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묘소 바로 옆에 조선시대 만들어진 창빈 안씨의 묘역이 있다
이곳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198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묘역에 서면 바로 아래에 한강이 흐르고 멀리 남산과 북악을 넘어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공작포란형의 명당자리이다.
이 묘는 동작릉(銅雀陵)이라고도 불렸으며, 배치와 규모를 통해 조선 왕실 후궁의 묘제도를 알 수 있다. 후궁 원묘에 보기 드문 신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전액(篆額)은 동평군오위도총부도총관 이항(李抗)이 ‘창빈안씨신도비명(昌嬪安氏神道碑銘)’이라 썼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이 짓고, 행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건립 연대는 비문 끝의 ‘숭정기원후오십육년(崇禎紀元後五十六年)’ 기록으로 1683년(숙종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묘소는 사망한 이듬해인 1550년 3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마련되었으나 이듬해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다.
창빈의 직계 후손으로 선조 이후 360여 년 동안 조선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었다. 창빈 안씨의 본관은 안산이며, 1507년(연산군 5) 증(贈) 우의정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시흥에서 태어나 9살에 궁녀로 들어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해 중종의 모후인 정현대비의 후의로 중종의 총애를 입게 되어 숙용(淑容)까지 이르렀다.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옛 법대로 중이 되어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 있고자 했으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중에 머물다가 1549년(명종 4)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창빈의 둘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선조 임금이 되자 1577년(선조 10) 창빈으로 추존되었다.
국립묘지 산중턱에 자리한 이 묘소는 곡장이 둘려진 봉분 앞에 묘갈 · 혼유석 · 석등이 각기 1기씩 있으며, 문석인 1쌍이 서 있다.
창빈안씨 바로 옆 능선자락에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두 형이 천연두에 걸려 이승만의 출생 전에 죽어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랐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세살이 되던 1877년 한성로 이사하고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남산 서쪽에 있는 도동에 정착했다. 초기에 주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웠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했다 하나 낙방한 것으로 알고있다.
1895년 스무 살의 늦은 나이로 배재고등학교의 전신인 배재학당에 입학해 아펜젤러 등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특히 영어 공부에 집중해 1895년 8월부터는 배재학당의 초급영어반 교사를 맡기도 했다.
1896년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이 1886년 11월 학생들의 토론모임인 협성회를 만들자 이승만은 이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898년 <협성회주보>가 창간되자 주필을 맡아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 등을 발표했다. 같은해 3월 열린 만민공동회에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1899년 1월 이승만은 박영효 세력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감 시기에 기독교도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종신형을 받았던 이승만은 1899년 1월부터 5년 7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 1904년 8월에 민영환의 도움으로 특사로 석방됐다.
같은해 겨울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의 임무는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의 조선 침략 저지에 협조해주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와의 면담은 이루어졌으나,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외교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미국에 머무르며 공부를 시작했다.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 학부 2학년에 입학하여 2년 4개월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1910년 3월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 같은 해 7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관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됐다. 당시 이승만은 국내외 기독교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미국에서 딴 박사학위가 명성을 높여주었고 하와이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
임시정부의 명칭을 영어로 'Republic of Korea'라고 정하고 자신의 대외호칭을 대통령(President)로 정하고 각국에 통보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됐음에도 1년 째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미국에서만 활동해 점차 임시정부 각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1920년 처음 상해에 나타났으나 각료들과의 갈등은 지속됐고, 1921년 5월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또 자금 문제도 불거졌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에게 자금을 걷었으나 본인의 활동비로 다수를 쓰고 임정에 돌아가는 돈은 매우 적었다. 결국 1923년부터 이승만 탄핵론이 제기됐고,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했다.
갈등을 빚던 임시정부 인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을 인사이다'라고 혹평하며 이승만을 싫어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이승만은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입국해야했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당시 미군정을 이끌고 있던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이승만에게만 라디오 방송에 나가 전 국민을 상대로 연설할 수 있는 특전을 줬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폭발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 진면목을 알아본 지식인층 국민들이 등을 돌리자 기독교세력과 한민당세력을 등에 업고 일제강점기 기득권자들을 정치 전면에 내세워 우매한 일반 국민을 선동하는 비정상적인 대한민국 초기 정치를 장악 결국 남북 합작 세력을 누르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 제헌국회 의장에 오르고 이어 대통령제를 추진 대통령에 본인이 당선된다
이후 국가보안법 반민특위 해체, 유상분배 농지개혁으로 개혁 호도 등을 주도하며 친일 잔존 기득권 세력에 자유라는 명분을 달아 힘을 실어주었으므로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대한민국은 첫 단추를 이상하게 꿰기 시작한다 다만 현재로 보았을때 한국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기치를 올린 미국을 우방으로 두어 공산화를 막았고 그 미국의 세계질서에서 살아남게 해 부강한 국가 중 하나로 크게 했다는 공적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청산 없이 친일 인사들을 고위급으로 만들어 후세들에게 영원한 갈등의 씨앗을 준 것, 독립운동가들 암살 및 서서히 독립운동가들 남한에서 지우기, 비정상적인 자유당 정권을 유지 존속 독재화하기 위해 사사오입개헌 삼일오 부정선거 등으로 개인 야욕을 위한 나라를 가지고 놀았다는것, 또 나라를 자신의 종교인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 했다는 등으로 사일구 혁명을 촉발하게 하였고 국민에 의한 대통령 강제 하야를 가져오는 등 나라를 여전히 수렁 속으로 집어넣은 과오가 많은 인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