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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따라 걷다 보니 질문이 달라졌다
생명의바다 이야기
https://youtu.be/y2tg5Ppc_fw?si=QQmPAR5tWVGGp0fP
안녕하세요. 생명의바다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어떤 책 한 권에 대한 서평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책을 읽으면서 어떤 질문을 품었고, 그 질문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새롭게 발견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그 질문을 따라 여러 책을 읽었고, 신학을 공부했고,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질문이 하나씩 더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성경은 어떻게 그 이야기를 전달했는가 하는 질문으로 관심이 확장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1. 교회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다
제가 처음 이런 질문을 본격적으로 품었던 것은 2011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는데, 기존의 교회 구조 안에서 계속 부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를 새롭게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이 프랭크 비올라의 책들이었습니다.
특히 『이교도 기독교』와 From Eternity to Here라는 책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 권은 초기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교회와 어떻게 달랐는지를 살펴보는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들을 읽으면서 두 가지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프랭크 비올라를 통해 교회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비올라가 톰 라이트를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비올라가 그렇게 존경하는 학자라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톰 라이트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2. 톰 라이트를 만나 성경의 큰 이야기를 발견하다
제가 처음 읽은 책은 Surprised by Hope, 한국어로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입니다.
원서를 사서 거의 1년 동안 천천히 읽었습니다. 나중에는 번역본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알고 있던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저는 천국을 죽은 다음에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를 그런 식으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하늘과 우리가 살아가는 땅이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고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라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라이트가 설명하는 커튼의 비유를 읽으며 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비슷한 시각적 상상력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전율을 느꼈습니다. 물론 영화와 신학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이해한 것을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휴거에 관한 설명이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었던 성경 해석이 사실은 본문의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이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읽으면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이 다섯 단계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 구조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도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을 개별적인 이야기나 교훈의 모음으로 읽기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회복하시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의 큰 이야기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3. 은혜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로
그런데 제 삶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에 실패한 이후 저는 제 신앙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은혜의 복음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폴 엘리스의 The Gospel in Ten Words를 시작으로 스티브 맥베이와 앤드류 팔리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저에게 은혜의 복음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 1월, 과거에 집사와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은혜의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열심히 전했습니다. 스티브 맥베이의 강연 녹취록을 구해 텍스트로 만들고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해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앤드류 팔리의 책들도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을 공부하고 전하면서 또 다른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좋으신 걸까?
왜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걸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이 저를 다시 하나님 나라 공부로 이끌었습니다.
톰 라이트의 책들을 다시 읽고, 김세윤·김회권·정현구가 함께 쓴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읽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제가 알고 있던 천국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서로 다른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이고, 하나님 나라는 그 은혜가 향하는 목적이며, 하나님의 경륜은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경륜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는 반응이 좋았지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하자 혼란스러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저에게는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이야기였지만, 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오랜 고민 끝에 2025년 부활절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았습니다.
4. 기독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시선을 넓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성경과 교회에 관한 책만 읽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를 읽었고,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와 『축의 시대』도 읽었습니다.
다석 유영모의 책들도 한동안 탐독했습니다. 그의 사상과 성서 해석은 저에게 새로운 질문을 안겨 주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신재식 박사의 『예수와 다윈의 동행』을 읽으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문제도 고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화론은 기독교의 신앙과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진지하게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유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변선환 교수의 후학들이 쓴 『올꾼이 선생 변선환』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저는 기독교를 인류의 역사와 문명, 다른 종교와 철학의 전통 속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다원주의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상대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면 다른 종교와 세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5. 성경은 어떻게 자기 시대의 언어로 이야기했을까?
그러던 중 올해,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성경 원문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언어와 문화, 문학적 세계를 직접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특정한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으면서도 그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데니스 맥도널드와 M. 데이비드 리트와라는 학자를 만났습니다.
맥도널드는 복음서와 고대 그리스 문학의 관계를 연구하며 문학적 모방, 즉 미메시스라는 관점으로 복음서를 살펴봅니다.
리트와는 복음서가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학적 관습과 역사서술 방식, 문화적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이야기가 되었는지를 연구합니다.
이들의 연구를 읽으면서 제가 원어 공부를 시작할 때 품었던 질문을 이미 깊이 탐구한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리트와의 How the Gospels Became History를 읽으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얼마 전 읽은 9장에서는 마태복음의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이상적인 입법자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관점을 다루었습니다.
누마나 리쿠르고스 같은 인물들이 그 예입니다.
예수는 유대인의 율법 교사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삶을 규정하는 권위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묘사를 고대 독자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입법자 이야기의 관습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성경의 기록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6. 성경은 세상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독특성을 표현했다
사실 제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창세기와 같은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읽으면서, 바벨론 포로기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새롭게 성찰하고 표현했던 과정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고대 근동 세계의 신화와 우주관, 문학적 서사를 활용하면서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표현했습니다.
주변 세계와 단절된 채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독특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종교의 각성과 발전 과정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리트와를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과정이 신약성경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복음서 역시 당시의 그리스·로마 세계가 공유하던 문학적 관습과 역사서술 방식 속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이 단순히 다른 종교나 문학을 모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자기 시대의 문화와 대화하면서도 자신이 전하려는 신앙의 독특성을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저는 보편성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 자체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미가 6장 8절의 정의와 인애와 겸손 같은 메시지와 소통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보편성은 메시지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도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특정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지만, 그 문화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대화하고 그 언어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성경 해석과 설교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7. 우리는 어떤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고 있을까?
이 지점에서 저는 제 자신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배워 온 예수의 모습은 정말 성경을 직접 읽고 발견한 예수일까요?
어쩌면 부모님과 교회학교 선생님, 목회자와 교단의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예수상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안에는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적 범주와 교리적 해석도 들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예수와 그 가르침, 그리고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특정한 시대의 신학적 범주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교리화된 예수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중요한 흐름이라는 점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결론을 그대로 따라가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 자체가 예수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복음서마다 어떤 관점과 강조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야기들이 어떤 역사적·문화적·문학적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방식 자체가 이미 교리의 틀에 갇혀 있다면, 아무리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하고 다른 종교를 포용하자고 말해도 결국 기존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는 그 시대가 던진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시 교회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질문이 달라지면 우리도 성경 앞에서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이전의 대답을 무조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의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8. 진리를 탐구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곳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가 아닐까요?
물론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은 시대와 문화의 상황 속에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이전 시대의 기준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들이대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고 오묘한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만 하는 존재라기보다, 어쩌면 가장 평범하고 쉬운 진리를 실천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의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불교의 구도와도, 노자의 도에 관한 가르침과도 소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가 집착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노자가 인위적인 욕망과 강제를 내려놓고 도의 흐름에 따르는 삶을 이야기한다면, 기독교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고유한 신앙과 사상을 존중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 단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설명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과 편견을 내려놓고, 더 참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맺으며
돌아보면 저는 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교회에 관한 책에서 시작해 성경 전체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와 은혜의 복음, 다른 종교와 철학, 고대 문학과 역사서술에 관한 책까지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메시지가 어떻게 기록되고 전달되었는지 궁금해졌고, 이제는 그 성경을 읽는 저 자신의 생각과 관점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답을 얻기도 했지만, 더 많은 질문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독서의 기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으로 여러분 앞에 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질문하고 있고, 배우고 있고, 때로는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독서와 생각의 여정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가 조금 더 참되고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