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족(自足)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머니 품 ‘자연’
요즘 TV 프로그램 주요 관심사는 ‘자연인’이다. 연두공동체를 시작하던 2000년대 초기에만 해도 ‘나는 자연인이다’는 소수만이 알던 방송 프로그램이었지만 지금은 범국민이 보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우리 마음이 ‘자연’과 ‘시골’로 향한다는 증거다. 또 하나는 등산이다. 나도 여동생 암을 치유할 목적으로 여동생과 함께 틈틈이 명산을 돌아다닌다. 걷기. 등산. 시골 같은 ‘자연’으로 향하는 발길은 결코 한시적이지 않다. 우선 도시보다 돈이 덜 드는 문화생활이라는 점이고, 인구 절반을 차지할 만큼 고령 인구가 늘어나는 지금 추세는 우리에게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 본능’을 일깨운다. 세 번째는 한평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과학 물질주의 만능이 우리 ‘건강’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풍요로운 삶에 정점을 찍고 IMF 시대보다 더한 ‘나락’을 향해 가는 2023년에는 예측할 수 없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기존에 있던 인간 생존방식이 더욱 흔들릴 것이다. 사람들은 본능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자연의 일원이듯 이제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어머니 품 ‘자연’이라는 것을. 바야흐로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2000년을 꾸준히 지배하고 극점으로 치달았던 물질문명이 바뀌어 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구생명체는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뚜렷하게 말해주고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나는 귀농한 지 20년을 넘어섰고, 나이 예순을 앞두었다.
”선생님 <자립인간>을 읽고, 그 뒤에 ‘암 선고’를 받았는데 선생님이 자꾸 생각이 나요. 항암 치료 전에 뵈어야겠다고 결심해서...” 굵은 눈발을 헤치며 은은가까지 찾아온 청년과 ‘짧지만 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자급과 자립하는 삶에서 놓치는 사실이 있다. 이제까지 자급, 자립. 자족 모두 ‘물질’ 쪽만을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나도 처음 귀농을 결정할 때는 물질문명 구조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최소한 적은 돈으로 행복하게 살자고. 물질 욕망을 줄이는 환경을 만들려고 농부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되도록 ‘없으면 없는대로’ 산다. 예를 들면 이렇다. 빵을 만들어 먹고 싶은데 부엌에 밀가루랑 후라이팬만 달랑 있다. 그러면 그냥 ‘후라이팬’으로 빵을 만들어 먹는다. 발효빵을 해 먹으려고 재료를 밖으로 사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있는 재료들을 집에서 찾아보고, 없으면 없는대로 만들어 먹는다. 후라이팬에 토종밀가루로 빵을 만들면 딱딱하기는 해도 구수한 게 그런대로 맛이 좋다. 재료 맛 그대로. 옛날에 엄마가 빵을 만들어줄 때도 그랬다.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는 이런 자급 자립하는 생활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소비가 줄면 공장이 줄고, 실직자가 생기고 세금도 적게 걷히고, 세금 걷을 대상자는 돈으로부터 멀어진다. 국가나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든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키는 연구에 몰두한다. 국가가 지불하는 코로나 위로금, 소농직불금도 소비하라고 주는 것이고, 소비를 부추켜서 국가는 세금을 거둔다. 우리가 소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자체가 反자본주의, 反국가적 행위가 된다.
숨만 쉬고 있어도 필요한 돈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돈이 필요하다. 숨만 쉬고 있어도 ‘최소한’의 돈, 각종 세금이 필요하다. 토종씨드림 회원이 돈 없이 살아보겠다고 밭에 움막을 짓고 살며 농사를 짓는다. 밭에서는 자급용 푸성귀 외에는 팔 것이 없다. 간혹 일당도 뛰지만 결국 이리저리 돈을 빌리는 모양새가 된다. ‘숨을 쉬고 끊고 사는 것’도 돈이다. 집에서 죽어도 사망신고는 병원에서 해야 한다. 집에서 죽고 병원으로 옮기면 자식은 경찰 조사를 받는다. 심지어 부검까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픈데 왜 병원을 안 왔냐?’는 것이다.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한다. 사망 선고와 더불어 각종 병원비를 청구한다. 거대한 돈 시스템으로 전 생애를 촘촘하게 얽어 놓았다. 이런 구조에서 ‘최소한 필요한 돈만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다 함께 실행하려면 자신 스스로 자립하는 삶을 살려는 의지와 실천 그리고 그런 가치를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고 연대하며 협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회구조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다. 도시보다는 시골이나 농촌에서 이루기가 훨씬 쉽지만 ‘도시’에서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적은 돈으로 행복하게 살려는’ 노력 자체가 삶이 이끄는 정치이며 변혁 운동인 셈이다.
풀들은 서로 돕고 함께 나눈다
‘자연’ 속에 들어와 살면서 다른 이를 향한 비난과 독설. 밀어내는 모습을 본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다. 하지만 풀만 보더라도 ‘경쟁’이 아니고 ‘협력’이다. 땅이 넓으면 자리를 다 차지하지만 다른 풀들이 들어오면 자리를 내어주느라 비좁게 자란다. ‘경쟁’은 인간한테 있는 이기심을 내비친 것이지 결코 풀과 같은 생명이 내비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 본위로 발달한 물질과학 문명은 물질 본성 그대로가 아닌, 인간 본위로 놓은 것이지, 생명 자체는 서로 도와가며 함께 나눈다. 질병도 병충해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생긴 것이다. ‘암’과 ‘질병’ 자체가 스스로 공격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평소에 ‘암덩이’라고 지적하는 것들, ‘암’은 개인과 집단 안에 도사린 배타적 부정적 욕망을 개인과 집단이 ‘이념’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세상 만물은 연결돼 있다. 나쁜 생각과 감정은 나쁜 마음을 끌어들이고 재생산한다. 인간 개체는 50조로 이루어진 세포로 끊임없이 사라지고 되살아난다. ‘나’는 ‘숨’을 쉬면서 50조 세포를 관장한다. ‘경쟁’으로 보면 삶은 ‘전쟁’이다. ‘공생협력’으로 보면 ‘평화’다. 삶을 살아가는 내 태도가 바깥세상을 결정짓는다.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신에 ‘덕 많이 쌓으세요’하고 인사를 건넨다. 먼저 덕을 쌓아야 나중에 복을 받는 것이 이치다. 젊은 시절에 덕을 쌓아야 노년에 복을 받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바깥세상에서 ‘도덕(道德)’을 외쳐봐야 나 스스로 덕을 쌓지도 도를 행하지도 않는데 세상이 바뀔 리는 없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세상이 바뀔 리가 있나? 자식과 남편을 탓하며 자신만이 옳다는데, 갈등이 해결될 리 만무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세상이 고울 리 없고, 우리 식구들이 편안하지 않으면 자신도 편안하기 어려운 것처럼, 내 속마음, 깊숙이 감추어진 곳부터 바꾸어야 한다.
‘자립’은 어린 시절 받은 상처에서 자립, 내 부모로부터 정서적 자립, 내 안 깊숙이 도사린 욕망 덩어리로부터 자립, 오랜 죄책감으로부터 자립, 내 자식으로부터 자립, 내 미래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자립’해야 한다. ‘지금 순간에 공경과 정성, 최선을 다하는 自足’으로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며 진정한 자립이 된다. ‘나’가 옳고 ‘너’는 틀리다‘고 하는 비뚤어진 생각은 갈등과 불안을 일으킬 뿐이다. 마음이 편하면 바깥을 바라보는 눈도 편해진다. 눈이 편하면 눈을 치켜뜨지 않고, 부처처럼 눈이 저절로 아래로 향한다. 생명은 돌고 도는 것이며, 시작과 끝은 없다. 시작과 끝은 종말과 위기론을 들춰내어 삶을 두렵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거칠게도 한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두려움과 불안을 조장하고 부추킨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국가에서 ‘돈’을 퍼붓는다고 해서 자식을 낳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식을 기르는 것은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물질 풍요만을 추구했던 결과물을 지금 우리 스스로 고스란히 되돌려 받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나는 오늘에 충실한가?
기후변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인간을 중심으로 달려온 물질문명 폐해는 2천 년 전부터 성인들이 아니, 1만 5천 년 전부터 잃어버린 정신문명을 이야기해왔다. 돌뿌리에 넘어지면 ”에이, 이놈의 돌 때문에“하고 탓할 게 아니라 ”돌이 있는데 내가 보지 못했네“ 하며 딛는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속에 있으면서 물 바깥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개발하지 않고 바깥세상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견주며 돋보이고 싶어 ‘애쓰며’ 살아간다. 수 천 년을 산 거목과 거대한 숲, 수많은 색채 향연은 ‘씨앗 한 알’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펼칠 잔치가 아닌 세상의 화려한 잔치에 눈길이 향해 있다. 자족은 내가 딛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한 것이다. 어제와 내일에서는 자족을 찾을 수 없다. 나에게 온 커다란 질병이나 이 불행이 내일에 나를 맡겨두고 현재를 처절하게 짓밟은 것은 아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지. 밀어내거나 소통하려 하지 않고 불통했던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살펴보면 저절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토종교육을 할 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소득이 가능해요?” “뭘 먹어야 내 몸에 좋죠?” 하고. 비워야 채워지는 법이거늘. 얻을 것, 입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뭘 버려야 할지, 내가 먼저 내줄 것을 생각하는 것.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씨’가 된다는 것을, 귀농 20년 차 농부로서, 씨앗에서 다시 씨앗으로 이어가는 농부로서 살아온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자연을 살리며 자립하는 삶에서 영재교육은 저절로 된다고. 자연과 함께 살면서도 평안하지 않다면, “내가 지금 자족하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자급과 자립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토대는 자족(지금 현재에 충실하다)이기 때문이다.
물과 검정 빛이 만난 계묘년 1월 곡성 은은가(隱誾家)에서
글. 변현단. 토종씨드림 대표. <씨앗, 깊게 심은 미래>와 <토종농사, 토종씨앗> 저자.
|
첫댓글 요즘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자립과 자족을 이렇게 귀한글로 정리되어 접합니다
참 감사입니다~~~^^
"얻을 것, 입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뭘 버려야 할지, 내가 먼저 내줄 것을 생각하는 것. 당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씨’가 된다는 것을, 귀농 20년 차 농부로서, 씨앗에서 다시 씨앗으로 이어가는 농부로서 살아온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오늘도 선생님 귀한 글에서 자족에 대해 다시금 배웁니다.
자족과 자립, 정신적 자립도 자연이 많이 도와 주겠죠? 트라우마극복이든 상처든. . . .
소비하지 않는 건 반자본,반국가적인행위다. 그러네요. .욕망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는 것도 자족으로 삼으렵니다.
속속들이 귀한 글 감사해요.
자족은 내가 딛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한 것이다
자급과 자립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토대는 자족(지금 현재에 충실하다)이기 때문이다.
신이님을 만나 정신적 힐링까지!!! 힐링이 배가 됩니다.
자주자주 뵈면 좋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일에 나를 맡겨두고 현재를 짖밟고 피하려고 했던건 아닌지, 밀어내거나 불통했던것은 아닌지 나자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것이 씨가 된다는 건 현재에 정말 충실하게 임해야하는 이유가 되겠네요.
좋은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저도 보면서 자연이 그리워지는 마음이 들어요. 뿌린대로 거둔다는 진리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글로 자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