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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이 같으라>>
가. <<시작과 끝이 같으라>>말씀의 믿음세우기
1. 부자들의 마인드
1) 부자들의 2가지 마인드
천일국 7년은 모든 축복가정이 진짜 부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진짜 부자와 보통 사람과 작은 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있다고 합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투자하는 사람, 절약하는 사람, 소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중에서 어떤 사람이 진짜 부자일까요? 투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많이 잘 버는 사람은 투자를 해서 보다 더 많을 것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이러한 마인드가진짜 부자마인드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기업이 어디입니까? 삼섬이죠? 삼성이 세계적인 부자가된 것은 그가 투자를 먼저 했기 때문입니다. 투자를 먼저 하지 않고서는 큰 부자, 진짜 부자는 못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준은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에 회식을 할 때, 8시에 마치는 사람, 10시에 마치는 사람, 12시에 마치는 사람이 있는데 어느 사람이 진짜 부자일까요? 8시에 마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마인드는 뭔가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자기를 관리하고 시간을 활용하거나 창조하는 것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
한 번 볼까요? 권오현 회장은 “2등이 1등을 따라잡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차이를 벌리는, 아예 격(格)을 달리 해버리는 경영전략인 ‘초격차’” 경영으로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2017년 10월말에 삼성전자의 최고의 실적을 세운 상황하에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2017년 243억원의 연봉을 받아 3년 연속 국내 최고 연봉자가 됐습니다. 이는 삼성의 오너 이재용 부회장의 8억7,100만원은 물론, 신동빈 롯데 회장의 152억원,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109억원, 정몽구 회장 80억원 등 대기업 오너 일가들을 훨씬 앞지르는 수준”입니다.
이분은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밥 먹듯 야근하는 엄청난 중노동’을 떠올지만 이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칼퇴근 기업문화를 정착시킨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이분은 일하는 시간보다도,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부자는 8시까지 1차 회식을 마치고 가는 자신의 시간을 갖고 시간을 활용하고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 부자들의 마인드에서 중요한 것
이런 부자들의 마인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먼저 자기발전하기 위해서 투자를 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이런 마인드는 왔다갔다 하는 것도, 오락가락하는 것도, 이랫다 저랫다 하는 것이 이아니라 시작과 끝이 같더라는 것입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발전과 지향성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고, 시간창조형의 마인드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2.말씀의 배경
1) 신통일한국시대 개문안착
천일국 7년을 열기 위한 신성하고 거룩하며 당당하게 밀어 붙이는 2019년 1월 1일 영시원단 축도와 더불어 <<신통일한국시대 개문안착>>이라는 연두표어로, 2만명이 송구영신 0시기도회가 새벽3시까지 열렸다. 천일국시대가 열리면서, 천력으로 전개되었던 6년의 섭리가, 양력 원단으로부터 열린 것입니다.
2) 2018년의 섭리적 결실을 기반으로한 배경
하늘부모님의 독생녀 실체성신으로 이땅의 하늘부모님의 실체주권을 국가복귀 모델로 2018년에 보여주셨던, 세네갈, 짐바브웨이, 네팔에서의 기적 같은 실적은 하늘부모님의 전지전능하심의 그 자체현현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적 같은 승리적 실적을 실체로 봉헌하시기까지 천지인참부모님께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던 곡절을 해원이라도 하듯이 여느 때와는 달리 20여분이 넘는 긴 시간 원단 축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러고나서 짧은 말씀을 축복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첫마디가 “사랑합니다”와 “자랑스럽다”는 말씀의 선포로 문을 여셨습니다.
3)말씀의 제목
이 말씀을 중심하고 <<시작과 끝이 같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원단 말씀을 축복으로 받으면서 가장 맘속에서 맴도는 것이 하늘부모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왜 전지전능하시냐? 많은 것이 있겠지만, 하늘부모님께서 참부모님을 주신말씀으로 보면 시작과 끝이 같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3.말씀을 통해서 주신의 지혜
1) 시종으로 볼 때 사람의 유형
(1)시유종무(始有終無)-이런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사람을 분류하면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사람, (2)시유종변(始有(始有終無)-시작은 있어도 끝이 다른 사람, (3)시종일치(始終一致)-시작과 끝이 같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통 정신력이 어릴수록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경가 많은 작심삼일형입니다.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이유든 환경이든 상로 시작과 끝이 같이 않은, 변질된 경우가 아주 많죠~. 조금 정신력있면서 약간 미숙한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고 상당한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성숙한 정신력을 가진 분들은 시작과 끝이 같은 붇들이지만 사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소수이지만, 창조본성에 가까운 심령을 가진 신성한 인격을 갖출수록 시작과 끝이 같다는 것입니다.
2)시종이 다르게 된 근본원인?
(1)전지전능을 상속받지 못해서-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시작과 끝이 다른 삶을 사느냐? 잘 몰라서, 완전히 몰라서기, 모든 것을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부모님은 성장과정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가 절대자로 완성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닮은 인간 역시도 성장과정을 거쳐서 절대인격으로 신성한 인격으로 완숙하게 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장과정에서 반드시 시작과 끝이 같아야 되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달라졌다면 창조도 성장과정도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작과 끝이 같음을 통해서, 성장과정을 통해서 전지함도 전능함도 상속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성을 상속받는 것이요 그것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책임분담 수행입니다.
(2)천사장 누시엘의 지배를 받아서-그런데 인간시조가 하늘부모님의 전지전능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이었던 천사장 누시엘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하늘부모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시작이 뭔지도 끝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의 종이었던 천사장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다르게 된 삶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왜냐? 사탄이 된 천사장 누시엘은 전지할 수도 없고, 전지해서도 안되는 종으로 창조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서 인간에게 축복을 받아야 온전하게 되는 종으로 창조된 피조물이었기에, 본질적으로 전지전능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감소감이 생겼을 때,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을 해야되는 것을 완전히 몰랐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생겨난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지옥이 만들어지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면, 사랑의 감소감을 절대순종으로 극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알았더라도 많이 알야야 하나님의 깅 개성진리체로 창조되었기에 상징적으로만 알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은 불안한 것입니다. 왔다갔다 이랫다저랫다 하는 것입니다. 처음과 시작이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은 종으로 창조된 것이기에 더욱이 전능할 수는 더욱 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은 처음과 끝이 결국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은, 가짜는, 사탄마귀는 시작과 끝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숙한 것은, 부족한 것은, 불완전한 것은 시작과 끝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면, 잘 할 수 없으면, 시작과 끝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타락한 인간을, 미숙한 인간을 지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타락인간은, 미숙한 인간은, 불완전한 인간은 초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 사탄주관권에 있기 쉽기 때문입니다.
3)시종이 같으려면? 그렇다면 시작과 끝이 같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는가? (1) 첫째가 정체성이 확실해야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절대로 확실한 사람은 시작과 끝이 같다. 하늘부모님은 절대자로서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 정체성이 절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왔다갈 수 있지만 뜻은 왔다가 그냥 갈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맺고 결말을 지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체성이 분명치 않은 것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같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정체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니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자신의 존재를 정체를 밝히는 순간 그는 사실 인간의 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존재가 위험스러울 때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과 끝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척을 할 수 있을지 모만 결단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부모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절대자로 정체성이 아주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당위(책임)와 욕구(바람)가 같아야 시작과 끝이 같습니다. 즉 해야되는 것과 하고 싶은 이 같으면 시작과 끝이 같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과 미숙한 인간일수록 “하고 싶은 것괴 해야되는 것이 다르다는 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행복한 사람일수록 책임감과 하고싶은 것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켜서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스스로 좋아서 기뻐서 신나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과 끝이 같습니다.
왜그러느냐? 하늘부모님께서는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자하는 견딜 수 없는 정적인 충동심으로 피조만물을 창조하였기에, 욕구가 바라이이, 심정동기설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를 사랑하고 싶어서라는 당위가 전제 된 것이 바로 창조의 심정동기설 핵심이기에 욕구가 주체이면서 당위를 대상으로서 성취해야 되는 것이 됩니다.
(3) 진짜야 참이어야 시작과 끝이 같습니다. -정체성이 절대인 것이 참이요 진짜입니다. 바람과 책임이 같을 때 진짜 절대가 됩니다. 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는 참은 순금처럼 처음과 나중이 시작과 끝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변하지 않는 것이 참입니다. 그러니 진짜야 참이어야 시작과 끝이 같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그렇다면 정체성이 확실하고, 욕구와 당위가 같으며, 진짜 참이면 시작과 끝이 같은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나. <<시작과 끝이 같으라>>말씀의 실체세우기
1. 세례요한의 실패들-
(1)엘리사벳의 실패- 엘리사벳은 주의 모친이 누구인지 계시를 통해서 알아았습니다. 어미니쪽으로 마리야와는 이종자매 관계였으며 세례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은 하나님께 영적으로 감동이 되었을 때는 마리야를 “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누1/43)라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석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누1/56)고 기록된 것으로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더욱이 세례요한의 여동생을 예수님께서는 천사장형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는 섭리 앞에 절대적인 믿음으로 형성된 보호기대가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참*강1/114) 만일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계시와 영적인 은혜 아래, 처음 가졌던 절대적인 믿음을 계속가졌더라면 상황은 전연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시작과 끝이 같았더라면 마리아는 3개월 뒤에 그 집을 나왔더라도 그들과 교통하고 의논하였을 것인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시사벳도 대제상이었던 사가랴도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종자매였던 마리아를 성모로 사랑하고 보호해야했지만 자신의 남편과 사랑을 나눈 연적이었던 마라아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하늘부모님을 신앙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감동될 때와 인간적인 자기생각으로 돌아왔을 때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과 끝이 다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성모라지만 실패한 마리아-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자기 몸을 통해메시아가 태어난다는 가브리엘 천사장의 놀라온 메시지를 받습니다.당시 처녀의 입장에서 아기를 가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에 규례였지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하면서 절대신앙으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마리아는 해와와 다말을 탕감복귀해야 할 입장이므로 요셉과는 결혼을 했다하여도 약혼괸계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섭리적으로 보면 부부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는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심으로 안된다고 하면서 마리아는 요셉과 성적관계를 맺게 되어 해와의 실수를 반복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책임과 바람이 달랐던 것입니다. 섭리적인 는 성모의 길을 가고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요셉의 요청을 거절할 수 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작과 끝이 같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성모가 못된 것입다.
자신이 성모라는 정체성도 성모로서 해야될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모가 못 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성령이 감화된 성모에서 그저 인간적인, 타락한 인간의 모친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여 나와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사실 패륜적인 말씀을 하시게 되죠?~ 그러니 얼마나 시작과 끝이 같은 중요합니까?
(3)세례요한의 실패- 세례요한은 엘리야가 재림하리한 분으로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또한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신 분입니다. 여기까지는 세례요한은 하늘부모님에 뜻에 따라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주의 신들메도 감당키 어려운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았어어했는 주님을 증거하고 자신이 한 언행조차 의심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했어도 주님으로 모시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루시엘이 아담을 창조하는 사역에 동참할 때까지만도 문제가 없었지만,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참사랑의 수준과 내용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자체자각으로 깨닫게 되자, 그것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감소감으로 천사장 루시엘을 변하게 했던 것처럼 세례요한은 증거할 때까지는 사명을 했으면서도, 정작 이복동생이였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위와 가 같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감소감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현실과 환경 때문에, 자기 생각 때문에, 자기중심 때문에 초심이 첫마음이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 뭘했는지도, 뭘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섭리에 대한 무지한 자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감옥갇혀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다시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리라한 이가 당신입니까? 오리한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얼마다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래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누7/22~23)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변해버린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이 될 때와 인간적인 생각으로 대할 때가 달랐던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세레요한은 시작과 끝이 달랐으며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작은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곽정환과 유정옥의 실패-참아버님의 성화 속에서 모든 제자들과 참자녀님들이 일체가 되었더라면 참어머님의 고충은 아픔은 그래도 다소 위로라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아버님의 성화를 재촉했던 곽정환도, 참아버님께서 성화직전의 모든 말씀을 대신하게 하여 본체론말씀하게 하셨던 유정옥도 현실 때문에 참아버님 승화라는 상황 때문에 변질 되었습니다. 섭리사의 중요한 부분을 감당케했던 곽정환도 기원절 개문을 앞두고 성체봉헌의 길을 가시면서까지 중용했던 유정옥도 시작과 끝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섭리역사를 그렇게 가르켜주고 깨우쳐주며 참부모님 특히 참아버님의 절대적인 참사랑을 받았던 그들도 천사장 루시엘의 모습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시종일치-하늘부모님께서는 아담을 대신하여 후아담인 독생자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독생자로 오신자신을 들러낼 수 없었던 상황하에서도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목숨을 걸고 스스로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19장/28-40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준비된 세례요한,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영접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책임을 못하였기에 어부*세리와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모습으로 들어가셔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히 왕이라 칭하면 죽음이었던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시작과 끝이 같게 증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에 왕의 모습으로 입성을 해야했던 예수님은 준비되지 못한 환경에서 남에 집에 메여있는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풀어타고 예루살렘에게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왕이 성에 입성하게 되면 양탄자를 깔죠~ 그런데 말도 아닌 나귀로 그것도 나귀 새끼에 제자들의 옷과 침량으로 만들어진 안장을 만들고 그위에 타서 제자들의 옷가지들로 땅에 깔게 됩니다. 그 길로 들어오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 몰골이 얼마나 흉흉했겠습니까?
그러자 바리새인이 나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지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씀이요 선포였습니다. 환경이 어떠튼 그를 대하는 사람이 누구였든지 간에 자신이 메시아임을 하나님의 독생자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늘부모님을 증거하고 는 것 하늘부모님을 통한 구원사역자로 독생자임을 상황에 따라 왔다갔ㅏ 현실 때문에 이랬다 저랬다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으셨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상황속에서도 시작과 끝이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고, 죄없는 당신을 십자가에 달면서 비소하고 조소하던 그들을 하늘부모님께 용서를 간청하는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십자가에서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실천궁행하심 같으셨던 것입니다.그러니 하늘부모님의 전지전능함이 나타나셔서 결국을 부활의 실체가 되신 것입니다.
3. 참부모님의 시종일치
그러니 예수님의 남기신 유업을 이루시기 위해 제3아담으로 오신 참아버님께서는 처음과 끝, 처음과 나중이 같으신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달라질 수 있는 변질된 인격과 인간이라면 그는 이미 하늘부모님의 직접주관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 어릴적에 이미 일문일답을 하면서 길러주셨지만, 직접주괸이라는 자리에 가면, 시작과 끝이 같지 않으면 십자가의 길, 성체봉헌 해야 는 것입니다.
참아버님은 고르바쵸프를 만나서도, 김일성주석을 만나서 시종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하늘부모님의 뜻을 이루는 것, 하늘부모님의 해방과 인간 해방이셨습니다. 제자를 만나는 것이나, 세상 사람을 만나는 것이나, 원수사탄을 만나는 것이 하늘부모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시작도 동기도 과정도 심지어는 방법도 결과도 끝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참어버님은 참아버님께서 성화하신 성체 앞에서, 천일국을 정착시켔다고 다짐을 합니다. 당시상황으로 보면, 현실적인 눈으로보면 과연 이말씀이 지켜질 것인가? 변함없이 진행될 수 있을까?
그러시면서 중단없는 전진, 신령과 진리로 거듭나라, 그리시면서 제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제자들과 심지어는 중요한 일부 직계 자녀들에게서조차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없는 수모와 반대를 겪으시면서도 스스로 독생녀를 선포하시고 섭리적인 결실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불신하던, 반대를 하던, 핍박을 하던, 상황이 어떻든, 그곳이 아프리카든 그곳이 이슬람이던, 그곳이 유럽이던, 그곳이 미국이던 독생녀를 선포하시고 그 실체를 실적으로 입증하고 계십니다. 시작과 끝이 같으심을, 참어머님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 참어머님이 실체성신, 독생녀로 오셨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절대확신, 하늘부모님의 뜻인 천일국 안착을 신통일한국시대 개문안착시키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심정과 책임이 확실하시기에 시작과 이 같으실 수밖에 없으신다는 것입니다. 참은, 진리는, 원리는 시작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같기 때문이 하늘부모님은 반드시 절대로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참부모이신 독생녀이시라면 시작과 끝이 같으신다는 것입니다.
다. <<시작과 끝이 같으라>>말씀의 실체로촉구
시작과 끝이 같으신 분이 하늘부모님이십니다. 참부모님은 시작과 끝이 같으신 분이십니다. 자연은 시작과 끝이 변함없이 같기에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진짜 참은 절대로 자신이 원하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선일 때는, 그것이 보다 공동체를 위할 때는 더욱더 변할 수가 없습니다. 도중에, 환경과 상황 때문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전화위복으로 삼게 됩니다.
2019년을 시작하면서 내 자신을, 내가정을, 우리교회를, 천일국을 위해서 시작을 하고 싶은 것이 절대로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작과 끝이 같으신 하나님을 닮으십니다. 시작과 끝을 같게 살고계시는 참부모님을 중심에 모십시다. 시작과 끝이 같은 자연처럼 시작과 끝이 같은 자연스러운 생활이 되도록 천일국 7년을 힘차게 신나고 기쁘게 정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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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