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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6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4
설교 제목: 건축자들이 버린 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21:42
설교 목적: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금년 설교를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이다. 하늘의 뜻을 땅에 실현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목적이다. 그런 삶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삶에서 두드러진 점은 이 땅에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여김을 받았으나 그 돌이 우상을 깨뜨려 가루로 만들 그 뜨인 돌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늘의 대리인들이 이 땅에서 겪게 될 운명이며 최종적인 승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오늘 설교에서 나는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여긴 세상에서 우리도 동일한 대우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판별되는 이유는 목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인데 땅의 생각과 하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버림을 받을지라도 다니엘의 예언에 나오는 표현처럼,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공중에 뜨인 돌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는지를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설교 개요:
1.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
2. 건축자들이 버린 돌
3. 건축자들은 왜 그 돌을 버렸을까?
4. 아무도 손대지 않은 뜨인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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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
지난 주에 저는 ‘예배란 하나님 앞에 서는 경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씻은 것과 같고 하늘의 보좌를 방문한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경험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새로운 마음을 선사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그려진 청사진을 본 것과 같습니다. 그 청사진을 볼 때 예배자는 즉시 그것이 땅을 위한 하늘의 계획임을 깨닫습니다. 땅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체험,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가 갖게 되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늘을 우러르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로 들어가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찬송이며 기도 가운데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며,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노래하면서 우리는 하늘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비추어보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깨우침과 영적인 경험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계시록 1:19~20
기도하던 요한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본 것은 하늘에 그려진 청사진입니다. 그것은 판타지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보았습니다. 지금 어떤 일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하늘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것은 땅을 위한 하늘의 청사진입니다. 그 청사진은 현재의 일과 앞으로 될 일을 판타지로 그려져서 제시되었습니다. 그 환상과 계시가 판타지로 제시될 때 교회는 이 세상을 하늘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진실한 예배자들에게는 자주 경험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 앞에 서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 속에서 하늘의 청사진을 보면서 우리의 위치와 소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래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인간에게 입히신 목적은 그 형상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면서 살면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지혜를 이 세상에 나타낼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탐심과 교만이라는 우상에게 자기의 정성을 바치면 그는 이 세상에 추한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탐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대리인들이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실현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건축자들이 버린 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확신하면서 사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보살피시고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던 여인에게 찾아가셔서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전에 사람들을 피하던 은둔형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개방형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뜻을 행하신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명료하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예수님은 삼년 동안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선포하는 일이었고 사람들의 삶을 치료하여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욕심에 포로가 되어 대인관계가 엉망인 사람도 다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이 일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그 나라의 중심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한두해를 돌아볼 때, 대중국 무역이 닫히면 국내의 경제상황이 나빠집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갈등을 일으키면 다치거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돌봄을 받을 길이 좁아집니다. 사법부의 재판이 굽으면 억울한 사람이 생깁니다. 국회가 민생을 돌보지 않고 당리당략에 매몰되면 국민의 삶이 힘들어집니다. 목회자들이 재물과 명예욕에 붙들려서 기도와 목양을 게을리하면 교회는 민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교육부가 대학입시에 대한 어떤 정책을 바꾸면 수험생들과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정부와 국회, 법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개인의 삶을 바로잡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지만 그 개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결정하는 재판과 행정과 세금제도와 교육의 방향성에 긴밀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가 개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동시에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까닭도 그 둘이 매우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가정이 잘못되면 국가가 흔들립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정책과 방향성, 그리고 신뢰는 개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이라면 개인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삼년 동안 사람들을 만나시고 가르치신 후에 그들의 삶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곳,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사야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이사야 2:3).
그런데 율법이 나올 그 시온에서 지금 무엇이 나오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나와야 할 예루살렘에서 지금 무엇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성전에서 요란하게 장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불법을 용인하는 제사장들이 아니었습니까? 백성의 본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돈 때문에 성전을 더럽게 하고 백성을 바르게 지도하지 못하니 그 백성이 어떻게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의 뜻대로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만드시려고 일어서셨습니다. 그렇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시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성전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늘의 뜻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가로막기 위하여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마태복음 21:23)
예수님이 결심을 하시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셨고 담대하게 성전에서 행동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거절합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은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었는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대답도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중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분부를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따르지 않은 아들과 아버지의 분부를 싫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뉘우쳐 그 분부를 따른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세리와 창기라면, 바리새인들은 마치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큰 아들과 같다는 비유였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먼 타국에 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열매를 거두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이 그들을 때리고 죽였으며 심지어 주인의 아들마저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주인이 돌아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빗대어 말한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께서는 시편을 인용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시편 118:22~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태복음 21:42~43).
예수님처럼 하늘의 뜻을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3. 건축자들은 왜 그 돌을 버렸을까?
건축자들은 왜 그 돌을 버렸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할 사람으로 선택받은 모퉁이의 머릿돌은 불임부부 아브라함과 사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골리앗의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는 영광을 얻을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양치는 목동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다윗이 왕이 되는 후보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소년이었는지 국가는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 집을 세우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고대의 강대국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 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임무를 맡은 사람은 군대를 지휘하던 장군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몰던 모세였습니다. 그것도 80의 나이에 스스로도 적합하지 않다고 다른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시라고 기도했던 모세입니다. 그가 천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이스라엘의 목자와 교사가 되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찬양의 시를 보면, 시인은 여러가지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이 어려움 중에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의 절정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편 118:22~23)
예수님은 이 시편을 인용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나는 버림을 받고 있다! 또는 너희는 하나님이 장차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실 돌을 알아보지 못하고 버리는 건축자들과 같이 행동하고 있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재단하고 판단하여 사람들을 대하고 평가하면 동일한 실수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순전한 향유를 부어드리려고 비싼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보고 사람들은 분노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일을 다른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행위이며 또한 그 여인의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14:3~9).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가 왜 이런 소동을 일으키는가? 그는 출신적으로 중앙이 아닌 지방 벽촌이 아니던가? 그는 누구에게서 배웠으며 그의 최종 학력은 무엇이던가? 배경도 근본도 없는 사람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대는가? 정말 불쾌해!’ 아마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늘의 대리인으로 생각할 때 기억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의 대리인들은 땅의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박수치지는 않습니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비방과 욕설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대리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의 대리인들이 기억해야 할 더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4. 아무도 손대지 않은 뜨인 돌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1:44).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예루살렘은 이제 무너지고 예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그 촛대를 예루살렘에서 옮기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밝힐 등불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반석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그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신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던지신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구약성경 다니엘서 2장에서 온 것입니다.
다니엘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꿉니다. 꿈에 그가 본 것은 커다란 금 신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는 황금이며, 가슴은 은, 허리와 허벅지는 구리(놋), 그리고 다리는 철이며, 발은 철과 흙이 섞여 있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꿈에서 자기 나라의 미래를 생각할 때에 본 그 신상은 장차 자기 후대에 일어날 나라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에서 마지막 장면을 본 왕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누구에게도 그 꿈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다니엘 2:34~35).
왕이 꿈에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처럼 크고 장대한 신상이 산산조각이 나서 가루가 되어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무도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우상을 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그 돌이 우상을 깨뜨리고 가루로 만들어 흩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반대자들 앞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버림을 받은 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모퉁잇돌이 되셔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돌은 예루살렘을 가루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그 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온 세상에서 태산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이 기억해야 할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돌을 모아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또한 그 돌을 가지고 우상을 깨뜨리시고 가루로 만들어 흩으시고 그 돌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집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온 세상에 태산처럼 뻗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2장에 왕의 꿈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꿈에서 왕은 신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3장에서는 실제로 느부갓네살왕이 자신의 신상을 거대하게 만듭니다. 모든 장관들과 공직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그 신상 제막식에 참석하게 한 후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신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왕이 그들을 아껴 살리려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16~18).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왕의 신상은 우상으로서 이 세상의 나라를 뜻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나와서 그 우상을 박살내고 사방에 흩어버리게 되고 그 돌이 태산을 이루게 된다는 이 이야기는 세 젊은이들의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그 그림대로 현실이 펼쳐질 때 그들은 마음 속의 이야기를 따라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을 받고 박해와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님과 함께 우상을 깨트려 가루로 만들 것이며 장차 태산을 이룰 것입니다. 이처럼 비방과 승리를 마음 속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야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할 때 만나는 장애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사도행전 4:10~12).
예수님의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처럼 마음의 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렇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0~4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