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주세붕
1544년(중종 39) 4월 초9일 정축에 장차 청량산에서 노닐려고 하여, 아침 일찍 풍기군의 군재를 출발하였다.
전송하는 사람은 서생 예천 장응문(張應門), 밀양 이학령(李鶴嶺), 함양 박승원(朴承元), 풍기 권숙란(權叔鸞), 함안 이기(李機), 칠원 배억(裵億), 한양 민종중(閔宗中), 밀양 유분(柳芬), 예천 권태수(權鮐壽), 권호금(權好金)이다.
종행하는 사람은 연성 이원(李愿), 천령 박숙량(朴淑良), 임영(臨瀛:강릉) 김팔원(金八元) 및 아부(阿傅) 4인이다.
이날 승문원 저작 박승간(朴承侃), 승정원 주서 박승임(朴承任) 형제가 다례(茶禮)를 진설하여 영친례(榮親禮)를 올렸다. 그 형 박승건(朴承健), 박승준(朴承俊)도 역시 154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므로 아울러 경례(慶禮)를 거행하였다.
와서 모인 사람은 조세영(趙世英), 예천군수 김홍(金洪), 영천군수 이정(李楨), 봉화현감 이의춘(李宜春), 삼가현감 황사걸(黃士傑), 예안현감 임내신(任鼐臣), 안기찰방 반석권(潘碩權), 창락찰방 허빙(許砯), 전 사간 황효공(黃孝恭), 전 전적 진연(秦淵) 및 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다.
나도 역시 가서 참여하였다.
잔치는 귀대(龜臺) 상류에 베풀었는데, 물 흐름에 임하여 자리를 깔고 바깥사람이나 안사람이나 모두
경하하였다. 장막은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빠짐없이 왔다. 주서(注書) 박승임의 엄부(嚴府)의 진사 무리들이 먼저 말을 몰아서 인도하여, 사천(沙川)을 건너 잠시 소게정(召憩亭)에서 밥을 들었다.
소게정은 영천(榮川)과 예안(禮安)의 경계에 있다. 농암(聾巖) 이상공이 영천에 수령으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그 뒤 공이 방백(경상도 관찰사)으로 되어 역시 와서 이곳에서 쉬었다. 가지와 잎이 울창하게 뒤덮고 녹음이 땅에 가득하다. 뜨거운 햇볕 아래 가다가 염천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이 정자에 나아가기를 마치 부모에게 나아가듯 하므로, 이름을 ‘소게’라고 할 만하다.
용수현(龍壽峴)을 넘어 온계(溫溪)를 거쳐 가다가 오언의(吳彦毅) 진사를 보았다. 마침내 농암 상공을 분수(汾水)의 댁에서 알현하였다. 공이 나와서 문 밖에서 영접하고 이끌어 자리에 앉히고는 바둑을 두면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이어서 술을 내오라 하고, 대비(大婢)를 시켜서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소비(小婢)를 시켜 아쟁을 연주하게 하였다. 혹은 「귀거래사」를 노래하기도 하고 혹은 「귀전부(歸田賦)」를 노래하기도 하였다. 혹은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를 노래하기도 하고 혹은 소설당(蘇雪堂:소식)의 “행화가 주렴에 날아 남은 봄을 흩누나.[杏花飛簾散餘春]”를 노래하였다.
공의 아들 문량(文樑)은 자(字)가 대성(大成)인데,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 역시 수곡(壽曲)을 노래하였다. 나는 대성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 공도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공의 춘추는 78세이니, 곧 나보다 연장자이시다. 그 때문에 더욱 흥회가 일어나 비감해졌다.
공이 거처하는 곳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좌우에 도서가 늘어 있고 당 앞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으며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겨져 있었다. 뜰은 흰 눈과 같이 하얘서 마치 신선의 굴택(窟宅)에 들어온 듯하였다.
일모(日暮)에 말을 달려 부포(夫浦)에 이르렀다. 치마(輜馬:짐 실은 말)를 먼저 건너게 하고는 취하여 여러 문생들과 더불어 뗏목에 누웠다. 눈앞이 어지럽고 흥취가 물씬 일어나서 아득히 세속을 버리고 싶은 뜻이 일어났다. 다 건넌 뒤에 쓰러지듯 백사장 기슭에 누웠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자는 전 만호 금치소(琴致韶)와 그 자질 네다섯 사람인데, 나를 맞이하여 그 집에 묵게 하였다. 달빛 아래 말을 타고 그 앞마을로 들어갔다. 그 마을은 곧 나의 왕모(조모) 권씨의 부친 고 목사 권우(權虞)의 옛 거처였다. 금치소 만호는 곧 권우 목사의 자매에게서 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나를 대우하는 것이 아주 도타웠다.
기묘일에 가랑비가 내렸다. 여러 금씨들 십여 명이 모두 합(榼)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준다. 장차 출발하려고 하여 걸어서 앞길로 나오는데, 저쪽에 권 조부의 옛집이 보였다. 멀리 권간(權簡)의 묘를 예배하였다. 곧 권우 목사의 조부의 부친이다.
처음에 권 목사의 조부께서는 구씨(舅氏)인 총제 이각(李恪)을 따라 합포(合浦)에 군진을 열었다가 마침내 칠원부원군 윤자당(尹子當) 집의 사위가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거처하셨다. 내가 칠원에 우거한 것도 역시 왕모 권씨를 따라서 그런 것이다. 선조의 일을 추억하니 슬픈 마음이 들어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다가 첩첩 산 속으로 들어갔다. 푸른 시내를 건넌 것이 몇 개인지 모를 정도다. 잠깐 비가 왔다가 잠깐 개었다가 하였으므로, 혹은 도롱이를 걸쳤다가 혹은 벗었다가 하였다.
왕왕 산촌이 있어 흡사 도화원(桃花源)과 같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쟁기를 걸치고 밭을 가는 사람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의 무리와 비슷하였다. 바위 아래서 경작하고 있는 사람을 보니 자진(子眞)과 비슷하고, 늙은이로서 호미를 잡고 일하는 사람은 방덕공(龐德公)이 아닐지 의심되었다.
여러 문생들을 돌아보면서, “요순과 같은 군주를 만나지 못한다면, 비록 송아지를 안고서 이 산에 들어와 나무 열매를 따서 먹고 시내의 물을 마시면서 일생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좋겠다.”라고 하였다.
삼십여 리를 갔는데, 길이 갈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였다. 예안 사람의 안내 덕에 그 뒤를 따라 길을 찾아 나서서 비로소 산길을 발견하였다. 구불구불 북쪽으로 큰 산마루에 올랐더니, 운무가 바야흐로 서쪽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청량산 등 여러 봉우리의 맑은 기운이 맺혀서 얽혀 있는 곳이었다. 너무 기뻐서 잠시 쉬었다.
마침내 산을 내려와 시내를 건너고, 한번 꺾어서 다시 서쪽으로 갔다. 다시 큰 산마루를 오르는데, 마치 벌들이 달라붙어 오르듯이 올랐다. 아주 험한 것이 지난번 산마루보다 곱절은 더 하였다.
이윽고 사람 사는 지경과 아주 멀리 떨어졌다. 처음 산마루는 이름이 단곡(斷谷)이고 두 번째 산마루는 이름이 회선(懷仙)이다. 첩첩 관새 같은 곳을 건너서 비로소 청량동으로 들어갔다. 마상에서 도롱이를 쓰고서 얼굴을 쳐들어 보니, 기이한 바위가 빼어나게 솟아나 있고, 벽처럼 서 있는 것이 천 인(仞)이나 되는데, 그것이 은은하게 연무 속에 보여, 아득히 마치 백이(伯夷) 숙제(叔弟)가 은나라 말기에 독립하여 있는 것과 같다. 곧 탁립봉(卓立峰)이었다.
동쪽 벼랑을 따라서 오른 쪽으로 돌아가니 돌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두 다리가 멈추지 않고 말도 주춤주춤 거린다. 기러기가 나란히 가듯 가는데, 너무나도 아슬아슬하다. 마침내 도롱이를 벗어던지고 안장을 끌어다가 웃옷을 벗고 가니, 온 몸이 젖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하자니, 마음과 골이 모두 시릴 정도이다.
해가 기울었을 무렵에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렀다. 일천 봉우리에 자주색 기운과 비취색 기운이 알록달록하면서 말고 펴기를 변화무쌍하게 한다. 어두울 때는 밤과 같다가 활짝 열면 대낮이 되었다.
이윽고 차츰 어두워지고, 어두워졌다가는 다시 활짝 펼친다. 산악의 색태 가운데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은 혹은 전체를 다 드러내거나 혹은 반만 드러내거나 한다. 구름 기운이 위에서부터 들씌우듯 하는 것도 있고, 아래에서부터 물씬 일어나는 것도 있다. 혹은 외롭게 바위 틈새에서 생성하여 바람에 의해 걷혀지는 것도 있다. 무너지는 것은 흰 눈과 같고, 튀어 달아나는 것은 마치 푸른 개와 같다. 그 담담하고 그 무성하여 마치 숨을 내쉬는 것도 같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도 같다. 변환하는 때깔이 하도 순식간이어서, 경각 사이에 오만가지 모습이 다 펼쳐진다.
비록 천문에 대하여 담론하는 추연(鄒衍)이나 용을 조각하는 석(奭)이라도 그 변환의 모습을 제대로 형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절의 승려가 나와 맞으면서 위로하길, “저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오시는 것이 어이 이리 늦으십니까?”라고 하였다. 늙은 고승이 있어 손가락으로 안개와 아지랑이 속을 가리키면서, “저곳은 김생굴(金生窟)이고 저곳은 치원대(致遠臺)입니다. 이 뒤로는 원효사(元曉寺)가 있고, 서쪽에는 의상봉(義相峰)이 있습니다. 지난날 네 성인이 이 산에 살면서 도우(道友) 관계를 맺어, 여기에서 서로 왕래하면서 쉬고 노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응답하길, “원효는 신라 중엽의 승려요, 김생과 의상(義相)도 역시 신라의 태생이지만 세대가 다르오. 최고운은 신라 말기에 태어났으니, 어찌 그들과 어울렸겠소. 너는 허망한 설로 나를 속이지 마라.” 이로부터서 불승의 무리들이 허탄하고 신기한 전설을 발하지 않게 되었다.
듣자니, 지난날 절의 승려 가운데 이 절을 창건하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죽어서 삼각우(三角友)가 되어 이바지 재물을 실어 들였다. 그 근로가 아주 힘들어서, 어느 날 절 아래서 죽었다. 마침내 돌을 모아 묘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시험 삼아 이 사실의 진위를 물어서 그 허황되고 기만적인 것을 일침하려고 하였다. 한 어린 납자가 있어서 입을 열어 답하려고 하자, 늙은 납자가 눈짓을 하여 제지하였다. 그 어린 납자는 마침내 주둥이를 닫아버리고는 감히 토설하지 않는다.
서서히 말하길, “금씨(琴氏) 성을 가진 생원이 명이 다해서 삼각(三角)을 절의 문에 그림으로 그려두고,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결연(結緣)을 알게 하였고 합니다.”라고 한다.
내가 말하길, “최고운은 당나라에 들어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이 천하에 진동하여, 마침내 동방 문장의 비조가 되어서 심지어 문묘에 배식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유가(儒家)의 죄인이다. 지난날 왕이보(王夷甫)가 청담(淸談)을 잘 하여 천하 창생을 그르쳐서 신주(神州)가 오호(五胡)에게 침몰하고 말아 영구히 중원의 백대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최고운으로 말하면 도리어 왕이보보다도 더 심하다.
그는 높은 명성을 걸머지고 동쪽으로 돌아와 비록 조정에 의해 용납되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우리 동방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기를 신선과 같이 하였다. 그가 평생 거쳐 지나간 물 하나, 바위 하나라도 모두 지금까지도 여전히 칭송하여 조금도 쇠하지 않고 있다. 정말로 최고운이 우리 유학의 문호를 알아서 명백하게 창언하여 그 문호를 열어젖혔더라면, 오백 년의 고려 왕업이 필경 불가(佛家)에 의해 멸망되기를 그렇게 혹심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순응(順應) 스님을 일컬어서 대덕이라 하고, 이정(利貞) 스님을 일컬어서 중용이라 하였다. 아아, 이 두 요승이 과연 능히 대정과 중용일 수 있다면, 누가 대덕과 중용이 아닐 수 있으랴. 그가 걸(桀) 같은 군주를 도와 포학하게 만들어, 만세의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을 어이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금생(琴生)이란 자로 말하자면, 역시 고운(최치원)의 죄인이다.”
경진일에는 날이 쾌청하였다. 말과 종복을 되돌려 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절을 나섰다. 절의 승려 계은(戒誾)이 앞을 인도하였다. 작은 시내를 따라가다가 동쪽으로 건너서 수목을 부여잡고 수십 보를 가서 문득 한번 쉬었다. 이원(李愿)과 박숙량(朴淑良)이 피리 부는 자를 인솔하여 먼저 가서 푸른 숲 사이에 어른어른 비친다. 간간히 새 곡조를 연주하는 듯하였다. 장자(障子)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이미 치원대에 있다. 피리 소리가 높이 일어나 그 음향이 층층 벼랑을 찢는다.
김팔원(金八元)과 아박(阿博)은 모두 꽃을 머리에 꽂고 뒤에 온다. 잠시 몸을 구부려 아래를 보니 별실(別室), 중대(中臺), 보문(普門)의 세 사찰이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듯하다. 골짝 어구는 고요하여 신령한 지뢰(地籟)가 저절로 일어난다. 비 온 뒤에 여러 가파른 산봉우리들이 빼어남을 다투어 걸음걸음 더욱 기이한 모습을 드러낸다.
진불암(眞佛庵)에 들어갔다. 승려가 거처하지 않은 지 오래다. 철벽이 뒤에 있고, 비폭(飛瀑)이 왼쪽에 있다. 과연 승경지다. 남쪽으로 구불구불 가서 금탑(金塔)을 향하였다. 가는 길이 위태하고 미끄러워, 자주 나무 그늘 아래서 쉬었다. 종자로 하여금 채소를 뜯어오게 하였다. 산이 모두 주름지고 바위에 흙이 없어서, 뜯어온 것이 모두 신선하다.
치원대(致遠臺)에 이르렀다. 피리소리만 들릴 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왕자진(王子晉)이 구산(緱山)에 올라 피리를 불면서 몸을 층 바위 위에 숨기고 있는 듯하였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승려 계은(戒誾)이 말하길, “어느 손님이 외지에서 와 계십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누구냐고 묻자 오인원(吳仁遠, 오언의吳彦毅)이었다. 그는 이미 중대(中臺)에 이르러서 지팡이를 들어 멀리서 읍례를 보내었다. 즉시로 말을 버리고 넝쿨을 부여잡고 올라갔다. 서로 만나 아주 기뻐서 각각 한 잔씩을 들었다.
멀리 보니 내산(內山)의 열한 개 사찰과 석양의 일만 집이 높으락낮으락하고 푸른 벼랑이 대단히 아름다워 사랑스러웠다. 비록 곽희(郭熙)나 이백시(李伯時)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그대로 모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에 하청량사(下淸凉寺)로 가서 묵었다.
신사일에 아침에 가랑비가 내렸다. 아침밥을 먹은 뒤 걸어서 청량사 앞의 대(臺)로 나아갔다. 극히 툭 트이고 쾌활하였다. 이 대는 이전에는 이름이 없었다. 한 순배의 술을 든 뒤에 오인원이 말하였다. “그대가 한번 이름을 지어보시구려.” 나는 장난삼아 “언젠가 다른 해에 ‘경유대’라고 이름지으리.[他年喚作景遊臺]”라는 구를 읊었다. 오인원이 크게 웃고는 즉시로 나한당(羅漢堂)의 벽에 그 구를 썼다.
차례로 길을 따라 안중사(安中寺)로 들어갔다. 송재(松齋) 이우(李堣) 공이 젊었을 때 황맹헌(黃孟獻) 재상, 홍언충(洪彦忠) 선생과 이곳에서 독서를 하였다. 그 뒤 송재께서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남겼다.
안중사 속에서 홍(洪)과 황(黃)과 나, 병오년 일이 이미 아득하게 되었구나. 인간 세계의 삶과 죽음이 한바탕 서글프게 하네. 우거진 소나무 숲에 봄비 내리자 한밤이 무척도 쓸쓸하다.
이때 홍 선생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송재 공의 시가 이와 같았다. 지금은 세 신선이 이미 작고하셨다. 내가 그 시에 차운하였다.
애닯구나, 어느 때에야 학이 요동으로 돌아오랴.
오인원이 한참을 서글퍼하여 있다가, 다시 송재공의 시와 내 시를 불탑(佛榻)에 붓으로 적었다. 극일암(克一菴)으로 들어가 돌사다리를 따라 올라갔다. 노송이 일천 척 높이인데 크기가 열 아름쯤은 되었다. 바람구멍이 암자 뒤에 있어서 아주 험준하였다. 이원(李愿)의 무리가 먼저 올라갔다. 나는 오인원과 함께 뒤따라 올라갔다.
혈구(穴口)에는 두 개의 판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최치원이 바둑을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판은 굴 가운데 있어서 비를 면하였으므로 천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을 수 있었다. 구멍은 깊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멀리 벽허(푸른 하늘)에 임하고 있다.
오인원이 피리 부는 사람을 시켜서 보허자(步虛子) 곡을 불게 하였다. 그리고 또 제생으로 하여금 혹은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하고 혹은 춤을 추게 하기도 하였다. 노래와 피리 소리가 경쟁하듯 울려나서, 그 음향이 반공(허공)에 떨어졌다. 일행은 아주 기뻐하였다.
마침내 치원암(致遠庵)을 찾아가서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다. 총명수는 벼랑의 틈새에 있으면서 옴 폭한 바위를 채우고 있는데 맑기가 잘 닦인 거울과 같고, 차기가 빙설과도 같다. 마땅히 강왕곡(康王谷) 수렴수(水簾水)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치원은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갔거늘, 어찌 여기의 물을 들이마셔 총기를 기를 수 있었겠는가. 최치원이 들이마셔 마침내 총명(聰明)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승려 계은(戒誾)은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승려가 옛 암자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장차 불등(佛燈)을 점화하려고 하자, 홀연 벼랑의 바위가 아래로 떨어져 암자 채 말아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 승려가 머리를 들어보니, 다만 달과 별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그 몸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고 합니다.” 역시 바위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경계가 될 만하다.
그 암자에 들어가 그 대에 올라보매, 더욱 고운 최치원의 일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아아, 만일 그 당시 군주가 간교한 자들을 멀리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할 수 있었더라면 계림(鷄林)의 나뭇잎이 그렇게 갑작스레 누렇게 되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이 은둔을 잘 하여 이름이 해와 달과 그 빛을 다투게 하고, 동도(경주)의 여러 능으로 하여금 갈아엎어져 씨 뿌리게 만들게 하고 말다니, 아아, 정말 슬픈 일이다.
하대승(下大乘)에 도착했을 때 앞길이 이미 깜깜했다. 이윽고 구름이 개어 달이 김생굴(金生窟)의 뒤로 솟아났다. 마침내 문수사(文殊寺)에 이르렀다. 문수사는 양 벼랑 사이에 있다. 피리 부는 악공 귀흔(貴欣)이 먼저 와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아주 맑아서 산 속에 울리고 골짝에 메아리쳤다. 마침내 선방에 묵었다.
명월이 방 안 가득하고 베게 맡에 허공을 나는 폭포 소리가 들어오며 두견새 소리가 들렸다. 이미 이 몸이 세상 바깥으로 초월해 있음을 깨달았는데, 다시 휘파람 소리를 들으니 극히 괴이하였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오인원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완사종(阮嗣宗:원적阮籍)은 휘파람을 가지고 한 때를 울렸으나 소문산(蘇門山)의 산허리에서 휘파람 소리를 듣고는 크게 부끄러워하여 돌아갔다지 않소. 지금 이 휘파람 소리는 완적의 혼령이 손등(孫登)을 배우고 싶어 내는 것이 아니겠소?” 임오일에 서쪽으로 향하여 보현암(普賢庵)에 들어갔다. 당 앞에는 암석이 있어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오인원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았다. 제생은 보현암 안에 흩어져 앉았다.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술을 가지고 왔다. 곧, 선성(宣城)현감 임조원(任調元:임내신任鼐臣)이 보낸 것이었다.
바야흐로 술을 따르려고 하는데, 두 생이 왔다. 한 사람은 이국량(李國樑)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조카이다. 다른 한 사람은 오수영(吳守盈)으로 오인원의 아들이다. 이생이 소매에서 농암의 서한을 꺼내었는데, 곧 농암 공이 장난스럽게 지은 노래였다. 이생으로 하여금 그 노래를 노래 부르게 하고 들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이에 선성의 술을 따라 복주(福州)의 피리를 연주하면서 이생으로 하여금 농암이 지은 노래를 노래하게 하니, 이 역시 산중의 한 가지 기이한 흥취이다.
또 승려 조안(祖安)이란 자가 금강산에서 왔다. 그는 병신년에 내가 가야산을 오를 때 따라간 자이다. 조안은 소매에서 내 시를 꺼내어 보였다. 그 시에 이런 말이 있었다.
뭇 산이 눈 아래 쭈글쭈글하고, 일만 인 높이로 두 나막신이 매달려 있네. 다른 날 방장의 길을 갈 때 그대를 데리고 구름사다리를 오르련다.
승려의 눈은 그때나 마찬가지로 한결같게 푸르거늘, 나는 수염이 이미 다 희었다. 다시 만나서 한바탕 웃으매 정말 즐거운 일이다. 느지막하게 서대로 나와서 달 아래 자리를 깔고 감상하다가 한참 뒤에 돌아와 문수사에서 묵었다.
계미일에 걸어서 문수사에서부터 보현암을 거쳐, 절벽을 돌아서 몽상암(夢想庵)에 다다랐다. 벼랑길을 따라 가면서 두 개의 나무를 꺾어다 걸쳐서 잔도(棧道)를 통하게 하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어 두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모골이 쭈뼛하였다. 게다가 문원(文園:사마상여)처럼 소갈병을 앓아서 목구멍에 연기가 나듯 하였다. 비폭을 바라보고, 절벽 사이에서부터 두레박을 떨어뜨려 물을 길어 마셨다. 소라 같은 산이 서너 개가 둘러서 안으로 감싸고 있다.
선반(仙攀)을 돌아서 층층 돌계단을 올라가서, 마침내 암자에 들어갔다. 암자의 서쪽에는 가파른 절벽이 천 인(仞) 높이로 서 있어, 끊어진 골짝을 굽어보고 있다. 즉 연대사(蓮臺寺)의 위쪽 경계다. 승려 조안(祖安)은 나이가 거의 일흔이 다 되었으나 걷는 것이 민첩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절벽에 임하여서도 아무 두려운 기색이 없다. 오인원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거의 원숭이의 후신이로군.”
돌아올 때는 돌 잔도를 거쳐서 절벽 사이의 틈새를 통해서 나왔다. 원효암에 오르는데 길이 아주 위태하고 가파르다. 이른바 “앞 사람이 뒷사람의 정수리만 보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만을 보며 배와 등이 모두 뒤흔들린다.”라고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승려 계은(戒誾)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암자는 여러 번 이전되었습니다. 원효가 옛날 거처하던 곳이 아닙니다.” 암자의 동쪽은 절벽이 쇠를 깎아둔 듯하고, 그 아래에는 옛 유적지가 있다. 아마도 그 터인 듯하다.
오수영에게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판벽에 차례로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암자의 동쪽으로 해서 넝쿨을 부여잡고 거듭 쉬면서 만월암에서 이르렀다. 나만 홀로 오인원과 함께 암자 앞 석대(石臺)에 앉았는데, 이상한 새들이 와서 모여 나무 끝에 앉아서 즐거운 듯 깃을 털고 자적하듯이 기심을 잊고 한참 있다가 떠났다. 또 다람쥐 두 마리가 축대 사이에 출몰하면서 탐내어 무언가를 도모하듯 하고 깜짝 놀라듯 하며 사방을 둘러보다가는 달려가고 달려가다가는 숨고 숨다가는 다시 둘러보면서, 그저 구멍을 찾을 따름이었다. 이원(李愿)이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날 저녁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고 달빛은 씻은 듯하였다. 한밤중에 문을 열고 홀로 서 있노라니 마치 광한전[달]에서 인간세상을 굽어보는 듯하였다.
갑신일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자리도 치우지 않고 아침을 먹고는 백운암(白雲庵)에 올라 조금 쉬었다. 마침내 부여잡고 아주 조금만 올라도 이르는 곳이 차츰 높아지고 보이는 것이 더욱 멀어졌다. 학가산(鶴駕山), 공산(空山), 속리산(俗離山) 등 여러 봉우리가 이미 시선 아래 깔려 있다.
여러 차례 쉬면서 자소산(紫霄山) 정상에 이르렀다. 푸른 바위벽이 일천 인(仞)이나 되어 사다리를 부여잡고 오를 수가 없다. 탁필봉(卓筆峰)도 역시 송곳처럼 삐죽 솟아나 있어서 오를 수가 없다. 마침내 연적봉(硯滴峰)에 올랐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참 동안 서북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면서 호탕하게 휘파람을 불다가 돌아왔다.
다시 백운암(白雲庵)을 찾아, 이경호(李景浩) 사인(舍人)의 기(記)를 읽었다. 정말 어린 아이나 아낙네가 지을 만한 그런 글이다. 마침내 만월암(滿月庵)을 경유하여 동쪽 시내를 따라 밀치고 굽어 돌고 하여 내려왔다. 왕왕 위성류 나무 아래 쉬었는데 좌우는 모두 푸른 벽이었다.
더 가서 문수사(文殊寺) 뒤에 이르매 골짝이 자못 컸다. 곧 자소봉의 동쪽이자 경일봉의 서쪽이다. 시냇물이 한데 합하여 내리 쏟아 문수사의 비폭이 되는 것이다. 길 위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아주 사랑스러웠다. 길 아래에는 봉우리가 가파르게 쑥 뽑혀나 있고 상대승(上大乘)이 그 발 언치에 있다. 요사(寮舍)의 주인이 아주 비루하고 더러워서 앞서 들어간 자는 왝왝 구토를 하면서 나왔다. 끝내 들어가지를 않았다.
곧바로 김생굴(金生窟)에 이르렀다. 벼랑의 잔도가 썩어버려 끊어져 있어서 손으로 등덩굴을 움켜쥐고 이끼가 덮어 있는 벼랑을 엉금엉금 기어서 갔다. 몸이 흔들거리면서 올라가니 너무도 두려워 아주 벌벌 떨렸다. 김생굴은 큰 바위 아래에 있었다. 바위는 아주 웅장하고 잘 생겨 마치 천연으로 이루어진 듯이 안으로 감싸고 있다.
비폭은 바위 위에서부터 흩어지며 떨어지는데, 그 소리는 돼지가 울부짖는 소리 같다. 백일 아래에 빗줄기가 튀어 난다. 나무를 깎아서 그것을 받아서 마셨다. 승려가 말하였다. “비가 온 뒤에는 기세가 커서 그 소리가 웅장하게 돌아나가는 것이 마치 은하를 거꾸로 쏟은 듯합니다.”
바위굴의 방은 청정하여 상방의 여러 사찰 가운데 으뜸이다. 밤이 다 하도록 비폭 소리를 들으니 삽상하여 사랑스럽다. 만일 영험한 신선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여기에 깃들여 살 것이다.
나의 집에는 김생의 서첩이 있는데, 그 자획이 모두 억세고 굳건하여 바라보면 마치 뭇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는 듯하다. 지금 이 산을 보매, 김생이 이곳에서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겠다. 붓의 정신이 신묘한 지경에 들어가 가만히 겹겹으로 뾰족한 끝을 옮긴 것이다.
지난날 공손대낭(公孫大娘)이 추던 혼탈무(渾脫舞)의 경지를 장욱(張旭)이 터득하여 초서를 잘 썼다. 그것과 오묘함의 경지가 같다. 정말로 오묘한 경지를 터득한다면 괘(卦)를 긋지 않더라도 옳은 법이다. 춤과 산이 어찌 차이가 있으랴. 다만 이 산은 바르고 저 춤은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김생의 해서와 장욱의 초서가 갈렸을 따름이다. 세상에는 대개 장욱의 초서가 춤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전하지만, 김생의 서법이 산에서 얻은 것이란 사실은 모른다. 이 사실은 정말 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을유일에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렀다. 얼른 밥을 먹은 뒤 작은 누대에 올랐다. 그리고 절을 나가서 수풀의 누대에 앉아서 술을 서너 순배 마시고는 여러 승려들과 이별하고, 걸어서 사자항(獅子項)으로 나갔다.
거기서 비로소 말을 타고 길을 갔다. 녹음 속을 뚫고 가서 삼각묘(三角墓)를 거쳐 푸른 시내에서 잠시 쉬고 영원(靈源)에서 양치하였다. 계곡 문을 나서서 큰 강을 건너 고개를 돌려 첩첩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구름과 아지랑이가 잔뜩 끼어 있어서 마치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에서부터 온 듯하다.
이대성(李大成:이문량)이 나를 나루 어구에서 영접하고, 오인원은 길옆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주(李酒)에 취하고 오반(吳飯)을 배불리 먹었다.
오인원과 함께 용수사(龍壽寺)에 묵었다. 용수사는 곧 고려 때의 거대한 사찰이다. 회나무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고 법당과 요사가 반나마 꺾였다. 승려가 서너 명 있으나 추잡해서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병술일에 고려 학사 최선(崔詵)의 비문(碑文)을 읽었다. 그 글이 군주를 속이고 부처에게 아첨한 추악한 작태는 바닷물을 다 쏟아 부어도 씻기 어렵겠다. 마땅히 들불을 살라서 태워 끊어 없애야 할 것이다.
아박(阿博)은 이국량, 오수영, 이원, 숙량, 팔원, 오생과 함께 온계(溫溪)에 묵고 있었는데, 이 때 와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농암 상공이 이대성을 데리고 견여(肩輿)로 왕림하셨다. 금치소(琴致韶) 만호(萬戶)는 나이가 여든 다섯인데, 역시 와서 나를 찾았다.
불전(佛殿)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각각 예를 행하였다. 농암 상공이 별도로 유산의 도구를 내보이시는데 모두 지극이 간이하면서도 능히 구비되어 있다. 여러 물품들을 차비하여 늘어놓되 바깥에서 구하지 않았다. 또한 잘 빚은 술로 권하시니 모두 신선의 맛이 났다.
술이 반쯤 거나해졌을 때 두 아들 이문량과 이국량을 시켜서 노래를 하게 하였다. 그 노래 소리가 마치 금석의 악기에서 나는 듯하다. 제생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었다. 금숙(琴叔)은 나이가 아흔이거늘 춤을 출 수 있었다. 인간 세상에 정말 드문 일이다. 너무도 즐겁게 놀다가 나왔다. 나는 아박과 이원, 숙량, 팔원과 함께 이날 저녁에 고을로 돌아왔다.
청량산은 안동부 재산현(才山縣)에 있지만, 실은 태백산의 한 지맥이 날아와서 정수가 엉긴 것이다. 그 넓게 퍼져 응집되어 있는 기세가 결속하여 여러 뾰족한 산들이 되어 우뚝함을 자랑하고, 차가운 기색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푸른 죽순이 겹겹이 무리 져서 뽑혀나 있는 것 같아 늠름해서 공경할 만하다.
큰 강이 그 산기슭을 둘러가니, 곧 황지(黃池)의 하류이다. 바위가 표한하고 물살이 거세어 거룻배를 띄울 수가 없다. 혹 긴 벽이 긴 연못을 끼고서 거울을 문질러 씻어 남빛을 내고 있다. 비유하자면 약수(弱水)가 맑고 얕아도 범상한 속세의 먼지를 끊어버리고 망령되게 고삐잡고 찾아오는 객을 두절하고 있는 것과 같다. 반드시 오랫동안 가물어서 물의 높이가 떨어진 이후에나 가까스로 외인을 통하게 한다. 그러므로 산이 물에 힘입어서 더욱 으슥하다.
대개 이 산은 그 둘레가 불과 1백 리이되, 산봉우리가 첩첩하고, 모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을 이고, 아지랑이와 남기(嵐氣)낀 수목이 마치 그림과도 같고 시렁과도 같다. 정말로 조물주가 별도로 기량을 낸 것이라는 말이 맞다.
나는 일찍이 동쪽으로 금강산에 노닐고, 서쪽으로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을 발로 밟아보았으며, 남쪽으로 가야산(伽倻山)과 금산(錦山)의 정상에 올라보았고, 두류산의 왼쪽 어깨 부분을 익숙히 보아온 터라 그밖에 개미언덕 정도의 낮은 구릉은 손꼽을 만도 하지 못하였다. 비록 함부로 사마자장(사마천)에게 견주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구름 낀 산을 우아하게 감상하는 일은 일컬을 수 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길 해동의 여러 산들 가운데 웅장하게 온축되어 있는 것으로는 두류산(頭流山)만한 것이 없고, 너무도 맑은 것으로는 금강산만한 것이 없으며, 기이한 승경으로는 박연의 폭포와 가야산의 골짝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단정하고 삽상하여 비록 작아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으로는 오직 청량산이 그러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중국의 명산에 대하여 물으면 곧 먼저 오악을 일컬어서 북쪽은 항산(恒山), 서쪽은 화산(華山), 남쪽은 형산(衡山), 가운데는 숭산(嵩山)이라고 말하되 그 가장 큰 것을 물으면 대산(岱山:태산)이라고 답하되, 그 가장 작으면서 선경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반드시 천태산이라고 답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동국의 명산에 대해 물으면 곧 반드시 먼저 다섯 산을 일컬어서 북쪽은 묘향산, 서쪽은 구월산, 동쪽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이라고 답하되, 그 가운데 가장 크면서 남쪽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두류산이라 답하되, 작은 산으로서 선경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청량산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나는 열 살 때 이미 안동에 청량산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발을 옮겨 올라보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이미 37년이나 되었다. 수령의 부절을 받아들고 풍성(풍기)에 부임하여 온 이래로 억지로 애를 써서 동쪽과 서쪽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가다가 멀리 면목을 보기도 하면서 번번이 목과 눈을 수고롭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득 티끌세상의 하찮은 일에 제약을 받아서 심지어 그 산 아래까지 이르러가서 숙박을 하면서도 수레를 돌린 일조차 있기에 마음에 꺼림칙하고 근심스러워서 마치 기갈의 증세를 끌어안고 있는 듯해서 서글퍼 한 것이 이미 네 해가 되었다. 지금 이미 오십의 늙어 푸릇푸릇한 얼굴과 희끗희끗한 머리로 비로소 지팡이에 의존하여 연적봉(硯滴峰) 머리에 올랐으니 그나마 역시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겠다.
그 안팎의 여러 봉우리는 옛날에는 아무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승려들이 전하여 말하는 것으로는 안쪽 봉우리 가운데는 보살, 의상, 금탑, 연적이요, 바깥 봉우리로는 오로지 대봉(大峰)만 있었을 뿐이다. 금탑봉으로 말하면, 혹은 치원봉이라고도 한다. 치원대가 그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의상봉도 역시 의상굴이 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누추함이 이와 같은 식이다.
점필재는 두류산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은 믿지 않아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하물며 나와 같은 자는 어떠한 자라고, 감히 참람함을 잊은 채 이름을 붙이겠는가? 하지만 주문공(주자, 주희)은 여산(廬山)에서 기이한 절경을 마주치게 되면 곧바로 이름을 붙였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름을 안 붙이지 않았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산을 좋아하는 지자(智者)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바이다. 만약 주자와 같은 어진 이를 기다려서야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면, 이 산들이 이름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짐짓 이름을 지어 붙여두고, 훗날 철인이 고쳐주길 기다린다고 하여도 무엇이 해되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그 바깥 봉우리 가운데 긴 것을 이름 하여 장인(丈人)이라 하였다. 곧 큰 대(大) 자의 뜻을 부연하여서 멀리 태산의 장악(丈岳)에 비긴 것이다. 서쪽 봉우리는 선학이봉이라 하고, 동쪽 봉우리는 자란봉(紫鸞峰)이라고 하였다. 바깥 산의 이 세 봉우리는 모두 직접 가서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멀리서나마 이름을 지었다.
안쪽 산봉우리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은 이름을 자소봉(紫霄峰)이라고 하였다. 푸른 바위가 1천 자나 허공 속으로 수려하게 뻗어나 있다. 동쪽 봉우리는 이름을 경일봉(擎日峰)이라고 하였다. 빈욱(賓旭:아침 해를 맞이함)의 뜻을 취한 것이다. 남쪽 봉우리는 이름을 축융봉(祝融峰)이라 하였다. 형산(衡山)에서 모방해 온 바가 있다.
자소봉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미처 오십 보 되지 않는 곳에 가장 불쑥 삐져나온 것은 이름 하길 탁필봉(卓筆峰)이라 하였다. 탁필봉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십 보 되지 않는 곳에 돌연히 서 있는 것은 이름 하길 연적봉(硯滴峰)이라고 하였다. 연적봉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부용처럼 우뚝 솟아나 있는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 하길 연화봉(蓮花峰)이라고 하였다. 곧 연대사(蓮臺寺)의 서쪽 봉우리이다.
그리고 승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의상봉(義相峰)이라는 것이다. 연화봉의 앞에는 흡사 향로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기에 이름 하길 향로봉(香爐峰)이라고 하였다. 금탑봉(金塔峰)은 경일봉의 아래에 있고, 탁립봉은 경일봉의 바깥에 있다.
안쪽 봉우리와 바깥 봉우리를 합하여 모두 열두 개인데, 옛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셋이고, 이름이 없기에 이름을 지은 것이 여섯이다. 그 하나는 옛 이름을 그대로 쓰되 한 글자를 앞에 씌웠으니, 곧 탁필봉이다. 역시 여산의 탁필봉을 본뜬 것이다.
참람함을 무릅써서 불가피하게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은 자소봉이다. 모두 9층으로 11개의 절이 있다. 백운사(白雲寺)가 가장 높고, 다음은 만월사(滿月寺)며, 그 다음은 원효암(元曉庵)이며, 그 다음은 몽상암(夢想庵)이고, 다음은 보현암(普賢庵)이며, 그 다음은 문수사(文殊寺)며, 그 다음은 진불사(眞佛寺)며, 그 다음은 연대사(蓮臺寺)이다. 그 다음은 별실(別室), 중대(中臺), 보문(普門)이다.
경일봉(擎日峰)은 모두 3층인데, 세 개의 절이 있다. 김생사(金生寺), 상대승사(上大乘寺), 하대승사(下大乘寺)다. 금탑봉(金塔峰)은 3층으로 모두 다섯 개의 절이 있다. 모양이 탑과 같다. 다섯 개의 절은 모두 가운데층에 빙 둘러 설치되어 있다. 곧 치원사(致遠寺), 극일사(克一寺), 안중사(安中寺), 상청량사(上淸凉寺), 하청량사(下淸凉寺)가 이것이다. 여러 절들이 절벽을 등지고 있어서 그 위에 다시 절이 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절의 뒤는 벽이고 절의 앞은 모두 대이다.
연대에서 보면 금탑봉은 한 개의 3층탑이고, 치원대에서 보면 자소봉도 역시 한 개의 9층탑이다.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하였던 바요, 듣지 못하였던 바이다. 여러 봉우리를 직접 눈으로 보니 겁 많은 사람이라도 족히 떨쳐 설 수 있겠고, 여러 폭포의 소리를 직접 귀로 들으니 탐학한 자라도 족히 청렴해 질 수 있겠다. 총명의 물을 마시고 만월의 암자에 누우면 비록 신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신선이라고 말하련다.
다만 괴이하게도 지리지(地理誌) 및 국사에 모두 말하길, 최치원이 청량사에 노닐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곧 합천 가야산의 월류봉(月留峰) 아래를 말한다. 이 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지리지에 실려 있다고 하더라도 한 글자도 고운(孤雲)이나 김생(金生)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후세 사람이 이 산을 존대하게 보이게 하고 싶어서 함부로 고운과 김생을 끌어다가 이곳에 머물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으나 전문(傳聞)이 없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최치원에 대해서는 대에 이름을 붙이고 또 절에 이름을 붙였으며, 김생에 대해서는 굴에 이름을 붙이고 또 절에 이름을 붙였으니, 천년의 끼친 자취를 어찌 어제 일처럼 그렇게 명백하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아울러 기록해 두어서 미래의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다.
아아, 만일 이 산이 중주(중국)에 있다고 한다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읊조리고 희롱하며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이 기록하고 서술하며, 주자(朱子)와 장식(張栻)이 올라보고 감상하여 천하에 크게 울려나지를 않았겠는가. 그렇거늘 적막하게 천년 동안 그저 김생과 최고운 두 사람에게 의지하여 한 나라 안에서만 이름이 났으니 정말로 탄식할 만하다.
이 산이 비록 안동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는 모두 예안(禮安)의 지역이다. 송재(松齋)와 농암(聾岩) 이후로 대유학자와 석학들이 줄이어 나왔다. 속언에 청량이라고 하는 것은 안동의 산이지만 사실은 예안의 인물을 내었다. 그러니 지령이 인물을 낸다는 설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이번 등람의 행차에 잡시 85수를 지었고, 아울러 전후 청량산에 노닐며 내키는 대로 읊은 것이 근 1백 편이 되어 함께 기록한다. 돌아가 바닷가에 누워 아이들과 함께 한번 펼쳐본다면 이 등람의 행차가 자적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역시 이 점에서 경건히 해야 할 바가 있다. 지난날 주회암(주희)은 장남헌(장식)과 함께 남악에 노닐어, 갑술일에서부터 경진일까지 모두 이레 동안에 창수하여 얻은 시가 모두 49편이었는데, 기묘일의 한밤에 늠연하게 화롯불의 재를 뒤적이면서 서로 마주하여 그 황탄함을 경계하였고, 심지어는 약속을 정하여 그 이후로는 비록 노래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여도 다시는 시로 드러내지 않았다. 남헌(장식)이 이미 그 창수집에 서문을 쓰고 난 뒤, 저주(櫧州)에서 장차 두 사람이 이별하려고 할 때 장경부(장식)가 시를 증여하자, 회옹(주자)은 답례로 시를 짓는데 불과하였다.
그래서 「남악유산」의 후기에서 말하길, “계미에서부터 병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흘, 악궁(嶽宮)에서 저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180리인데, 그 사이에 구경하였던 산천과 임야와 풍연과 경물들을 시로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이미 약속하여 서로 토론하고 이치를 탐구하였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는 지을 여가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길, “시를 짓는 것이 본디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깊이 징계하여 통렬하게 끊어버린 것은 그것이 흘러가서 병통을 나을까봐 염려하여서다. 무리지어 거처할 때는 서로 인(仁)의 덕을 보완하여 성장시키는 보탬이 있어도, 그래도 혹 말류로 흐름을 면하지 못한다. 하물며 무리를 떠나 홀로 거처하게 된 이후에는 사물의 변환이 무궁하기에 기미의 사이와 미세한 차이에 이목을 혼란시키고 마음과 뜻을 느껴 움직이게 만들 수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장차 어떻게 막겠는가!”
우리 일행이 마침내 그 설을 다 적어서,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에 새겨 두고 잊지 않는 경계로 삼는다. 나는 태어난 것이 너무 늦어서 이미 남악의 눈 내린 곳에 주자를 모시고 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주의 이별에서 남기신 여론을 접할 수도 없다. 어리석고 아둔하며 굼뜨고 조야하여 아무리 잘못을 적게 하려고 하여도 그러지를 못하니, 어이 감히 그 밝으신 가르침을 외워 여러 벗들에게 고하고 스스로를 꾸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해년에 상산(商山) 주(周) 아무개가 적는다.
- 주세붕(周世鵬)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은 주세붕(周世鵬 ; 1495~1554)이 풍기군수로 있던 갑진년(1544년) 4월에 청량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것으로, 『무릉잡고(武陵雜稿)』 권 7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유람에서 주세붕은 청량산 12봉우리의 명칭을 부여하여 퇴계 이황과 수많은 사람들이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그가 명명한 12봉우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으니, 매우 소중한 유람이었다고 여겨진다. 산행에 있어 군수라는 직위도 있었으나 가마를 모두 스님들이 메고 올랐고, 노스님이 알려주는 김생굴(金生窟)ㆍ치원대(致遠臺)ㆍ원효사(元曉寺)ㆍ의상봉(義相峯)은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일축한 것을 보면 당시 불교가 얼마나 홀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람 후에 돌아가서 유록을 쓰면서 덧붙이기를 중국의 오대 명산을 제외하고 작은 산으로 으뜸산은 천태산이며, 우리나라의 오대 명산을 제외하고 작은 산으로는 청량산이 제일 으뜸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내외 12봉우리의 이름과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7일간의 여행에서 창수한 시가 모두 149편임을 언급하고 있어 유람록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주세붕의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ㆍ남고(南皐)ㆍ무릉도인(武陵道人)ㆍ손옹(巽翁), 본관은 상주(尙州), 아버지는 문보(文喇)이다. 어머니는 별호군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선대에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주세붕의 현달로 증직되었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승문원교리ㆍ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었다.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1545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ㆍ전한ㆍ직제학ㆍ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였다. 이후 대사성ㆍ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되었다.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되었다.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인 박(博)을 양자로 삼았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도동곡 道東曲」ㆍ「육현가 六賢歌」ㆍ「엄연곡 儼然曲」ㆍ「태평곡 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주향되었고, 백운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 『죽계지(竹溪誌)』ㆍ『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ㆍ『진헌심도(進獻心圖)』가 있다. 문집으로 아들 박이 편집했다가 전란으로 없어져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