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해아밀사(海阿密使)
보호조약이 성립된 후에 제의 심경은 매우 불안하였다. 전후좌우에 적신들이 둘러있어 제는 감금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 이 답답한 사정을 말하랴. 신문은 모두 일적들에게 매수되고 만일 일본을 반대하는 신문이 있으면 하고 신문을 사들여 보셨다.
그중에 매일신문이 가장 강경하고 조금도 일본에 아부함이 없다. 어느 측근자를 통하여 제의 심정을 적은 글을 주었다. 이것이 매일신보에 게재되고 세상이 알기는 이번 보호조약이 제의 본의가 아니요 역신들의 강청과 일적들의 강압으로 된 것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광무11년 6월에 화란(和蘭) 해아(海阿)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제의 친서를 이상설이 이준 이위종 등 삼인에게 주어 평화회의에 제출케 하였다. 삼인이 해아에 이르러 제의 신임장을 가지고 회에 제출하고 보호조약이 제의 본의가 아닌 것을 설명함에 미국사람 헐버트가 우리의 뜻을 동정하여 조약의 비법을 힘써 말하였으나 일본대표의 반대로 성립이 되지 못하였다.
일이 뜻같이 되지 못함에 이준이 그 회석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여 원통 억울함을 보였다. 그 회에서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일본에 묻게 되니 이 문제가 크게 거북하게 되었다. 일한조약이 화평이냐 강압이냐 일적들은 이 문제를 광무제께 돌리고 7월 18일에 일본 외무대신 임동이 조선에 와 통감이등과 총리 이완용과 밀의하고 제에게 강박하여 19일 오전 3시에 황태자에 전위하여 군국대사를 대리하는 의미로 양위조칙을 내리니 이 결과로 18일부터 인심이 흉흉하여 그날 밤에 일절 회의 기관 신문사를 부시며 비분한 연설회가 도처에 있고 경성이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
전동(典洞) 시위대 군인들은 병영에 나와서 일인들을 사살하며 또 일본군대가 달려와서 진정하였으나 20일에는 또 이완용의 집을 부수는 등 경성은 완연히 전시상태로 화하였다. 밀사 이상설 이위종은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고 그리고 20일에 양위식을 중화전(中和殿)에서 거행하고 23일에 전 황제에게 태황제라 칭하고 년호를 고쳐 융희(隆熙)라고 칭하고 영친왕 은(垠)을 봉하여 황태자라 하고 27일에 돈덕전(惇德殿)에 즉위식을 행하다.
나라의 주인인 이 임금이냐 백성이냐 임금은 백성들에게 위임 맡은 사람으로 이런 큰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까. 광무제가 보호조약 성립할 제 너무 경솔히 처리하고 자기 지위까지 떨어지게 되어 지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제의 말과 같이 역신들의 핍박과 일적들의 강압을 받았다는 말은 임금으로 책임 있는 말이 아니다. 그 후 어느 선배는 말하되 광무제는 망국주이니 국상을 입을 것 없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