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묵상
2022년 2월 10일 목요일
시편 32편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편 32: 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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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건한 사람
어제는 아침에 말씀묵상을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날은 하루를 살면서 계속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치지 못한 숙제가 마음 속에 계속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32편을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 왜 이 시인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가?
* 이 시인은 입을 열어 주님께 자신의 죄를 자복하지 않을 때에는 왜 그토록 괴로워하면서 신음했는가?
* 그때 이 시인은 주님의 손이 주야로 자신을 누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름 가뭄에 말라버린 식물처럼 되고 말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이런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하겠습니다. 죄책감과 관련하여 전에 읽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글인데, 그 가운데 영화 어톤먼트(2007년)의 줄거리가 나옵니다. 한 쌍의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거짓말로 그 연인은 가련하게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못한 채. 그 여인은 자신이 한 잘못을 반성하면서 몸과 마음을 학대하는 수준으로 간호사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칠십세의 성공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한 그 죄책감 때문에 결국 자신이 더럽힌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여 바로잡습니다.
이 글은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Wellspring/UnEe/23
죄책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받을 형벌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 받은 훈육 때문에 갖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이 새겨 주신 본래적 성품일까요?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는 타고난 도덕적 능력이 있는데 동양의 현자들은 그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인의예지로서 각각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으로 정리됩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은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로 볼 때 시편 32편과 같은 죄책감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공통된 감정이나 덕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죄책감을 무시하고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가끔씩은 괴로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죽기 전에 가장 크게 후회할 일도 죄책감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경건한 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그 길을 찾습니다. 그들은 철없는 나귀나 노새처럼 재갈과 굴레로 휘어잡아야 따르는 완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일이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살피고 그것을 고백하며 바로잡으며 주님의 길을 구하고 찾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경건한 사람이란 자기 속을 늘 살피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이것은 측은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그릇된 일을 반성하고 바로잡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경의 경건은 동양 성현의 가르침인 사단(四端)을 실천하는 삶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시편 32편을 인용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6~8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노력하고 수고했으므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지켰으며, 자신이 속죄제를 드렸으므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한국영화 밀양(2007년)은 대속의 다른 측면을 다루었습니다. 어톤먼트에 나오는 여인 소설가 브라이어니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 반면에, 밀양에 나오는 살인자는 죄책감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다고 기뻐하면서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대속이 어떤 의미인지는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그 논란의 한 단면을 영화 밀양은 드러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닫고 큰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자신에게 평안을 주지 않음을 알고 그는 괴로워합니다. 영화 어톤먼트의 나이 든 소설가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워보려고 노력하다가 지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용서와 해방의 복음을 전한 이유는 자신의 처절한 절규 가운데 체험을 통해 깨달은 은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편 32편의 시인도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고자 했으므로 괴로웠고 그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낱낱이 토로하고 용서와 인도를 받았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경건하게 살고자 성심성의를 다하는 사람이라야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기에 더욱 경건한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행위구원론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교개혁 이후로 오랫동안 은혜와 율법의 대결구도 속에서 복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구도자의 삶 속에서 율법과 은혜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 안에서는 율법도 은혜도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그 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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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기:
1. 나에게는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바로잡으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이 나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를 가려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왜 죄 용서를 받고 싶습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그리고 그것을 오해한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위에서 소개한 두 편의 영화를 비교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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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처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날마다 가다듬겠습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돌아보아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양지심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공명정대하게 하는 떳떳한 삶을 연습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저희들의 양심을 일깨워주시고 주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