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받은 나와 하나님 중 누가 더 좋은가>의 줄거리: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절대 불변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가지게 되는 자유와 권리 의식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 사랑과 충돌합니다. 구원은 한순간도 쉼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속하는 사랑 중에는 별도로 나의 구원을 확신할 틈이 없지요.
구원받은 나와 하나님 중 누가 더 좋은가
(고린도전서 10:1~1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받은 나와 하나님 중 누가 더 좋은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받은 나와 하나님 중 누가 더 좋은가”
10장에서는 이제까지 다루어 온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론이 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국면을 안겨줍니다. 12절을 보면 낯익은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선 줄로 생각하는”이라는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어보면 “구원의 확신”입니다. 12절을 다시 풀어보자면 “그런즉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뜻이 됩니다.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 마땅히 누려야 된다고 여겨지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근거로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겨난 자유와 권리의식입니다. 이로부터 나오는 행동이 믿음과 양심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 점을 문제시해 왔습니다. 이것이 9장까지는 “믿음과 양심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0장에서는 이 초점이 뒤집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스스로 믿음의 강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대불변의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하여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믿음과 양심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스스로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렇게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본문은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며 섰다고 여기고 있는 한 반드시 멸망한다는 내용의 메시지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습니다. 줄리엣은 로미오와 로미오를 애인으로 가진 자신 중에서 누구를 더 사랑하고 좋아했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게 된 나를 좋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나 자신이 좋고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내가 좋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을 멋진 나, 구원받은 나, 훌륭한 나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자 들러리로 여길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제는 섰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 주는 증거입니다. 진짜 구원 안에 들어간 사람은 이러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구원은 마음에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욕구가 나 자신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욕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서 가고 있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의식과 욕구가 구원받은 나 자신을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로 의식과 욕구가 가야 하는 상태라면 구원받은 나를 바라볼 겨를이 없습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자에게서는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나는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보면서 나를 의식하고 나를 욕구의 대상으로 삼은 상태에서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진짜 구원받은 자로서 구원이 실행 중인 상태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말입니다. 줄리엣이 로미오를 사랑할 때 “나는 로미오와 같은 훌륭한 남자의 애인이야. 나는 로미오 같은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가진 여자야. 로미오는 오직 나만을 사랑해.”라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의식이 향하고 있었다면 한 순간도 로미오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형제를 배려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자유와 권리의 행사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지식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에서 나옴을 밝히고 있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자는 의식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고 있는 나 자신을 향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 안에서 자유와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다른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습니다. 다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본인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입니다.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사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예를 들어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 구름 아래에서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이 경험할 수 있었던 세례의식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구름 아래에서 홍해를 건넌 것은 이전의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세례와 동일한 취지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는 세상의 왕이었던 바로의 노예신분이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나옴으로써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구름 아래에서 홍해를 건넌 것은 물속에 완전히 잠겨서 죽었다가 다시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세례와 취지가 같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고 바위에서 터지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성만찬 예식에 담겨있는 취지를 앞당겨 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에 담겨있는 취지를 출애굽을 통하여 맛보고 참여했습니다. 또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터진 물을 마시면서 성만찬 예식의 의미와 취지를 앞당겨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만을 따져볼 때 6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세례의식의 취지를 경험하고 성만찬 예식에 담겨있는 의미를 앞당겨 맛본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멸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참여하는 세례와 성만찬이 절대로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그 생각에서부터 믿음이 약한 형제의 실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양심이 무뎌지는 세상을 향한 자유와 권리행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앞서 본 구약의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는 멸망 당하지 않게 조심하라. 구약성경의 예처럼 세례의 의미가 담긴 출애굽을 경험하고 성만찬의 의미가 담긴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터진 물을 마신 자들이 모조리 다 멸망했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놓고는 축복의 세상, 은혜의 세계를 상징하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여러 가지 예를 들며 설명합니다.
6절을 보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완전한 확신 속에서 악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 악은 우상숭배와 음행과 하나님을 시험함과 하나님의 종을 향한 원망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의 확신만이 있었을 뿐 어떤 조심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면 어떻게 이러한 처지가 될 수 있느냐?”라며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과 원망이 근본적으로 쌓여있었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빠지고 그로부터 음행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행이란 바알브올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의식에 포함되었던 문란한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내용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6절에서 본보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었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었음에도 다 멸망 당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구원 안에 있는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니 무슨 소리일까요?
우리에게는 항상 주어져 있는 두 가지 절대불변의 상황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시며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유일하게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유일한 좋음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내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내가 잠을 잘 때, 길을 갈 때, 가정에 있을 때 언제 어디서든지 만나게 되는 절대불변의 상황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적 체질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곧 빗나감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의식해야 하는데 사장님의 있음을 먼저 의식합니다. 건강문제를 먼저 의식합니다. 돈 문제를 먼저 의식합니다. 이러한 죄는 한 순간 저지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체질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채워지고자 욕구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라는 사실이 내게 주어진 절대불변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빗나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좋다고 여겨서 갖고 싶어 합니다. 이 또한 한 번 일어나는 범죄가 아니라 체질입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든 나의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 앞에서 내가 주권자인 양 생각하고 판단하고 주어진 상황과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이 또한 어느 한순간 일어나는 범죄가 아니라 체질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 되신다는 것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으니 나는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확신하는 동안에 두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인 죄적 체질이 간과되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일어났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고 6절에서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음행과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종을 향한 원망을 즐겨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 하고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러한 악행을 즐겨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자신들에게 존재하던 절대불변의 죄적 체질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죄적 체질이란 의식이 유일한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빗나가 다른 것의 있음을 느끼는 체질이고, 마음이 유일한 하나님의 좋음으로부터 빗나가 다른 것을 욕구하는 체질이며, 하나님의 유일한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권자가 되는 체질입니다. 이러한 죄적 체질이 남아있는 상태와 구원의 확신이 만나면 악을 즐기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신에 대해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이란 가지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자식의 형통이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과 장수가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신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 바로 우상이고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는 다른 신은 따로 있습니다. 그 신을 가지기 위해서 우상이라는 종교의 방식을 수단으로 동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구원을 확신하면서 마음에서는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을 즐겨하는 모습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구원받은 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나를 좋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식에서 끝나버리고 사랑으로 이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대신에 끊임없이 나를 의심해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불신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사랑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나를 의심하고 불신해야 되는 이유는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앞서 첫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유일한 있음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시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죄적 체질은 조금만 틈을 주면 절대불변의 상황에서 나를 빗나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 받았다.”라며 선 줄로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경계심을 가지고 나를 살펴야만 합니다. 나에게서 죄적 체질이 나타나는지 파수꾼처럼 지켜보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나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동안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는 확신을 가질 틈이 없습니다.
한편 12절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구절로부터 13절이 이어집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첫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있음이시고 하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시며 하나님께서 유일한 주권자 되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간과하고 지나치려고 하는 죄적 체질입니다. 이 죄적 체질을 바라보며 의심할 때에는 나의 악함에 좌절하고 악함을 안타까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내가 언제나 죄인 중의 괴수이며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완전히 넘어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약하다, 나는 악하다, 나는 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불신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경계해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며, 그 사람이 완전히 고꾸라지게 되는 시험 또한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근거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여 두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인 죄적 체질을 간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근거로 자유와 권리를 주장합니다. 자신의 죄적 체질을 지켜보고 의심하고 불신하는 대신에 자신이 누려야 될 자유와 권리를 행사한다면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즐겨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라는 확신으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적 체질을 간과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반드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악을 즐겨하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십자가에서 죽이시며 사랑한 여러분 자신이 좋으십니까?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에게서는 “나는 구원을 확신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겨를이 없습니다. 오직 “나는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길을 갈 때, 집에 있을 때, 밥 먹을 때, 쉴 때, 멍 때리고 있을 때 언제나 하나님께로 가고있는 중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는 중에는 구원받은 나를 좋아할 대상으로 삼을 겨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바로 의식과 욕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적 체질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 되어줍니다. 죄적 체질은 하나님의 있음을 간과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간과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뭉개버립니다. 이렇게 악한 절대불변의 죄적 체질은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죄적 체질을 묶을 수 있는 능력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죄적 체질을 묶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적 체질이 죽을 때까지 나를 경계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의심하고 불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십자가를 붙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 의식과 욕구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향하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 일이 중단되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 구원받은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이제는 됐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본인이 알든 모르든 악을 즐겨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두 번째 절대불변의 상황인 죄적 체질을 묶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만 의식과 욕구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식과 욕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상태는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틈새를 나 자신에게 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를 붙잡고 나의 죄악 된 체질을 묶어놓습니다. 오직 의식과 욕구는 하나님을 향할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됐다, 이루었다, 구원받았다, 나는 선민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악을 즐기다가 멸망 당했습니다. 이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