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김포 애기봉 전망대 다녀와서
방배단 11월20촬영
북한의 전통적인 마을 가을거지는 다했나 봅니다.11월 20일
전망대에서 북한마을 약 600~700m
서울 올림픽도로->행주대교->제방도로->태산 가족공원에서 지점->
출입 검문소에서->1.5km휴계소 주차장->100m지점 서울에서 승용차로 40분거리
초겨울 김포 애기봉을 전망대 다녀와서 ,
애기봉 은 북녁땅을 강을 경계삼아 강화 대교 못미쳐
한강 임진강 풀어 섞여 흐르는 분단의강
유휴히 흐르는 강 기슭건너편에 눈앞에 보이는 북녁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단거리(약600m) 전망대로서 병자 호란때 평양감사와 애첩인 애기와의
슬픈 일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애기봉" 이라 정식 명 하였고
선전마을은
1960년대 흙벽돌과 스레트로 지은 북한의 전통적인 촌락 마을로서 집단 농사를
짖는것을 망원경으로 한눈에 볼수있다.
마을 주민들은 앞의논과 뒤쪽의 과수원을 경작하여 당에 상납하고 배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는 문구도 있다
1982년도에 북한당국이 우리 북한인민들이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선전용 위장마을.애기봉을 찾는 방문객이 알게 됨에따라 90년도에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지금은 건물의 70%만 거주한다는 안내가 있습니다..
애기봉 유래
서기1636년, 인조 14년에 청나라 태종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범해 온
병자호란 때의 일입니다.
호란이 일어나자 당시 평양감사는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애첩 "애기"라는 기생을
데리고 수도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지름길이였던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지금은 우리가 마음대로
갈수 없게된 바로 이 강 건너 개성직할시 판문군 조강리에 이르렀을 때,
감사는 아깝게도 뒤따라오던 청나라 오랑캐에게 붙잡혀 다시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만이 구사일생으로 전방에 흐르는 강을 건너 이산 좌측에 위치한 조강리란 마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후 날마다 애기는 이 봉우리에 올라와 님계신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로서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끝내 님이 돌아오지않자, 애기는 결국 병이들어
죽어가면서, 고향하늘과 님계신 북녘땅이 잘 보이는 이 봉우리에 묻어 달라는 간절한
유언을 남기고 숨지자, 그 유언을 전해들은 조강리 마을사람들은 감사에 대한 일편단심과
애달픈 사랑을 가엷이 여겨, 애기를 이 봉우리에 묻어줌으로서 애기의 평생
한을 달래 주었던 것입니다.
그후, 1966년 10월 7일 지금은 작고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을 방문하시어,
이 봉우리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시고 애기의 한은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우리 1천만 이산가족의 한과도 같다고 하시며, 그동안 154고지로 불리던
이 봉우리를 "애기봉"이라고 정식명명하시고, 전망대 밖 우단에 친필휘호로써
"애기봉"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석의 아랫부분에 있는 시는 지금은 작고하신 유명한 시인노산 이은상 선생님께서
이곳을 둘러 보고 느끼신 감회를 시로서 표현하여 부대에 헌시하신 것입니다.
(애기봉 유래 펌)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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