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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상에서 땅으로 드리운 그림자의 삶>의 줄거리:
이 땅은 오직 그림자로서만 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이 땅에 머물면서 삶을 리얼하게 살면 안 됩니다. 내 마음에 리얼한 세계는 오직 천상이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천상의 인자 예수님 안에 머무는 동안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으로부터 발산 되는 빛이 내 마음 때문에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내 삶입니다.
천상에서 땅으로 드리운 그림자의 삶
(사도행전 7장 8절~53절)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상에서 땅으로 드리운 그림자의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상에서 땅으로 드리운 그림자의 삶’
본문은 스데반 집사님 설교의 몸통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내용이 길기 때문에 일부분만을 읽어보았는데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이어서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된 것과 야곱이 기근을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00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하였으나 요셉을 모르는 바로가 왕으로 등극했고 이들을 노예로 삼고 고통을 주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또 이로부터 모세가 등장해서 출애굽이 이루어지고 광야에서 광야 교회가 형성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전달되었으며 지성소와 성소의 모습을 갖춘 성막이 만들어지게 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선민을 인도하는 자리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무척 중요하나 오늘은 특별히 38절에 등장하는 “광야 교회”라는 표현에 입각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 설교로부터 이어지게 되는 순교의 장면입니다.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없으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마치자 사람들은 분개하여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서 죽이고자 합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고 외치듯이 55~56절의 구절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염두에 둘 때 앞서 기록된 2절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구절의 의미 또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였다는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뒤로 이어지는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인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는 말씀과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는 말씀을 함께 연결해서 이해할 수 없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 충만하여 이러한 일들을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의 보좌와 우편에 계신 인자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큰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스데반 집사님 자신보다는 순교 사건 이후를 살아가게 될 모든 교인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 우편에 계신 인자 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은 스데반 집사님이 목숨을 바쳐서 한 설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편에 인자 예수님이 계신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을 관계함에 있어 절대적 제한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요일 설교와 어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이 내용이 중요하기에 한 번 더 강조를 드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방관하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홀로 하신 것도 아니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이 땅에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창조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이어지는 10~12절을 보면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자리에 서게 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예수님을 아들로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스데반 집사님이 하늘이 열리면서 보게 된 천상의 상황이 중요한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8절에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고 할례의 언약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 이후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선민들의 기록은 곧 할례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흔적을 몸에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실 때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임을 기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를 대할 때에도 아내에 앞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돈 문제가 있을지라도 돈 문제에 앞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위한 증표로써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는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서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언제나 보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돈 문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돈 문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돈 문제를 보게 된다면 영화로운 광채가 돈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언제나 1등으로 보여야 될 영화로운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인자이신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첫 번째 있음을 느끼는 대상이 되시고, 좋음을 확신하는 대상이 되어주십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영화로운 광채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마주볼 때 뒤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삶에는 그로 인한 그림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영화로운 광채의 대상으로 보는 동안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에게 일어난 일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 직전에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우편에 서신 인자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이 본 천상의 상황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상의 상황이야말로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느껴야 하는 유일하고 참다운 실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본래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할 대상이 아닙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 세상의 삶은 마치 게임과도 같습니다. 젊은이들이 게임에 몰입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게임 속에서의 활동을 실제로 느끼고 그로부터 좋음을 확신하게 된다면 게임은 실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직 실제 세계는 스데반 집사님이 본 보좌에 하나님과 우편에 인자 예수님이 계시는 천상의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은 언제나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을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대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내게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증거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운 하나님이 아닌 빛이 바랜 하나님을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다시 돈 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돈 문제가 생겨서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돈에 대해 영화로운 광채로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하나님을 찾을지라도 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빛이 바랜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을 백 번 천 번을 부를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이어야 하고,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은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첫 번째 대상이고 좋음의 확신에 유일한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빛바래게 하는 것은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건강이나 자녀의 형통이 있음의 대상이고 좋음의 확신이 돼버리면 아무리 하나님을 부를지라도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돈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유일하게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된다면 돈이 영광을 받는 상태입니다. 돈에서 나오는 영광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뒤로 그림자가 생겨납니다. 이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돈을 기준으로 하여 움직이게 됩니다. 자녀의 형통이 영광을 받는 상태가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자녀의 형통을 좋음의 확신으로 삼는다면 그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라는 그림자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영광의 대상을 문제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을 문제시하며 변화를 주고자 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갖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을 해나가는 것으로부터 마음의 채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무익하고 무효한 일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삶의 모습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대상을 붙잡을 때 그것이 영화로운 광채를 받는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라는 그림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림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된 마음에서 영광을 받는 대상이 변해야만 합니다. 마음의 문제를 젖혀둔 채 삶을 아무리 변화시키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변화를 추구할지라도 나에게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삶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변화는 질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가 그치지 않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생기게 하는 본래의 장소에서 영광의 대상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그 본래의 장소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우편에 인자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천상의 상황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우리 또한 바로 이 천상을 유일한 실제 세계로 느끼며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실제 세계인 천상에 마음을 둘 때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는지를 선민들의 조상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과 선지자들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모두 성령님을 통하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그림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림자가 생길 때에는 빛이라는 원인이 있습니다. 무엇을 빛으로 삼아 그림자가 생기게 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제일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고 말과 행동으로 그림자의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자의 삶이 나타나는 이유를 선민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광야 교회의 성막과 율법이었습니다.
광야는 인간의 생존조건이 전무한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곳이 사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광야로 선민들을 이끄셨고 이곳에서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을 광야나 사막처럼 여기며 사는 광야 교인이자 사막 교인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사막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육체는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쌀은 그저 땅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을 수 있는 밥이 이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야 합니다. 선민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듯이, 광야 교인은 땅에서 자란 것으로 추수해서 나온 쌀을 밥으로 만들어 먹으면서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밥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열심히 일한 수고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야 교인이라면 애초에 세상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월급을 주시는 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삶입니다. 몸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마음의 실제 세계는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인자 예수님이 계시는 천상의 상황을 의식이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마음을 실제 세계인 하늘로 보내기를 바라시며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성전의 의미는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보여주신 천상이라는 실제 세계에 우리의 마음을 보내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볼 때 이 세상은 광야가 됩니다. 부활의 자리는 세상을 빠져나간 자리입니다. 세상을 빠져나갔기에 인간 세상을 광야로 여길 수 있는 것이고,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서 부활에 자리에 이르는 것은 이 세상이 실제 세계일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마음이 느껴야 하는 실제 세계는 스데반 집사님이 보았던 천상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름으로써 그 천상을 실제 세계로 믿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붙잡고 스데반 집사님을 통하여 제시된 천상이라는 실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정확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를 당할 때 그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림자의 모양을 바꾸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이 세상의 상황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바뀌어야 되는 것은 삶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원인입니다. 마음에서 실제 세계로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이 계신 천상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영화로운 광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나는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림자는 바뀔 수 없습니다. 원인을 바꾸지 않은 채 결과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생겨날 수 없고 행복도 즐거움도 유쾌함과 상쾌함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삶의 상황은 그림자입니다. 눈에 보이든지 귀에 들리든지 손에 만져지든지 마음을 쏟아야 될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의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림자의 모양을 바꿔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쏟아야 할 일은 스데반 집사님이 보여준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와 우편에 인자 예수님이 계신 천상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하루종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천상에 머물러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를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음으로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천상에 참여한 상태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나타나는 그림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가장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이 해야 될 일은 건강해지기 위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마음이 그림자의 세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실제 세계인 천상으로 올려 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픈 몸을 잠시 미뤄두고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있음의 대상으로 느끼고, 하나님으로부터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께만 소원을 적용하는 상태가 되면 몸의 문제는 영화로운 광채가 비추어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내가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얼마나 가깝게 만나느냐에 따라 그림자의 모습 또한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할 실제 세계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예로 든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과 선지자들은 모두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만난 마음으로 이 땅을 그림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림자의 삶을 산 요셉은 이 땅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가 근동지방의 모든 사람들을 기근에서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사십 년간 광야에서 이끄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할 실제 세계는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제시된 천상이며 이 땅은 오직 그림자의 삶입니다. 오늘도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시면서 살아가실 때 삶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의 아름답고 합당한 그림자의 모양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내 의식의 전부를 드립니다. 항상 십자가를 향하여 깨어있게 하여 주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따라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실제 세계인 천상에 마음이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은 영화로운 광채에 의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