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이 있는 자리- 74
31/10/2024
in 칼럼
보랏빛 시절
나는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약속이 없는 주말이면 카메라를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사진의 주제나 목적을 미리 정하지 않은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종종 시드니 시내 중심가를 찾는다. 그곳에는 계절의 변화를 뚜렷이 느낄 수 있는 풍경들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진 찍을 소재가 참 많다. 언제부터인가 봄에는 타운홀 돌계단에 앉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다정한 연인들과 가을엔 온기를 잃은 석양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그 주변을 유난히 좋아하게 되었다.
시내 중심가는 언제나 관광객들과 근처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로 북적댄다. 사람의 물결이 휘감고 다양한 인종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가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가운데서 종종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아는 사이도 아니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알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끌리게 만드는가?
나는 지금 ‘보라색과 끌림’에 대하여 생각한다. 자카란다 그늘이 드리워진 타운홀 돌계단에 앉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입맞춤하는 연인들은, 미완성으로 끝난 젊은 날 기억을 소환한다. 그녀는 속삭였다 “빨강과 파란색이 섞이면 보라색이 된다는데….” 노력이나 의지 없이 스스로 발화한 서로에 대한 끌림은 고요했던 두 사람의 마음을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들판처럼 흔들어 놓았던 적이 있다. 언젠가부터 보라색은 성평등이나 동성애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원래 보라색은 우울과 고독의 상징이었다. 마리 로랑생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후 힘들었을 때 그리고 피카소는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보라색을 사용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어느 순간, 지하철 안에서 처음 본 그녀가 누구에게 말하면서 눈을 깜빡이는 모습, 머리를 뒤로 넘기는 손, 눈 밑에 난 작은 점 따위의 사소한 것들을 바라본 순간, 내 머릿속에선 격정적인 갈망과 행복, 고통스러운 비극까지 초래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사건의 소설을 쓴다. 멀쩡히 살아가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특정한 타인을 향해 좀처럼 채워지기 힘든 정념을 품게 된다면?
사랑 관계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저 당사자들의 끌림 속에 의존한다. 서로에 대한 선의, 그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사랑은 존속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결국 빨강과 파랑으로 각각 제 갈 길을 갔지만 오늘 여기 타운홀 계단, 로맨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자카란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보랏빛 꽃잎을 흩뿌리고 있다.
양지연 / 수필동인 ‘캥거루’에서 활동, 독일 괴테대학 박사 (생물정보학), 가톨릭 의대 연구 전임 교수 역임.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