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맘먹었던 일이었기에 온종일 부는 찬바람 맞으며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풍류에서 마산을 갈때는 야산을 타고 넘어가느라 참 누가 안보기 망정이지. 자기 집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고. 찬바람 이는 지금 자연의 모든 것은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감니다. 어머님들은 이 긴 밤을 메주를 쓸 콩을 가리고 있을겜니다. 잠시나마 친구들에게 좋은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소라부곡(召羅部曲)에서 유래, 일제 이전 조라면 리아시스식 해안선 때문에 조라포로 불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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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달천 |
| 소라면의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 에서 소라부곡(召羅部曲)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 말 여수의 마지막 현령이었던 오흔인의 절개에 조선은 여수를 현에서 폐하고 순천부에 귀속시켰는데 소라부곡의 위치를 순천부 동부 30 리라고 적고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이후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이나 승평지, 순천부지 에서도 똑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소라부곡은 고적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 점으로 보아 부곡으로 지정 된 것은 고려시대로 보이며 이때의 기록만으로는 소라라는 지명이 처음 생겨난 것이 언제 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미 부곡으로 지정되기 전의 지역 이름이었을 것이다.
소라는 한자로 부를 소(召)와 비단 라(羅)로 표기하여 지금은 소라라고 하지만 한자 소는 '조'라고 읽기도 하며 일제시대 이전 까지도 오늘날의 소라면과 화양면 지역을 합쳐서 조라포면이라고 말하였다.
소라의 본래 발음은 조라포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조라를 소라로 읽기 시작한 것은 근대식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던 1914년 이후이며 일부 노인들은 1950년대 이후에도 <조라포면>이라고 불렀었다.
그렇다면 조라포는 어디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조라포를 포구의 우리말인 ‘개’로 바꿔 부르면 ‘조랏개’가 된다. 조라포는 ’조랏개‘의 한자식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조라포와 같은 땅이름을 가진 곳을 전국에서 찾아보면 거제도의 구조라 해수욕장이 있던 곳의 옛 지명이 조라라고 하였고 이곳은 조선시대 조라 만호진이 있던 곳이며, 충남보령에도 조라포라는 작은 포구의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조라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진 곳은 모두 해안가의 포구가 있던 지역이며 거제의 구조라의 지명유래는 포구의 모양이 조래 (밥 짓기 전 쌀을 이는 도구) 모양이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제나 보령과 함께 여수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조라지역의 경우도 해안선의 모양이 조래 모양의 리아시스식 해안으로 세 지역의 해안선 특징이 닮아있고 ‘조랏개’와 음이 비슷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도구인 <조락>의 특징처럼 입구가 작고 안이 넓은 포구였던 조랏개 면의 옛 치소가 현천마을이나 관기마을로 전해오고 있어 조라포는 지형의 특징 때문에 만들어진 땅이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은 지금도 ‘걸망개’라는 땅이름이 전해오는데 ‘걸망개’의 ‘걸망’은 꼴을 담으면 걸망이지만 해산물을 담으면 ‘조락’이라 부르는 도구이다.?
땅이름을 표기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대부분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의 뜻으로 뜻 옮김 하거나 소리 나는 대로 음을 옮겨 적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율촌 >이 ‘밤 골’을 뜻 옮김 한 이름이라면 <조라포 >는 ‘조랏개’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땅이름인 것이다.
소라면사무소의 지명유래를 찾아보니 대포저수지 아래로 흐르는 소라천(召羅川) 에서 유래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소라천은 대포들이 간척지로 변한 1925년 이후에야 개천이 생겼기 때문에 수백 년 전의 ‘조라포’의 유래와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여수 지방의 마을 이야기나 지명의 유래를 기록한 책들은 대부분이 근대 이후에 만들어 지면서 사용되는 한자의 뜻에만 매달려 풀이를 하려다 보니 많은 억지스러운 해석들이 만들어 졌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제 나라의 말과 글을 가지고 민족의 혼이 담긴 땅이름들을 붙여서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의 땅이름은 중국의 한자가 들어오면서 한자식 지명으로 고쳐 적으면서 대부분의 땅이름의 소리가 바뀌며 뜻마저도 잃어버렸고 일제시대 이후엔 그 흔적까지 사라져버린 곳이 많은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1789년의 호구 총수를 살펴보면 조라포면은 상도와 하도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소라면 대부분 지역이 조라포면 하도였고 화양면 지역은 조라포면 상도에 속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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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모양의 함박개가 대곡(大谷) 소라 섬달천의 옛 이름은 달래섬 |
박종길의 땅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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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면 서북쪽의 복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법정리로 처음 만들어진 이름으로 조산, 풍류, 대곡, 마산, 신흥, 달천, 섬달천 마을로 이루어져있다.
조산마을은 본래 ‘고막개’라고 부르던 마을로 이 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에는 고막이 많이 잡혀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여수반도에서 <고막개>와 비슷한 땅이름으로 불려지는 해산마을이나 화양면 등에서도 고막이 많이 잡혔던 지역의 이름들이 <꼬막등>과 같은 이름으로 전해져온다.
소라면지에서는 일제시대에 조산(造山)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기록하였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이미 조산마을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산 마을의 이름은 한자의 뜻이 인공으로 만들어진 산을 뜻하고 있어 마을에 전해오는 <똥섬>의 전설에서 재미있는 유추를 해 볼 단서가 있다.
풍류마을 앞 들판에 자리한 섬 모양의 작은 동산 <똥섬>은 그 곳에 자리하지 않았다면 전망도 확 트이고 들판도 넓어질 애물단지로 그 이름처럼 주민들의 이야깃거리에선 항상 천대 받았던가 보다.
옛날 어느 시대엔가 세상을 삼킬만한 대 홍수가 있었는데 어디선가 이 산이 등등 떠내려 오고 있는데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이 저 산 보라고 외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고 한다. 조산과 풍류는 처음엔 한 마을로 조산을 <윗조산>이라고 하고 풍류를 <아랫조산>이라 하였으니 인공산 모양인 이 산을 조산이라 부르기에 적당하지 않았을까?
참고로 조산(造山)의 땅이름을 살펴보면 실제로 거대 고분과 같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도 많아 필자도 조산 마을의 이 섬이 ‘인공 섬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였다.
조산 서쪽의 풍류마을도 호구총수에 등장하는 마을 이름이다. 마을 입향조가 학문을 즐기는 선비라서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로 지어졌다는 유래가 전해져 온다.
여자만 바닷가에 위치한 대곡마을은 마을의 모양이 큰 함지박 모양으로 생겨서 ‘함박개’라고 하던 이름을 ‘함박포(含朴浦)’ 라는 한자이름으로 사용하다 여수군 신설이후에 ‘대곡(大谷)’ 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들은 일제시대인 1913년 4월에 고뢰농장에서 여수지방 최초의 대규모 간척공사를 통하여 조성되었다. 마산마을은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담이 막힌 마을 이란 의미의 <마근담>이라고 하던 것을 여수군 신설 이후에 마산이란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오씨성인 집성촌이며 마을 뒤 문중묘지 부근으로 고인돌이 질서정연하게 열을 이루고 있다.
한 동안 이 고인돌은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왔다. 여수의 중심에 있던 석창성은 도술이 뛰어난 도사가 쌓았는데 여수지역의 큰 돌들을 불러들이다 공사가 마무리 되면서 돌들이 오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
그 때 이 마을 뒷산에서 석창성으로 가던 돌들이 멈추어 섰던 것이 지금의 모양으로 굳어지게 되었단다.
달천마을은 마을 지형이 달을 닮아서 지어졌다고 하나 본래 부르던 우리말 땅이름이 정확하지가 않아서 그 유래를 추측하기가 어려운 마을 이름이다.
한 가지 생각해 볼만한 기록으로 달천 앞에 있는 섬달천에 관한 기록으로 송강 정철의 중형인 청사 정소 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마늘을 심고 오징어를 잡으며 세월을 보낸 기록과 일화가 지봉유설로 유명한 이수광 선생이 기록한 <승평지>나 순천지역의 전해오는 시를 모아 편찬한 <강남악부>에 종산포(種蒜圃=마늘을 심은 밭)가 라는 한시로 전해온다.
이 기록들에서는 섬달천을 달래도(達來島)로 기록하고? 있는데 종산포의 산(蒜)이란 한자는 달래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 일대에 달래가 많이 자라기도 하여 <달래섬>이나 <달래마을>로 불려지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신흥 마을은 풍류나 조산과 연결되던 길이 밀물이 되면 바닷물이 들어오자 바다에 돌다리를 놓아서 <석개>라고 하였는데 신흥이란 이름은 새터에 자리를 잡아 마을이 흥성하게 되자 불려진 이름으로 여수군 신설 이후에 생겨나 사용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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