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문학관에서 채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육영수 전 영부인 생가지가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태어난 장소이다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대지주 육용필의 자식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육종관은 형들이 출향하여 출세하자, 자신은 고향에 남아 집안의 재산을 관리했다. 당대 5대의 외제차를 주차했을 정도 거부였다 사진은 그 주차건물로 썼던 사랑채 앞 건물이다
194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12월 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사건으로 숙군되어 사형언도까지 받았다가 만주일본군 때 맺은 인연 선배 백선엽의 도움으로 풀려나 한국전쟁(6.25전쟁) 이 터지자 결국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며 다시 부활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때 곧 중령으로 승진했고 1950년 11월 전쟁의 혼란을 틈타서 첫째부인 김호남과 협의 이혼으로 갈라서고 1950년 12월 12일에 곧바로 육영수 여사와 재혼하게 된다
이 집은 1600년대 정승을 지낸 김씨가 처음 지어 살았고, 이후 송 정승, 민 정승 등 3명의 정승이 살았던 집이라 하여 ‘삼정승집’이라 불렸다.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1920년 매입하였다고 한다.
본채(사랑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연당사랑이 있다 육영수 여사 가족들이 이곳에서 스케이트도 탔다 한다
육영수 아버지 육종관은 처음에 전쟁 중에 군인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한사코 반대했으나, 남편 육종관의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도 순종적이었던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은 일생동안 처음으로 남편의 의견에 반기를 들어 결국 박정희와 육영수를 결혼시키고 만다.
뒤채의 모습이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육영수 여사는 남편의 5 16 쿠테타를 지켜보았고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활동, 육영사업, 적십자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뒤채에서 서쪽편 동산으로 오르는 쪽문이 있다
동산에는 대나무 밭 한쪽 높은 언덕에 정자가 조성되어 있는데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동안 앉아 쉬었다 원래는 알밤 나무가 있어 육영수 여사가 밤을 줍던 곳이라 한다
이후 여사는 어린이대공원의 조성 및 1969년 4월 14일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어린이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꿈나라〉 등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렇게 순탄하던 일생은 남편 박정희가 삼선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독재를 장기화하는 우여곡절 속에서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남편에게 쏜 총탄에 대신 맞아 사망하며 종지부를 짓는다.
사랑채 서쪽으론 안채가 있는데 규모도 크고 연자방아까지 집안에 두었다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오랫동안 잊혀지며 허물어졌던 이 생가는 6,047m2의 대지 위에 1970년 초에 개축된 관리사·사당 등만 남아 있었으며, 주변은 울창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었고 과거 본채·사랑채·별당 등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터만 남아 있었으며 주변은 연못과 정원 터 등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종 숭상하는 일련의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진 채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해 2011년 5월부터 일반에 공개하게 된다. 사진은 안채의 모습이다
육종관 씨가 사용하던 영사기이다
결국 육종관 씨는 죽기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사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1600년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곳으로,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으로 가치있는 자료가 되어 충북 기념물 123호로 이렇게 현존하게 된다.
생가 앞에는 넓게 연꽃지의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해마다 축제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