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오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으로 나는 가네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가는 마음이 무겁구나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이팔 청춘 어제더만 벌써 내가 이리되었네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북망 산천 좋다더만 나는 여기가 더 좋았네
어~허 허허허 허~ 허허 허하 허이여
선산 장지로 오르는 선소리꾼의 상여소리가 구구절절 구슬피 울리니 속으로 내던 설움소리가 나도 모르게 겉으로 터져나온다 상여꾼들은 호상일 때는 느리게 움직이며 장난도 치던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내내 올라갔다
뭐가 그리 바쁘시길래 황천 가시는 길도 그리 바쁘실까? 이 생이 그리도 지긋지긋하셨을까? 아니면 이 생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한을 조금이나마 덜 남기려고 이렇게 빨리 가시는 것일까?
나는 6월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학교에 묶이어 교실 안에서 17시간을 지내던 때이다
주변에 대학교가 두어 군데 있어서인지 고등학교 밖 흙벽 앞엔 광주민주화운동 때 일어났던 잔악한 모습의 사진들이며 각종 그런 사진을 설명하는 대자보며 현 정권이 알지 못하게 행하는 나쁜 정책들이며를 행인들에게 알리는 벽보들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데모대의 함성들이 들리며 최루탄이 터지고 하얀 연기가 도시 전체를 휩싸기도 하였다 최루탄 가스로 인한 재채기를 내지 않으려 창문을 꼭꼭 걸어 잠궜다 그런 모습 때문에 우리 고등학생들도 거기에 동참해야 된다는 학생들과 그런 곳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들간 실랑이가 간혹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들어간 1989년엔 이미 6 · 29 선언이 발표된 뒤였지만 그러한 민주화 혁명일을 기념하여 집회가 수시로 일어나고 또한 데모도 간혹 있었다
나도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탈춤반이라는 운동권이 강한 동아리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분위기로 인하여 잘 알지도 못하면서 데모대 앞에 선 때가 있었다
한창 데모대와 경찰 전경대가 대치하다가 구호와 함께 몰려가며 험한 꼴을 연출한다. 그러다가 풍물놀이 풍물패가 그 사이를 한바퀴 돌며 풍물이 울릴 때는 양편 다 도로에 앉아 그 음악을 들으며 쉰다 그러다가 또 데모대 학생장의 지휘에 따라 화염병을 던지고 짱돌을 던지면 전경대에서도 최루탄을 쏘고 같은 짱돌을 던지며 진격해온다 대부분 그 즈음 되면 데모대는 도망치고 해산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연출 같으면서도 실제인 학생운동을 1년에 너댓번 참여했다 가끔은 총궐기를 해야 한다고 서울로 이동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도 나이지만 경찰대를 나와 전경대를 통솔하는 바로 위 형이 생각나고 그러한 데모를 통해서만 해야 하는 투쟁이 과연 한 나라에서 같은 형제끼리 왜 이래야 하는가 회의가 들기도 했다
어쨌든 광주민주항쟁에 무차별한 내란 선동이라는 미명아래 일반 시민을 잔악하게 살상한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그 뒤 그 죄 값의 일부나마 받는 불완전하지만 일부분 납득할 만한 처리들이 생기게 된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5·16 쿠데타 이후 32년간 지속된 군부 세력의 통치는 비로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친일 후손은 사법계에 30%가량, 정치계에 20% 가량, 대기업에 40% 가량, 경찰, 정부, 언론, 교육 등 고위직에 다량 포진하고 있어 이 사회는 그리 크게 변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반란이 직간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아이엠에프 라는 국가부도 상태이다.
10세기 후반 공산주의 정치제도의 실패로 소련이 급격히 붕괴되고 중국(중국공산당)도 역시 공산주의가 가진 한계를 드러내며 신자유주의 노선에 발을 들여 놓으며 개방화 정책을 쓴다. 이런 일련의 세계 정세는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에 복속이 되고 미국을 포함한 선진 유럽, 일본 같은 강대국은 이제는 지구촌이라는 한 울타리로 좁아진 세계의 경제를 가지고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라크에서 일어난 걸프전쟁이다
부시 행정부가 대외 부문에서 활기를 보임과 동시에 국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 강구에 부심하던 1990년 8월에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이 바로 걸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약 5개월 사이에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과 소련의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전 세계 국가에 이라크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필두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대이라크 경제제재 조치를 결의했다. 또한 부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견했으며, 고르바초프와의 헬싱키 정상회담을 거쳐 걸프 해역에 병력 증파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이라크군이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무력사용을 승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의 후세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는 이스라엘부터 쳐부수고 말겠다."
이후 약 2주간에 걸친 미국·유엔·이라크 간의 걸프 사태 해결 노력마저 허사가 되자 걸프 해역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아니, 사실상 공격 준비가 완료된 다국적군에 공격 명령이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
마침내 부시는 1991년 1월 16일 오후 '사막의 폭풍작전'이라는 표제가 붙은 서류에 미합중국 대통령 이름으로 사인했다.
다음날 새벽 2시부터 4시간 동안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무려 1만 8천 톤에 달하는 폭탄이 퍼부어졌다. 이라크군의 반격은 실로 미미했다. 간헐적으로 대공포가 발사될 뿐이었다. 이후 2차례에 걸쳐 다국적군의 공습이 추가되었다. 바그다드의 주요 군사시설들이 사라졌다.
1월 18일부터 감행된 후세인의 반격 작전에도 불구하고 1월 24일에 다국적군의 상륙 부대는 걸프 해역에 집결, 마침내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5일 후인 1월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지상전인 바스라와 카르쿠크 전투가 벌어졌다.
다국적군은 공중과 지상의 입체 작전을 펼쳤고, 전쟁은 점차 하늘에서 지상으로 옮겨져 지하까지 파고들었다. 이런 와중에 부시는 연례 연두교서에서 걸프전 후 세계질서 재편을 강조하였고, 후세인은 미 동맹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라크의 50여 개 유정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3일 후인 2월 13일에 소련 특사 프리마코프가 바그다드를 방문하였다. 이틀 후인 2월 15일에 이라크 혁명평의회는 쿠웨이트에서의 조건부 철군 용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다국적군 참가국들은 이라크의 이 같은 발표를 즉각 거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부시는 소련·이라크 간의 회담을 거쳐 제시된 소련의 평화중재안도 거부했다. 그러자 후세인은 2월 22일 바그다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속항전'을 선언했다. 얼마 후 부시는 24일 오전 2시까지 이라크가 무조건 철수하지 않을 경우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다음날 개시된 다국적군의 전면적인 지상공격은 결국 이라크로 하여금 '쿠웨이트에서의 즉각 철수'를 시행케 하였다.
마침내 2월 27일 쿠웨이트가 해방됨과 더불어 부시 대통령이 군사행동 중지선언을 함으로써 사실상 걸프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렇게 끝난 걸프전을 통해 전 세계는 현대과학 문명이 만들어낸 최첨단 과학무기의 위력에 새삼 놀라게 되었고, 미국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쿠웨이트의 해방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이제 미국은 이 지구촌을 자국 마음대로 통솔할 수 있는 권력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군사력으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이다
쿠웨이트의 해방은 단순 한 나라의 해방을 떠나 당시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원유의 생산 및 유통을 미국의 손 안에 두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영향력이 있는 일본, 한국 같은 나라를 동참시켜 다국적군이라는 허울 아래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한 전쟁인 것이다
우리가 해방이후 계속하여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이 지경의 시스템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직도 미국의 식민지 아닌 식민지이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그러한 강대국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우리는 한방에 나라가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이 국가부도로 인한 아이엠에프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사건인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정부의 경상수지는 급감하고 있었으며, 나랏빚은 1,500억 달러가 넘어서고 있었다. 1997년 여름을 강타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홍콩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연쇄적인 외환 위기는, 그해 가을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1월 사이에 약 3,000여 기업들이 도산했으며, 실업률은 3.1%에서 4.5%로 폭등하는 등 최악의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외환 위기가 발생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고정환율제도가 있었다. 고정환율제도는 환율을 고정시켜 운용하는 제도로, 정부가 수출을 증대시키고 비교적 쉬운 물가정책을 펴기 위해 추진되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OECD에 가입하기 위해 원화가치를 고평가해 국민 소득을 10,000달러로 유지하고자 했고, 환율시장에 개입하면서 다량의 외화를 방출했다. 이 결과 1996년 330억 달러였던 외환보유액은, 1997년 204억 달러로 급감했다. 이밖에도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금융기관의 부실화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1997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이 당선되면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IMF 체제에서 시중은행의 금리는 연 29.5%로 상승했고, 공기업들이 민영화되면서 공공부문의 전체 인력 20%가 감원되었다. 일반 기업들도 이에 따라 명예퇴직과 희망퇴직 제도를 시행해 대규모 해고를 단행했다. 민간에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아 바뀐 듯 바뀌지 않는 현실이여
한 올가미를 빠져나가면
또 다른 올가미가 그물을 치고
결국 올가미 안에서만 발버둥 치는구나
이 나라 민중은 그 그물 속에서
영원히 빠져 나갈 수 없는 구조로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법의 테두리도
민중에게만 해당되는 법이고
민중의 지팡이라는 공권력도
민중의 문제에만 국한된 권력이구나
죽지 않을만큼만 먹이면서
평생을 기득권 친일세력의 노예로서
쉬지말고 부지런하게 희생해야 하는구나
이런 국가의 시스템 앞에
학문이고 교육이고 선진이고 첨단이고
나불거리며 약육강식 그대로
이 세상은 문명이라곤 없구나
오로지 사욕에 물든 권력의 힘 앞에서
알게모르게 민중은 피와 땀을 바치면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름이라는 허명으로
정의라는 사기로 화합이라는 거짓으로
그렇게 평생을 살다 가는 것이로구나
아 인생이여
아 헛된 인생이여
잘못된 시작으로 인하여
인생의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가치를 잃고
살아있는 행복을 잃었구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