용서뿐입니다.
성인인 요순(堯舜)의 도는 충성과 용서뿐이라고 이른 것도 역시 이 뜻입니다.
빚을 갚는 방도가 또 하나 있습니다. 열왕기하 4:19에 어느 과부가 진 빚이 아주 많기 때문에 기도를 하여 기름을 얻어 가지고빚을 갚았는데, 기름을 얻은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진리에 이르게 하셨으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스스로 만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는 것도 없고, 의리도 없고, 능력도 없고, 청결하지 못하며, 천하고 약한 사람도 겸손으로 집을 삼으면,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비유해 본다면, 뾰족한 바위 위에는 물이 모일 수 없고, 오직 깊은 구덩이가 된 땅에 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티끌이나 재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만민의 아버지로 들어 올렸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어린 아이와 같음을 알았을 때 주님은 그를 들어 올려 대선지(大先知)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미숙아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주님은 그를 들어 대사도(大使徒)로 삼으셨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예로부터 대선지자는 다 자신이 성취하려고 해서 성취되지 아니 했습니다. 자기의 지식과 자신의 위대성과 자기의 권리를 일체 부인하였을 때 큰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4장 6절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어찌 거룩한 교훈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