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고구려-의주 검산령 평양 高句麗 (義州 劔山嶺 平壤) 4
遼海歸旌數片紅
湯湯薩水捲沙蟲
乙支文德眞才士
倡五言詩冠大東
遼海의 帰旌이 数片이 紅한데
湯湯한 藤水에 沙虫을 捲하였도다.
乙支文徳은 참 才士라
五言詩를 倡하여 大東에 冠하였더라.
帰旌은 隋揚帝의 敗板하는 旗라 湯湯은 浩浩와 같다.
薩水는 交清川江이니 舆地勝覧에 其源이 妙香山에 出하여 安州 城北을 経하고 西로 삼십 리를 流하여 博川江으로 더불어 合流하여 海에 入하였다.
沙虫은 沙場의 飛虫이니 戦争 後 沙場에 나는 벌레라. 支那南方에 이 벌레가 있어 往往히 人을 害한다 하였다. 乙支文徳은 高句麗 陽王時의 勇将이라.
三国史에서 말하는데 乙支文徳이 沈謺하여 智가 有하니 支那隋帝楊広이 句麗에 入할 때 左翊衛 大将宇文述은 夫余道에 出하고 右规衞大将 于仲文은 楽浪道에 出할 때 九軍을 거느리고 鴨緑水에 이르기를 文徳이 隋軍 餓色이 있음을 보고 疲하게 하고자 하여 毎戦에 문득 달아나니 隋軍이 一日에 일곱 번 이겼다.
東으로 藝水를 건너니 平壤에 去하기 겨우 三十里라 山을 因하여 진치거늘 文德이 使를 遣하여 述에게 거짓 항복하였는데 述等이 陣을 거두어 돌아 갔다.
文德이 軍을 出하여 四面으로 抄撃하여 藤水에 至하여 隋軍이 반쯤 건너니 文德이 그 後軍을 擊하여 右屯衙 将軍辛世雄을 죽이니 諸軍이 다 遺散하여 달아날 때 一日一夜에 鴨緣에 이르니 처음 遼를 渡한 者 三十五万五千人이었는데 遼東城에 돌아올 때 겨우 二千七百人이 남았더라.
五言詩는 文德의 詩니 처음 于仲文이 軍올 率하고 鴨緣水에 至하니 文徳이 거짓 降하는지라.
仲文이 執하고자 하니 尙書右丞 劉士竜이 짐짓 挽止하여 놓았다가 後悔하여 다시 文徳을 속여 가로되 다시 의논이 있으면 오라하거늘 文徳이 不従하고 드디어 鴨緑을 渡하니 仲文이 騎를 選하아 물을 건너 싸우니 文徳이 仲文에게 詩를 遺하여 曰 神策究天文 妙窮地理 戰勝功既高 知足願云止라 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仲文의 마음을 교만케 하였다.
<한글>
요동땅에서 돌아오는 군기(旗幟)가 수많이 피범벅이 되었는데
넓고 드넓게 흐르는 교동강에 전쟁터의 파리들이 떠밀렸구나.
을지문덕은 참으로 재능 있는 무사였지
오언시를 지어 고구려의 명성을 높였었다.
'귀진'은 수양제가 패배했을 때의 군기를 말한다. '탕탕'은 '浩浩'와 같은 뜻으로 넓고 드넓다는 의미이다.
교동강은 舆地勝覽에 의하면 명향산에서 발원하여 안주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30리 가서 복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사충'은 전쟁이 끝난 후 모래밭에 나는 파리들을 가리킨다. 중국 남방에 이 파리가 있어 사람을 해친다고 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양왕 때의 용맹한 장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을지문덕이 깊이 생각하며 지혜로웠는데, 중국 수나라 양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좌익위대장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아가 9군을 이끌고 교동수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은 수군이 기진할 것을 보고 매번 싸움에서 갑자기 도망가니 수군이 하루에 7번이나 이겼다.
동쪽으로 예수를 건너니 평양까지 겨우 30리였다. 산으로 인해 진지를 구축하자 을지문덕이 사신을 보내 우문술에게 거짓 항복했고, 우문술 등이 진영을 거두고 돌아갔다.
을지문덕이 군대를 이끌고 사방에서 기습했다가 교동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그 후군을 공격하여 우릉야장군 신세웅을 죽이니 수군이 모두 허망하게 달아났다. 하룻밤 사이에 교동수에 이르렀는데, 처음 요하를 건넜던 35만 5천 명 중 겨우 2천7백명만 요동성에 돌아왔다.
오언시는 을지문덕의 시였다. 초기에 우중문이 군대를 이끌고 교동수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을 하자, 우중문이 체포하려 했다. 상서우승 유사룡이 일부러 말렸다가 후회하여 다시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의논할 일이 있으면 오라"고 했지만, 을지문덕은 따르지 않고 결국 교동수를 건넜다.
우중문이 기병을 뽑아 강을 건너 싸웠는데,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보내며 "신묘한 계략으로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고 지리를 꿰뚫어 전쟁에서 이기니 그 공이 이미 높습니다. 아시길 바라오니 만족하고 그만하소서"라고 했다. 대개 그 뜻은 우중문의 마음을 교만케 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