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지은이)의 말
디카시 작업을 하면서
사람과 사물과 풍경에 오래 시선을 두는 버릇이 생겼다.
발견의 기쁨과
작은 깨달음이 반짝이는 순간들을 경험하였다.
애써 찾지 않아서 그렇지
시는 언제나 가까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2024년 11월
지리산 아래 범실에서
책소개
신석정문학상, 박재삼문학상, 디카시작품상 등을 수상한 한국 대표 서정시인 복효근 시인이 새 디카시집 『사랑 혹은 거짓말』을 도서출판 작가에서 펴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총 60편의 디카시를 수록하였다.
“사람과 사물과 풍경에 오래 시선을 두는 버릇이 생겼다”는 저자 복효근 시인은 1991년 《시와 시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꽃 아닌 것 없다』 『고요한 저녁이 왔다』 『예를 들어 무당거미』 『중심의 위치』가 있다. 그리고 청소년 시집 『운동장 편지』,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와, 교육 에세이집 『선생님 마음 사전』 등을 출간하였다.
혼례, 흘레
같은 방향을 보거나 마주보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야
앞쪽만을 보는 너를 위해 뒤쪽의 눈이 되어줄게
너의 뒤가 되어줄게
너의 뒤를 이어줄게
사랑 혹은 거짓말
어두워지거나 풍랑이 일어야
너는 돌아와 내 허릴 감았지
나도 안 놓아줄 것처럼 쇠말뚝 같은 표정은 짓지만
그것까지는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별
호박꽃도 꽃이냐고 말하지 말자
네 눈에 빛나고 있는 그 무엇을 닮아 있지 않은가
막막할 때는 등 뒤를 보라
네가 앉아 막막하게 울고 간 자리
등 뒤에선 꽃이 피고 있던 것을
겨울 사모곡
밤새 다녀가셨구나
헌 옷에서 떼어놓았던 단추 모았다가
떨어진 자리 채워주시던 그 손길
지퍼로는 닫을 수 없는 추위가 있어
추천사
“막막하게 울고 간 자리” 그 “등 뒤에선 꽃이 피고 있”다는 복효근 시인의 디카시를 읽으며 눈이 참 맑아졌습니다. “아프락사스 신을 향하여” 알에서 깨어나는 개양귀비꽃을, “이 문명을 멈추게 하고 싶”은 사마귀와 오소리 똥 위에서 천국을 그리는 나비를 만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길 끝에 닿으면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가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해 꿈틀꿈틀 기어오르는 달팽이와도 동행해 봅니다.
흘레하는 나비를 통해 “앞쪽만을 보는 너를 위해 뒤쪽의 눈이 되어주는” 육체성 너머의 사랑을 그리기도 하고 오백 년을 기다린 팽나무는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하늘로 “훌쩍 날아오를”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억 년을 순간처럼 달려”와 “너의 심장이 되어줄 ”거라고 고백하지만 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을 두고 이 이름표가 “명찰일까 죄수번호일까” 묻기도 하면서 사랑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사유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복효근 시인이 순간 포착한 디카시는 환상적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고 극적인 시나리오를 연출합니다.
“어두워지거나 풍랑이 일어야” “돌아와 내 허릴 감는” 그 이기적 속성까지를 사랑이라 해야 하는지 거짓말이라 해야 하는지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으며, 눈 쌓인 앞마당 징검돌에서 “헌 옷에서 떼어놓았던 단추”로 떨어진 자리 채워주시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 애틋한 사랑을 불러내기도 합니다. 이미지와 언술 사이에 참으로 매혹적인 메타포가 출렁입니다. 시인과 함께 “아름다운 죄 하나 짓고 싶은” 섬진강의 푸른 밤을 거닐어보고 싶어집니다.
- 〈명량〉 김한민 영화감독
첫댓글 겨울 사모곡, 인상적인 사진과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