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유식한 사랑(有識之愛)
빌립보서 1:9, 고린도전서 8:1-3
체부동교회
7월 14일 (주일)
愛之爲言甚簡單而亦甚繁複也. 故主言世無可置之處. 然則非行愛之難也, 卽知愛之難也. 人皆言孝而不能行孝者以不知孝也. 人皆言愛而不能行愛者以不知愛也. 故保羅曰願愛由識而豊盛也云. 主謂猶人曰 爾爲瞽者必無罪也云, 此何意? 猶人自謂能見而實不見故云耳. 人之罪多生於自知也, 我無知云者實未犯罪, 而今世多知能犯, 可謂識者憂患也, 自謂有識者實多犯罪也. 日本近日學者, 爭相唱導者, 高等敎育機關, 皆高等遊民養成所也云. 未有立身之處而徒爲養成, 流於放浪, 多陷於罪過矣. 此皆有識乎? 實皆無知也. 如己不成而自料已成者是自欺也云. 誠哉是言也! 人皆陷於自欺, 欺人亦不可爲, 況自欺乎? 然人多自欺, 飮酒誰不知爲害, 喫阿煙誰不知爲害也, 然人多愛飮愛喫者何也, 自欺之故也. 自欺之害非徒身亡, 足以亡國, 隋煬惑佛至餓死而不悟, 是自欺也. 押沙(Absalom)竟抗父至死而不悟, 是自欺也. 蕩父財身陷大罪而不悟亦自欺也. 先儒曰無自欺誠也, 以心制心甚無規則, 發縱無倫, 昨非今是, 或今非昨是, 無一定不變之眞理也. 故心可受制於他而可以安靜無事, 使神與理鑑視可也. 君子畏神甚於君, 畏理甚於法也. 於是心有所定也. 王密遺金於楊震, 震曰天知地知我知子知, 仍不受也. 心受制則定, 車從軌則安. 覂駕之馬甚危, 橫走亂跳是以傷人也. 故心受制於神及理, 所謂知識從此而生, 於萬事爲龜鑑. 一接外物證然無事矣. 然則何爲有識之愛也? 比如母愛子而饋食無節, 子罹病而死, 以母無識也. 吾人當學愛主, 又學愛人, 工夫此兩者而使不誤可也. 愛主如何也? 愛之欲不忘, 忘之非愛也. 主爲吾捨身, 當不忘其恩也. 漢不忘諸葛而立祠, 宋不忘岳飛而立祠, 何限此兩人也? 古之爲國捨命者, 其國人當不忘其功, 周人不忘邵伯, 勿剪甘棠, 吾人肉碑也, 當記主之恩功, 雖風雨磨滅不得也. 善竹有圃隱之血迹, 東人至今不忘也. 忘之如何? 忘父爲不孝, 忘國爲不忠, 非徒爲不信者, 亦爲叛逆者也. 然吾不忘其恩, 使主之體常使不腐於世. 馬利亞之注膏, 欲不腐主之體也. 愛當崇拜, 拜之如何? 常常祈禱, 恒黙想其訓, 使不踰其法度也. 我爲其僕, 我爲其徒, 我爲其弟, 常以榮主爲事. 多結實而以榮其樹, 多發花而以榮其木, 此皆有識之愛也. 溪邊之樹, 隨時發葉者, 以其在溪邊故也. 植木者當察之矣. 然無識者不從植木之法, 而使植不宜之地, 則其木必枯落矣. 孰不愛身也? 愛身則當不用害身之物也. 然冥然不覺, 蓄妾愛飮, 使得肺病而死矣. 夏間飮熱湯而常飮氷水, 則不幾日生病泄瀉, 欲愛身而猶不知愛身也. 保羅曰愛有識而豊盛也, 誠哉是言也! 其次愛人, 吾信後最工夫者當愛人也. 愛之道易則易難則最難也, 何者爲愛也? 養之爲愛乎! 犬馬亦有養也, 養何足爲愛也? 曾子曰養其父母, 養其口體者, 非孝也. 養其心志者爲孝也. 儒家之愛有差等, 路人之愛父母之愛有差等, 世人之愛國家之愛有差等云, 耶蘇之博愛之說, 人類則同愛, 差等之愛個性而已也. 遵神旨者, 爲父母爲兄弟爲姉妹也. 主之心胸如太陽無擇而照也. 然在家何嘗忘父母乎, 猶助其木手之父, 爲父當愛, 爲子當愛, 亦主之心也. 然則吾有友人, 當何以爲愛乎? 當愛其靈也. 其靈爲罪陷藪駸駸然入死地, 當忠告而導之, 蓬麻蛩蚷相互扶助也. 故友人昌則我亦昌, 友人衰則我亦衰, 靈犀相照, 是謂知己也. 故曰友有益三損三. 同勞爲愛, 故保羅曰 愛而勞, 我逸樂而彼悲慘, 我高位而彼卑賤非愛矣. 故古有車笠之盟. 主曰我爲爾友, 友則同勞. 頒白不負戴於道路, 是愛老人也. 山無盜賊, 道不拾遺, 夜不閉門, 是愛人物也. 愛有熱力能燒不潔也. 物所腐而照太陽消毒則完, 我有不道之罪而有熱情之反, 則能燒我之罪也. 父母不能止, 師傅不能止者, 惟友止之, 故友者友德也, 不可以有抉也. 彼得不給躄者金銀, 而與나사렛예수之名, 愛躄者甚矣當矣. 與金不過一時之愛, 而與聖名爲一生之愛也. 主曰愛人者非愛躬殼也, 卽愛其靈魂也. 愛讐云者亦指靈魂也. 有罪之躬殼, 吾何能愛着也? 保羅曰宝在土器, 土器不足愛, 其宝可愛也, 躬殼不足愛也, 靈魂可愛也. 吾對人有如是之心也. 以躬殼言之, 則有黃白之別, 有國家之別, 而至靈魂則四海爲兄弟也. 政治主其躬殼, 宗敎主其靈魂, 今日文明外國, 非宗敎則皆野蠻也. 今日皆無視靈魂, 白人無視黑人, 西人無視東人, 互相呑唅, 嗚呼! 世人皆入無知之國, 禽獸不遠, 皆有無識之愛, 故保羅曰 愛之爲何? 有知識而後, 可豊盛矣, 無相唅之患矣. 吾人當勉勵也. 「以上體府洞」七月十四, 主日.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또한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행함이 어려운 게 아니라 사랑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효도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효도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효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유대인에게 ‘너희가 소경이 된 것은 반드시 죄 때문이 아니라’ 하셨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유대인들이 ‘볼 수 있는 데도 실제로 보지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사람의 죄는 스스로 알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많습니다. 지식이 없다고 이르는 자는 실로 죄를 잘 짓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상에는 지능 범죄가 많으니 지식을 가진 자가 더욱 걱정이 많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유식자라고 이르는 사람이 실제로 범죄가 많습니다.
일본에서 근일에 학자들이 서로 앞장서 부르짖는 것은 ‘고등교육기관이 모두 고등실업자[遊民] 양성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워줄 곳이 없는데도 그냥 양성만 하기 때문에 흘러 다니며 방랑하다가 범죄에 빠지는 자가 많습니다. 이게 다 유식한 것입니까? 실제로는 무지(無知)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성취하지 못 했는데도 이미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데 모두 빠져있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자신을 속이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속입니다.
술을 마시는 일이 해로운 줄 누가 모르며 아편이나 담배를 피는 것이 해로운 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음주와 끽연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해(害)는 자신만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망하게 합니다. 수양제(隋煬帝)는 불교에 현혹되어 굶어 죽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압살롬(押沙 :Absalom)은 끝까지 아버지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자기를 속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자신은 큰 죄악에 빠져 있으면서 깨닫지 못 하는 것도 역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옛 유학자[선유先儒]가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한 말은 진실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규칙이 없으면 질서가 없어져서 어제 그르다고 한 것을 오늘 옳다고 하고, 혹은 지금 그르다고 한 것이 어제는 옳았던 것이 되어 변치 않는 진리는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다른 한 쪽에 제약을 받아야 안정되어 아무 탈이 없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나 진리가 감시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훌륭한 사람[군자君子]은 하나님을 임금보다 더 두려워하고, 진리를 법보다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마음이 정해진 바가 있게 됩니다. 후한(後漢)시대 왕밀(王密)이 양진(楊震)에게 밤에 몰래 뇌물을 바쳤더니, 양진은 그것을 받지 않고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니,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겠는가[天知地知我知子知]’하고, 그것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음은 규제를 받으면 진정되고, 수레는 궤도를 따르면 편해집니다. 멍에를 벗어난 말은 매우 위태로우니 이리저리 함부로 뛰어 달리므로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이나 진리의 규제를 받습니다. 소위 지식이라는 것도 여기서부터 생겨나서 만사에 귀감이 됩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외부의 물체와 부딪쳐도 결코 아무 탈이 없습니다.
그런즉 어떻게 하여야 유식한 사랑이 되겠습니까? 비유해 본다면,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여 그 자식이 병들어 죽게 됩니다. 이는 어머니가 무지한 탓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공부하여 착오가 없게 해야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자면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일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잊어버리면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않아야 마땅합니다. 중국 한(漢)나라는 제갈량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사당을 세웠고, 송(宋)나라는 악비(岳飛) 장군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사당을 세웠습니다. 어찌 이 두 사람에 한정 되겠습니까? 옛날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를 위하여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공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周)나라 사람은 재상인 소백(邵伯)을 잊지 않으려고 그가 머물렀던 감당(甘棠)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비(肉碑)입니다. 주님의 은공을 기억하여 비바람이 불어치더라도 마멸(磨滅)시키지 못합니다. 선죽교에 포은(圃隱)의 핏자국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잊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를 잊으면 불효가 되고, 나라를 잊으면 불충이 됩니다. 주님의 은공을 잊으면 불신자(不信者)가 될 뿐 아니라 또한 반역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주님의 몸으로 하여금 세상을 늘 부패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것은 주님의 몸을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숭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숭배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늘 기도를 하고, 항상 그 가르침을 묵묵히 생각하여서 그 법도에서 넘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내가 그의 종이 되고, 문도가 되고, 제자가 되어 늘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일삼아야 합니다. 열매를 많이 맺게 하는 것이 그 숲의 영광이고, 꽃을 많이 피우게 하는 것이 나무의 영광입니다. 이 모두 유식한 사랑입니다.
시냇가의 나무가 때에 따라 잎을 피우는 것은 시냇가에 있기 때문이므로 나무를 심는 사람은 마땅히 잘 살펴서 심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은 식목하는 방법을 모르고 성질에 맞지 않는 땅에 심으면 그 나무는 반드시 시들어 잎이 떨어지고 맙니다.
누군들 몸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몸을 사랑하려면 마땅히 몸에 해로운 물질은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전연 깨닫지 못하고 첩을 두고 술을 마시어 몸을 해친 결과 폐병 같은 병이 들어 죽게 됩니다. 여름에도 뜨거운 물을 마셔야 하거늘 늘 차가운 빙수 같은 것을 먹게 되면 며칠 되지 못하여 병이 나고 설사를 합니다. 몸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몸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랑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이는 진실한 말입니다.
그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가진 뒤에 가장 힘써 공부한 것은 마땅히 남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어떤 것이 사랑입니까? 사랑으로써 기르는 것입니다. 개나 말도 역시 기릅니다. 기르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됩니까?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모를 봉양하는데 있어서 그 입과 몸만 봉양하는 것은 효도가 될 수 없고, 그 마음과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것이 효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유교의 사랑에는 차등이 있습니다. ‘길가는 이를 사랑하는 것과 부모를 사랑하는 것에 차등이 있으며, 세상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나라와 집을 사랑하는 것에도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박애설(博愛說)은 인류를 똑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차등이 있는 사랑은 개성에 따라 다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부모요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태양과 같아서 차별하여 비추지 않습니다. 집에 있을 때 언제 부모를 잊겠습니까? 예수는 그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주었으니, 아버지를 위하여 당연히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 당연히 사랑한 것이 역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친구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마땅히 그 영혼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영혼이 죄의 숲에 빠져 빠르게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땅히 충고하여 죄에서 빠져 나오도록 인도하여야 합니다. 마치 쑥대와 삼대[봉마蓬麻]가 서로 의지해 살고, 메뚜기와 노래기[공거蛩蚷]가 서로 부족한 점을 보충해 주듯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친구가 잘되면 나도 잘되고, 친구가 쇠약해지면 나도 쇠약하게 되니, 이는 영감이 서로 통하게 된 것으로, 이것을 지기(知己)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로는 유익한 벗이 셋이 있고, 손해를 끼치는 벗이 셋이 있다고 합니다.
함께 노력하여 사랑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고 노력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편히 놀고 즐기며 상대는 비참하게 된다든지, 나는 높은 지위에 있으며 상대는 낮은 지위에 있으면 사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친구를 맺은 뒤에 지위가 서로 다르게 되면 뒷날 만날 때 낮은 사람의 신분과 같은 조건으로 즐기자는 거립지맹(車笠之盟)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나는 너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되었으면 노력도 같이 해야 합니다. <맹자>에는 ‘머리가 쇤 사람이 길에 짐을 지고 다니는 일이 없어야 한다.’ 고 하였는데 이는 노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 <사기史記>에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는 흘린 물건을 주워가지 않으며,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산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물건의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뜨거운 힘이 있어서 깨끗지 못한 것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물건이 썩을 때 태양이 내려 쪼여 소독해 주면 완전하게 됩니다. 내가 부도덕한 죄가 있을 때 열정으로 회개하면 그 죄를 소멸시킬 수가 있습니다. 부모도 막지 못하고, 스승도 막지 못하나, 오직 친구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는 덕으로써 벗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금과 은은 주지 않았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사랑하는 것이 크고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금을 주는 것은 일시적인 사랑이지만 거룩하신 이름을 준 것은 일생의 사랑을 준 것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그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영혼을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도 역시 그 영혼을 가리킨 것입니다. 죄를 저지른 몸뚱이를 내가 어찌 애착을 갖겠습니까?
바울이 이르기를 ‘보물이 토기에 있다’고 하였는데, 토기는 사랑할 것이 없으나 거기 담긴 보물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몸뚱이는 사랑할 게 없으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상대할 때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몸으로만 보면 황인종과 백인종으로 나눌 수 있고 국가에 따라 구별할 수 있지만 영혼에 이르러서는 온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됩니다.
정치에서는 몸을 주인으로 보지만, 종교에서는 그 영혼을 중심으로 합니다. 오늘의 문명은 발달 된 종교가 없으면 모두 야만입니다. 오늘에는 모두 영혼을 무시합니다. 백인들은 흑인을 무시하고, 서양 사람은 동양 사람을 무시합니다.
아하! 안타깝습니다. 세상 사람은 모두 무지(無知)한 나라로 빨려 들어가서 새나 짐승보다 그리 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무식한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르기를 ‘사랑을 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지식이 있은 뒤에 풍성함이 있어 서로 물고 뜯는 우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이상은 체부동體府洞」에서. 7월 14일, 주일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