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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군만두 감금'에서 탈출하기>의 줄거리:
'군만두 감금' 하면 웬만한 영화 애호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나온 15년간 군만두만 먹게 되는 끔찍한 감금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답답함이 좌절로, 좌절감이 다시금 분노와 극렬한 복수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변화하는 심리상태 그 자체로 충분히 지옥의 예고편이지요. 원죄 하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모든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70년 이상 평생 군만두 감금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더욱 참담함은 감금됨의 의식이 전혀 없다는 거지요.
‘군만두 감금’에서 탈출하기
(욥기 23:1~17)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군만두 감금'에서 탈출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군만두 감금'에서 탈출하기
‘군만두와 감금’이라는 단어에서 많은 분들이 영화 올드보이를 떠올리실 것입니다. 술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의 이름을 풀이하는데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에 납치되어 감금됩니다. 8평 정도의 허름한 호텔 방에 TV만 놓여있을 뿐입니다. 무려 15년 동안 감금이 되는데 오직 중국집 군만두만이 식사로 주어집니다. 그러던 중 1년이 지났을 때에 TV 뉴스에서 자신이 아내 살인범으로 지목된 것을 알게 됩니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복수를 결심하게 되어 쇠젓가락으로 구멍을 파서 탈출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5년째가 되었을 때에 결국 사람 하나가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을 완성했는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납치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 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수를 감행하는 중에 숨겨졌던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영화의 내용을 다 알 필요는 없지만, 단지 주인공 오대수가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사용해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보기로 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 전체는 감금 생활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15년 동안 감금되어서 군만두를 먹고 살았는데, 사람들은 칠십 평생을 이 세상에 감금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 아담이후 모든 인류는 스스로를 이 세상에 감금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누군가 존재를 알 수 없는 자에 의해서 납치되어 감금이 되었는데, 지금의 현실은 실제로 우리 스스로가 마음을 이 세상 안에 감금해 둔 것입니다.
세상 안에 갇힌 것은 마음이 이 세상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둔 것은 만족과 기쁨거리를 이 세상 안으로 한정지어 놓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왜 감금됨의 의식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있고 “세계를 품는 비전의 사람”이라는 말들을 하는데 결국 이 세계가 넓다는 것을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감금되어 있는 의식의 그림조차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광대함을 느끼는 동안에는 감금의 의식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삼을 수 있는 공간으로부터 격리되고 감금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로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감금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답답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상실감이 없습니다. 하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산 아래에서 꿈꾸었던 민족의 독립과 출세에 대한 비전을 망각해버렸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마음이 만족하고 기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에 감금 의식을 갖게 됩니다. 감금 된 상태에서라도 만족할 거리와 기쁨거리가 있는 동안에는 감금 의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신앙의 내공은 이 세계 안에 감금되었음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도 신앙의 시작단계에조차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감금 의식이 없는 이유는 세상에 기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과 변화산에서 베드로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하늘을 본 자들은 무엇을 잃어버려도 어떠한 상실감도 생기지 않는 것들을 기쁨과 만족거리로 오해하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을 갖게 되는 순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사소한 일들을 위해서 평생을 매진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늘을 의식하고 이 세상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은 감금 된 방입니다. 이 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라고 했습니다. 반항하는 마음은 지금 내게 주어지고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은 마음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걱정함을 뜻합니다. 현재에 대해 거부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겁다는 것은 욥이 재산과 가족과 아내와 명성도 잃고 친구들에게는 매도당하는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앙의 무게와는 다른 이유에서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재앙을 계기로 탄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보면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하였고, 3절에서도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재앙을 통해서 재산을 잃었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주체적인 결정에 의한 사건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사항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재산을 가지고 가신 상황이기 때문에 다시 재산을 회복할 소망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열 명을 잃게 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자녀로 인해 기뻐할 수 있기를 바라지 못합니다. 건강이나 친구들도 아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욥에게 세상에서 마음을 위로하고 만족하게 하고 기쁨을 줄 것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욥은 이 세상에 감금당하고 있다는 답답함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열망하고 그리움으로 탄식합니다.
마치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독방에 갇혀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오대수의 마음에 가장 답답한 것은 도대체 누가 자신을 가두었냐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범인은 동창생 이우진이 학창 시절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오대수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갇힌 오대수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가둔 자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살을 하려해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오대수는 복수를 위하여 자신을 가둔 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열망합니다. 욥 또한 이 정도의 열망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9절에서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인간의 삶의 현장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원칙이 이 세상에 있고 그 원칙을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살 때에 단순히 복을 주시는 분으로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전인적 만남을 이루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로와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로 인해 이 세상 밖에 계시는 인격적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렬하게 열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대수가 갇혀서 복수를 열망했던 것처럼 욥은 갇혀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이나 변화산 사건은 그 자체로서 설교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얻고자 애쓰는 돈이나 사업의 성공, 자녀의 형통, 명성 등은 하늘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가져도 성취감이 없고 아무리 잃어도 상실감이 생기지 않는 것들임을 생각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는 아직도 돈을 벌면 기뻐하고 돈을 잃으면 다 잃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스데반 집사님이나 변화산의 베드로의 경험을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진 상태가 될 때에 그로 인한 성취감이나 상실감이 생길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쓰임을 받기 위하여 주어지기도 하고 가져감을 당할 수도 있는 것들이지, 내 마음에 성취감이나 상실감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볼 때는 동족을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새로운 나라가 시작될 때에 자신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리라 기대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비전입니까? 그러나 변화산에서 하늘에서의 영화로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 했던 모든 비전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렇게 쉽게 망각해버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기뻐하면서 쫓고 있음을 깨달아야 세상에 대한 답답함이 생겨납니다.
돈은 얻어도 얻은 것이 아니고 잃어도 잃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본다면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망각되어 버릴만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룰 것이 무엇이고 이루기 위해서 애쓸 것이 무엇이고 지금 부족하다고 아쉬워 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에 가져도 가진바 되지 않고 잃어도 잃은바 될 것이 없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원죄적 성향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마음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잃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주체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그것들을 회복할 소망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거리와 만족거리가 없어진 세상에 대해서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마음은 세상 밖으로 탈출하여 하나님께 가기만을 원하게 된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합니다.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말은 단순히 불순물이 없는 인격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련이 된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가질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이 단련의 과정은 이 세상에서 만족거리와 기쁨거리로 믿어졌던 것들을 더 이상 나의 만족과 기쁨으로 여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답답함을 느끼며 이 세상에 감금되어 있음을 느끼고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탈출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감금된 자의 의식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기뻐할 대상들이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감금 의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과 변화산 사건이 일어났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며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18장 36절에서는 “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요?
탈출하기 위한 곳이고 감금되었음을 깨닫기 위한 곳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탈출해서 하늘로 올라갈 때에 이 땅은 드디어 하나님의 활동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연관성으로 맺어진 모든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이 땅의 활동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거듭해서 말씀드렸듯이 칠십인 제자가 파송되었다 돌아왔을 때에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었음을 두고 기뻐하자,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1:1로 만나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자들로 택함 받았음을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가져도 가진바 됨이 없고, 잃어도 잃은바 됨이 없는 것들에 마음을 끊임없이 빼앗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어 하고 잃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만족거리와 기쁨거리가 없는 감금된 방으로 깨닫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 부활과 승천의 길은 활성화 되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금된 자의 의식이 우리를 십자가 생활화로 인도할 것이고,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스데반 집사님과 베드로가 살아서 하늘을 보았던 것과 같은 복된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직도 이 세상이 넓게 느껴지고 할 일과 이룰 일이 많게 느껴집니다. 신앙이 시작되지도 않는 어리석은 단계로부터 벗어나서 십자가 생활화를 가능하게 하는 감금된 자의 의식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