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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25
로마서 8장 1-2절
교회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생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좀 더 간단하게는 택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교회 안에는 성도의 교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성도의 교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모든 신자들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성도의 교제에 있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교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성도의 교제를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를 생각할 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내용이 각 신자는 다른 지체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기꺼이 기쁨으로 사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성도의 교제에 있어 두 번째로 생각해야 될 부분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지체를 위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있는 지체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 이것이 성도의 교제의 한 면이란 것입니다.
이제 사도신경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들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죄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이 그것입니다. 오늘은 죄 사함과 관련해서 살펴볼 것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6문입니다.
56문. “죄 사함”에 대해서 그대는 무엇을 믿습니까?
답.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으시고,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시103:3-4,10,12, 렘31:34, 미7:18-19, 고후5:18-21, 요일1:7, 2:2) 나의 죄악 된 본성을(롬7:21-25)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셔서(롬3:23-24, 롬5:18-19, 고후5:21, 요일1:7, 2:1-2) 내가 다시는 결코 정죄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롬8:1-4, 요3:18, 4:24).
우선 죄란 무엇인가 할 때 우리의 비참함을 하나님의 율법에서 안다고 말한 것처럼(3문)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비참함은 결국 죄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결과가 우리의 비참함이라고 할 때 이 비참함을 율법을 통해 알 수 있다면 율법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의식법도 있고 재판법도 있지만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이 죄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로 있습니다. 율법은 크게 두 가지를 요구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4문).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말씀이 율법의 핵심으로 있습니다. 이런 율법에 대하여 순종하지 못하는 것, 순종하는 것 같지만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 의의 결핍,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성향이나 행동 등 율법을 대적하는 모든 것, 그리하여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살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런 점에서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합니다. “제14문. 죄는 무엇입니까? 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어떤 결핍이 있거나 혹은 그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요일3:4).”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 더 나아가 순종함에 있어 부족한 것까지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분이 완전하시고 온전하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하고 온전한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반대로 그를 미워하고 그를 싫어하게 되면 그것이 곧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반대되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고 할 때 거기에 부족함이 있다면, 다시 말해 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죄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실 때는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게, 또한 그의 형상대로,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6문). 그런 그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오고 결국 모든 사람이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7문). 이런 사실을 로마서 5장은 그가 모든 인류의 대표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롬5:18),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5:19)
여러분, 죄에는 원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날 때부터 죄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그리고 그 본성은 부패함으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즉 원조는 죄책과 부패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원죄로 말미암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서는 우리 스스로 자범죄를 짓게 되는데, 모든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즉 우리의 죽음은 결국 죄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마1:21).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구약은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와 유월절 양, 그리고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로 나타내 보이셨는데, 이런 예표를 통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 안에서 내다보도록 하셨습니다. 신약은 예표가 아니라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나타셨는데,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앞서 고백한 내용과 맞물러 있는데, 다시 한번 정리하면 그가 성부의 독생자라는 사실과 그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로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하늘로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오사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 안에서 아담의 모든 인류의 대표이듯 예수 그리스도가 택자 혹은 참되게 믿는 자의 대표가 되어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이해 속에서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믿는 자들의 죄를 그리스도의 보상, 다시 말해 그의 대속으로 인하여 형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사면이요, 그리스도의 의를 베푸심과 전가하심이 그 핵심으로 있습니다. 좀 더 충실하게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죄 사함이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간구를 생각하사 택함 받은 믿는 자에게 그 어떠한 죄도 전가시키지 않으시고, 죄책과 죄의 형벌을 면하게 하시고, 마치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시며, 죄의 모든 형벌에서 그들을 구하시고, 그들에게 값없이 영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죄 사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으신 것으로부터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보상이란 그의 대속을 의미하는데, 우리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보상으로 인하여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 심지어 나의 죄악 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셔서 내가 다시는 결코 정죄에 이르지 않는 것, 이것이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복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죄 사함과 관련해 설명하면서 ‘내가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나의 죄악 된 본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 다시 말해 그의 대속을 받으신 이상 우리가 정죄를 받는 일은 결코 없지만, 우리 평생은 죄와의 싸움,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데, 18절 이하를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18-23) 즉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의 싸움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선보다는 악을 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한 마음을 주시지만,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은 악을 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 마음의 공존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탄식하게 되는데,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사망의 몸에서 자신이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자신이 건져낼 수 있다면 갈등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나를 건져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금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어지는 말씀처럼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 때문에 정죄를 받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상을 받으신 이상,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으신 이상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조금 전에 설명했지만 정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이 땅에서 죄와의 싸움이 없는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과의 싸움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리문답이 설명하는 것처럼 평생토록 나의 죄들과 싸워야 합니다. 나의 죄악 된 본성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과 나의 죄악 된 본성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신 그것을 보시고는 결단코 정죄하는 일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 할지라도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있고, 또 그런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죄를 짓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런 죄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죄와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대신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영원토록 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가? 죄를 짓는 것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을 때 금생에서 두 가지 유익을 받습니다(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 사도신경 참조). 하나는 금생에서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죄 사함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모습으로 있지만,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있지만 그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땅에서 의인으로 불립니다. 실제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의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의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로마서 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3-8)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접붙여졌을 때 금생에서 받는 또 다른 유익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넘쳐서 우리로 하여금 금생에서 죄를 이기고, 죄가 아닌 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려고 우리의 마음을 죄와 마귀의 나라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께 향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는가? 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에 대하여 아무렇지 않는 것처럼 생각 할 수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공로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그 방향이 죄를 향하는 쪽이 아니라 의를 향하도록,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그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아는 것은 그와 비례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것과도 직결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0-21) 그러나 신자가 된 이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기 위해 역으로 죄에 거할 수 있는가? 로마서 6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1-4)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방향이 더 이상 죄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를 향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의를 향하기보다는, 그리스도께로 향하기보다는 자꾸 죄를 향해 가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마음의 공존과 싸움을 로마서 7장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에서 멀어질 때, 다시 말해 의를 향하기보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방향으로 갈 때 성경은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돌이킬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할 때 죄 사함을 받은 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죄 사함에 대한 감사와 혹 우리가 금생에서 죄를 짓는다면 비록 죄 사함은 받았다 할지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와 관련해서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항목과 관련해서 살펴볼 때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죄 사함을 이미 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죄 사함에 대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자는 죄 사함을 받았고 또한 죄 사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성격으로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있고, 또 그런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습니다.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아 죄 사함을 누리고 있지만 이 땅에서 완전히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만큼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지만,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부분 역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항목을 살펴볼 때 확인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이 말씀은 권징에 대한 말씀에 이어 나오는데, 권징의 핵심은 회개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런 회개에 대하여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용서하되 몇 번까지 해야 하는지, 일곱 번 정도만 많이 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문자적으로만 보자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이지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의 10배인 일흔 번까지라도, 그리고 그 이상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제한해서만 생각하지 말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17장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3-4)고 말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내용인즉슨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임금이 있었는데, 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말씀하시는데, 한 달란트가 대략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하니까 노동자가 대략 16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을 때 벌 수 있는 금액이 일만 달란트입니다. 그런 돈을 빚진 자가 무슨 수로 갚겠습니까? 그래서 임금은 그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도록 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에 대해 빚진 종은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놀랍게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빚진 자요, 그 빚을 갚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가 나가면서 자신에게 빚진 자신의 동료를 만나 목살을 잡습니다. 도대체 얼마의 빚을 졌기에 그러는가? 백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100일 동안 일해야 할 돈입니다. 물론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조금 전에 자신의 주인 된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빚에 대하여 목살을 잡고 갚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는 조금만 참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간청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인은 자신을 불쌍히 여겼지만, 자신은 동료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주인 된 임금이 듣고는 불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18:32-33)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한없는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 또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용서의 성격에 있어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용서의 성격이 비춰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용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성격이 있습니다. 너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런 용서는 모든 진노를 자신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너희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용서는 용서했는데도 계속해서 그 일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을 정도의 용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 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면 용서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무엇인가 하면 용서의 기준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단 기준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이런 면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렇게 용서함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빚진 것이 얼마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에 비해 지극히 작은 줄 알고 용서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 우리가 그로부터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의 너무나도 강퍅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 다시 말해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망각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하는, 그리고 그것이 쌓이면서 강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보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반응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어떤 자들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전에는 어떤 자로 있었는지, 그러나 이제는 어떤 자가 되었는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도록 해야 하고, 나아가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만 있어선 안 되고 마음으로, 중심으로 용서를 해야 합니다. 한 번 용서했다면 그것을 다시 떠 올리지 않고 완전히 우리 마음에서 들어내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점과 흠이 있어서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다시금 들춰내는 일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새기셔야 합니다. 시편 103편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한 번 옮겨진 죄과는 동과 서가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내게서부터 나의 죄과를 떼어 내어 저 멀리 옮겨 주셨다면 더 이상 우리 안에는 그런 죄과가 없습니다. 요리문답의 내용처럼 비록 평생토록 싸워야 할 나의 죄들이 있지만, 또한 나의 죄악 된 본성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은혜로 내게 그리스도의 의를 베풀어 주셔서 죄로 말미암아 정죄 받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금생에서 확실하고 지속되고 영원한 죄 사함을 소유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일부 죄들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 안에는, 마치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참된 구원을 소유한 자로 죄에 대항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