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단의 당회는 1949년까지 열렸다. 당회는 운영 면에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의 지방회와 규모가 같은 모임이었다. 1년에 1회, 정기적으로 7, 8월중에 모임을 가졌는데,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는 한 두 번 더 모이기도 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에는 사경회(査經會)로 모여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오후에는 사무처리를 했다.
당회는 구역내 각 교회의 제직들과 희망하는 평신도들이 참여했다. 당회 소집 통보를 받으면, 각 교회에서는 교회 앞에 광고하여 참석자를 확인한 후, 당회 기간 필요한 곡물과 약간의 찬거리를 준비했다. 대개 개교회에서 10명 미만이 참가한다. 실례로 내가 소속해 있던 강경구역의 경우, 각 교회 대표는 5-60명 정도였고, 본 교회 회원들까지 합하면 150여 명에 이른다. 주최 교회는 참석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성도들의 가정에서 숙식을 마련했다. 비록 짧은 기간의 모임이지만, 참석자들은 모두 한 가족과 같이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친교를 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 때가 지금도 그립기 그지없다.
회의하는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제1문은 전 회의문 낭독이다. 제2문은 심판할 일이 있는가를 묻는다. 제3문은 그간 하나님께 복받음을 보고한다. 제4문은 전도방침에 대한 논의가 있다. 제5문은 특별사무인데, 결산보고 및 예산통과와 특별사건 등을 처리한다. 제6문은 임원 및 직원을 선정한다. 제7문은 폐회선언을 한다. 회기중에 침례식과 주의 만찬이 거행되고, 찬미공부와 다채로운 행사를 가진다.
1947년 7월 중순, 농한기를 이용하여 강경구역 당회가 열렸다. 구역장 김용해 목사의 사회로 개회가 선언되었다. 매일 열리는 사경회는 이종덕 총회장이 인도하였고, 언제나 2시간 이상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다.
회무가 끝난 뒤, 주중에 금강에서 김용해 목사의 주례로 침례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그 때 침례를 받았다. 나의 침례문답은 이미 모교회에서 전교인이 증인이 되는 가운데 마쳤고, 교회의 결의를 받았다. 침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가 받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침례와 구원은 무관하지만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믿는 자가 침례를 받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침례는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같이 죽어 장사되고 부활하여 새생명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롬 6:1-11). 침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신앙고백이며,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인정을 받는 의식이다. 따라서 침례를 받은 자에게는 교회에서 성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여 직분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침례를 하나의 의식행위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신앙으로 침례를 받아 하나님의 소명으로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