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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시인/작가‥─‥ 스크랩 친일문학에 대한 생각
정규호 추천 2 조회 70 16.04.05 23:0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친일문학ㅡ우리 문학의 아킬레스건

 

  이승하

 

  우리 문학의 아킬레스건은 뭐니뭐니해도 친일문학입니다. 그 당시 ‘친일’이라는 반민족적 행위는 문단뿐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종교계 등 모든 분야에서 열성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친일을 한 문학인들은 다른 분야의 친일파들에 비해 자기들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름이 노출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지기 때문에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인에게는 다른 어떤 분야의 사람보다도 강한 양심과 자기 단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곧 문학인의 자부심이 아닐까요?

 

  장 폴 사르트르는 살아생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했지만 대한민국은 끝끝내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정권은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파를 엄벌했기에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고, 남한은 그들은 모두 용서했기에 국가로서 정통성이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남쪽에서도 처음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 680명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청의 반대와 이승만 정권의 방해공작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에 이승만 정권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 맞서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경찰과 검찰, 행정부의 요직을 모두 친일을 적극적으로 했던 사람들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알아둡시다. 미국에서 주로 모금운동을 펼치며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합니다. 김구는 상해임시정부의 식구들을 이끌고 11월 23일에 귀국합니다. 한 발 늦은 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습니다. 일찍 들어와 권력기반을 잡은 이승만의 암묵적 동의로 김구가 암살된 것은 1949년 6월 26일이었습니다.

 

  어쨌거나 1949년에 친일파는 7명만 실형을 받았고, 그나마 1950년 봄에 재심청구 등의 방법으로 다 풀려났습니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해방된 이후 단 한 명의 매국노도 제대로 벌주지 않은 것은 세계 역사상에 있어 딱 한 나라,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친일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정당화한 것, 조선인이 일본군대에 자원입대할 것을 종용한 것, 전쟁의 승리를 감격적으로 축하한 것, 이 세 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문학인은 대체로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해 처신했다고 보아집니다. 이육사나 한용운처럼 저항의 정신으로 일관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글과 행동으로 절개를 지킨 이런 분들과는 달리 일제 말에 붓을 꺾거나 발표할 길 없는 글을 쓰던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사람으로는 변영로ㆍ김영랑ㆍ황순원 등과 청록파 3인이 있습니다. 염상섭처럼 국내 문단을 떠나 만주에 가서 문학 활동을 한 소수의 문인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친일 문인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적극이냐 소극이냐의 정도에 따라 분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광수(香山光郞)ㆍ최재서(石田耕造)ㆍ김동환(白山靑樹)과 같이 창씨개명까지 앞장서서 하며 신념을 갖고 친일한 사람은 적극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2ㆍ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대문호로 존경을 받던 이광수의 변절은 두고두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데, 문인 중 이광수와 같은 적극적 친일파의 수가 그렇게까지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변의 안전을 위해, 혹은 호구지책을 위해 글을 발표하고 위문단이나 순회 연설단에 따라다닌 사람은 부지기수였습니다. 교과서를 통해 이름을 안 여러 문인들이 한때 동족의 목숨을 파는 데 앞장서고 있었으니, 그 추한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여태순이란 분이 자기 시동생이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원이 되었다 죽은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죽음의 진상을 추적하여『그날 오키나와 하늘에서』(뿌리)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조선인 11명이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죽음을「송정오장 송가」라는 시에서 예찬했다가 두고두고 욕을 먹은 미당 서정주는 시를 쓴 것 외에는 친일행위를 한 것이 없었으므로 억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일제 강점기 때 2만2000명이 이국의 하늘 아래서 죽었는데 조선인을 죽음의 길로 내몬 사람은 한 명도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광수(1892~1950?)는 한국 현대문학의 문을 연 문호였으나 친일문인으로서 오점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적극적 친일파냐 소극적 친일파냐, 고인이냐 생존인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70년’에 있습니다. 70년이 지나도록 그들 중 누구 한 사람 참회의 자세를 취한 분이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비극입니다. 뉘우침이 없는 역사, 그 치욕의 시절은 해방된 지 55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광수는 자서전『나의 告白』을 쓰고 수필집『돌베개』도 상재합니다. 이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참회록이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요. 민족을 위한 어찌할 수 없는 변절이었으며,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음을 누누이 변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장편『女人戰記』를 쓰면서 일본에 충성하던 채만식은 해방이 되자「民族의 罪人」을 발표해 민족 앞에 용서를 빕니다. 이 작품은 그래서 친일 문인의 유일한 참회록으로 거론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앞뒤 막힌 상황에서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니냐, 과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앞으로 잘만 하면 될 것 아닌가, 이런 식의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결론을 냉소주의자 채만식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명이나 합리화는 양심선언과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뼈저린 자기 학대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양심의 결단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최재서가 해방이 되자 평론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영문학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일단 반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지만 떳떳하고 공개적인 참회의 표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문학사와 문단사는 불행했던 그 시대를 터부시하는 데 급급해왔고, 친일한 문인을 변호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1985년 계간지『실천문학』에서 친일문학 특집을 다룰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비판적 업적으로 임종국의『親日文學論』(1966)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책은 친일했던 문인들의 행적을 몇 가지씩 열거하고 자료를 모아 정리한 것이니 본격적인 연구서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언급조차 하지 않는데 혼자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처음으로 진실을 밝힌 그 용기와 의지에는 고개가 절로 수그려집니다.

 

  몇 해 전에 이완용의 증손자가 조상이 남긴 땅 소유권 인정 소송에서 이겼습니다. 이기자마자 땅을 팔고 미국으로 갔지요. 이 재판의 선례로 아마도 친일파 후손은 조상의 땅 되찾기 소송에서 계속 이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는 악명 높았던 친일파 송병준의 증손자가 2천5백만 평의 땅(7천억 원 상당)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송병준의 외손자는 자유당 때 장관을 했습니다. 자유당 12년 집권 시기의 장관 96명 중 해외 망명객은 4명이었으나 친일경력자가 30명이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1988년도까지 우리는 ‘월북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시인 정지용ㆍ백석ㆍ김기림ㆍ이용악ㆍ오장환ㆍ임화 등이, 소설가 이기영ㆍ한설야ㆍ홍명희ㆍ이태준ㆍ박태원ㆍ김남천ㆍ최명익 등이 포함된 100여명 중에는 당대 1급 문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문인이 북의 공산주의 이념과 남의 민주주의 이념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을 때 북을 택한 이유는 북에서는 친일파를 한 사람도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김일성의 공약이 있어 북한의 토지정책에 귀가 솔깃하여 북을 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은 이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했는데 주로 법조계로 진출했습니다. 친일파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가짜서류를 만들어 시치미를 뗐고,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일제 강점기 때건 광복 이후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선친은 만주 벌판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으니 묘소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역사가 심판하지 않은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면 거기서 역사의 교훈이나마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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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4.05 23:04

    첫댓글 친일행위자들 그 실상 후세들에게 상세히 알려 이런자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잘못된 행위 없도록 해야합니다.

  • 16.04.09 09:14

    좋은 일만 있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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