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운은 배에 화재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관실에서 왜 불이 났느냐면은, 요새 기관 기계가 아니고 옛날에 그때는 손으로 돌려가지고 뭐 불을 피우는데, 그거 하다가 처음으로 배가 고장이 났다고 해서 인제 그 정지하고 그럼 고쳐서 가겠지 했는데 거 가더라구요. 가다가 또 고장났어. 그 다음에 한 세 번째 고장이 났는데 그때 인제 발동을 걸다가 불이 난 거지.”
그는 수영을 잘 하더라도 옷을 입고 물속에 빠지면 얼마 못 견딘다는 생각에 불을 피해 탈의를 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옷을 입고 물에 빠지면은 이것을 견디질 못한다고. 그래서 그때 만일을 위해서 옷을 전부 다 벗고 빤스만 입고 이제 대기 상태, 설마 불이 여기까지 오면은 인제 물에 들어 가야한다. 뭐 순식간에 막 튀고 그 불덩어리에 맞아 죽겠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서 다이빙해서 인제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렇게 망망대해에서 떠 있기를 7~8시간 정도 였던 것 같아."
저만큼 일본 군함이 나타났다. 목포에서 진해 가는 도중에 배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다가와서는 수영을 해서 배에 오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김씨와 형, 일본인 등 세 사람이 먼저 배에 구출됐다.
“당시 일본군들은 이 중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래서 있다고 하니까 안으로 데려가서 자초지종을 묻더라구. 그리고 나서 일본인들이 살아있는지 망원경으로 살펴보고 찾는 과정에서 한국사람들이 구출됐고, 일본놈이 그때 세 명 구조됐어. 일본 군함은 일본인 5명 가운데 3명은 살고 2명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구출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버렸고. 1백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7~8명의 한국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외치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 곳을 떠났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전부 죽었지.“
일본군함은 더 이상의 구출할 일본인이 없다고 확인되자 물에 빠져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한국인 노무자 7~8명을 옆으로 지나쳐 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김백운은 없는 백성들이 무보수로 가서 죽도록 고생하고 그렇게 코앞에서 죽어갔다며 그때의 애통함과 분함을 삭이지 못했다.
일본 군함은 구출된 조선사람들을 완도 밑의 청산도에 내려 놓고 떠나버렸다. 그 때 청산도 청년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고 배(돛배· 무동력선)를 주선해줘서 다음날 오후 1시쯤에 해남으로 귀향했다.
“지금도 옥매광산 주변 마을에는 한날 제사가 많아. 형제나 부자가 같이 갔다가 다 죽거나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도 있고. 그 마을 주위가 거의 가난해서 인제 거기서 일하고 했던 건데. 그 동네 가면은 한날 제삿날이 한 30~40명,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 산사람이 137명이 살았고, 그러니까 250명 정도니까 백 한…십삼명이 죽은거란 말이여.”
그때 내가 18살에 갔다 왔으니까 나이가 젤로 어렸던거 같은데 나보다 한 두세 살 그때 어린 사람 몇 사람 있었는지 모르지만은 그렇게 없었어. 전부 다 나보단 나이가 뭐 한 칠팔 세, 열 살 정도해서, 삼사십 이랬던 사람들이거든. 그러니까 지금 나하고 그때 같이 갔던 사람중에 아마 한두 사람이 살았을까 거의 없을거요. 그렇게 참 슬픈 세상을 우리가 인제 살아온 사람이지.
김씨는 이제까지 60여 년 전 참상을 가슴속에 묻어왔다며 정부에서도 당시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했다.
“우리가 제주도에 끌려가가지고 강제로 노동당하고 짐승취급당하면서 일한 것도 억울하지만은 아까 말했다시피 그 불났을때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산 사람을 놔두고 그 놈들 바쁘다는 이유로 한국사람들을 그냥 방치해두고 와가지고 그 사람들이 죽었단 말이지. 그 억울한 분풀이를 말이지 어떻게 해야되느냐 이거야. 근데 이와 같은 것이 나뿐만 아니고 그 시대체제에 우리 국민들이 음… 말할 수 없을 만큼 다 나와 있듯이 약소민족으로서 당했다는 거. 우리가 지금도 이 시대 사람들이 좀 정신차려가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서 자손들은 이런 억울한 것을 안 당했으면 하는 거야.”
옥매산광산에서의 강제징용과 제주에서의 중노동, 구사일생으로 귀환하기까지 김씨가 밝히는 일련의 과정은 전쟁의 비극과 식민지 조국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김백운 씨는 귀향시 옥매광산 광부 백여 명이 사망한 당시의 참상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것에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으며,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눈 앞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을 그저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억울함이 김백운씨의 삶에 비분(悲憤)으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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