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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탈출, 천국 진입 숙달 코스>의 줄거리 :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고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하나님의 무지개 축복 약속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상태로 모든 교인은 참 성도가 되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배에서도 하나님이 달게 느껴지는 단계로 나가기 위해 모든 교인은 성도에게만 해당하는 환란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단맛을 알 수 있기 위해서 숙달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일상적인 세상 탈출, 천국 진입의 숙달입니다.
세상 탈출, 천국 진입 숙달 코스
(요한계시록 11:1~5)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시록 11장에는 두 증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분이 계시록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증인에 관한 이야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세상 탈출, 천국 진입 숙달 코스’라는 제목은 세상은 탈출하고 천국은 진입하는 일이 날마다 숙달하는 코스를 밟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느끼시겠습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계시록 11장은 한 마디로 난리가 납니다. 두 증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삼 일 반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니엘서 7장에서 9장까지 나오는 예언에 근거를 두고 주석들은 해석을 합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칠십 이레 중의 마지막 한 이레가 언급됩니다. 이레는 칠 일이기에 칠십 이레는 칠 일이 일흔 번 있다는 뜻입니다. 주석들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칠 년 대환난을 가리키는 것이며, 칠 년 대환란은 전 삼 년 반과 후 삼 년 반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석합니다. 또한 두 증인이 누구냐에 대해서도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논란이 심합니다.
다만 우리는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지침들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차분히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지침에서 본문을 살펴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0장 10절을 보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라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두루마리를 먹었다는 것은 두루마리의 내용이 실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두루마리에 적어놓으신 내용이 이루어질 때 내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무지개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다섯 번째 나팔 재앙과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의 반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개 축복의 약속을 받을 때 입에서는 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두게 되는 일이 일어나려면 내 마음에서 쓴맛부터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또 내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채우려는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마음에서 쓴맛이 느껴집니다. 쓴맛이 느껴진다는 것은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유일한 마음 둘 곳이 되신다는 축복, 하나님만으로 내 마음이 배부르게 된다는 축복은 듣기에는 달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죄와 저주에 찌든 체질에 의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고,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가족이나 재물이나 건강에 마음을 두고 있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또한 하나님만으로 배부르려면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강렬하게 소망해야 하는데, 내심 세상 것들이 조금만 더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고 그 생각이 유지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은 좋고 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내심 세상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쓴 상태입니다.
다만 이 상태는 그냥 방치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11장에서 이어집니다. 11장은 배에서 쓴맛이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달게 느껴지는 상태까지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1장은 단순히 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대환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지개 축복의 약속은 하나님이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고,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1장은 이 귀한 약속이 내게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내 배에서 달게 느껴지는 단계까지 도달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듯 앞장과 연관을 지어 이해한다면 추측이 난무하는 어려운 내용만은 아닙니다. 다만 본문 자체는 길지 않지만, 내용이 중요하기에 해야 할 이야기는 많습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면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할 것이고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해서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두 증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두 증인에 대한 언급은 3절부터 나옵니다만 1~2절의 내용을 살펴봄을 통해 그 정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절을 보면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이나 제단은 측량할 수 있지만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이 특이합니다. 측량이란 길이를 재는 것이지만 포괄적으로 어떤 기준을 통해 상황을 평가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보아도,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바깥에는 번제단과 안뜰과 바깥뜰이 있습니다. 이 전체를 합해서 성전이라 칭할 때는 ‘히에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나오스’는 성소와 지성소만을 가리킵니다.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하였는데 사실 성전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주후 70년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멸절되어 사라진 뒤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언급됩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곳입니다. 성전 건물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단지 이 법궤를 따로 두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법궤가 들어있는 것은,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1절은 하나님의 이름이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가를 측량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마음 둘 곳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만이 마음 채울 것이 되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쭉 사용해 왔던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면 하나님의 이름만이 내게서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내게서 가지고 싶다는 소원이 발동되는 상태입니다. 돈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내게서 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상태입니다.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건강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에 내게서 존재감과 소원을 일으키는 모든 이름들은 다 없어져야만 합니다. 설령 사장님 앞에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은 없어지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장님을 마주할 때라도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존재감을 우선적으로 느낀다면 그 순간은 사장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앞에 배우자가 있을 때 하나님보다 배우자의 존재감을 먼저 느낀다면 배우자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렇게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측량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선민입니다. 그런데 사는 동안 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고, 사장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나를 제단에서 어린 양과 함께 죽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을 측량하는 것이고, 제단을 측량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했을 때, 그런 내가 즉시즉시 잘 죽고 있는가를 측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한편 2절을 보면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성전 바깥마당이란 이방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말씀드렸듯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곳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방인의 뜰을 짓밟는 자들이란 성전이라는 울타리 전체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된다는 생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방인과 똑같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과 교인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기준에서 측량해 보면 이들은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만 부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상관도 없이 살아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건강을 소원하고 돈을 소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것을 소원합니다. 내용적으로는 돈이라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건강이라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라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가정의 형통이라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의 권내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이방인의 뜰을 짓밟는 자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마흔두 달이 언급된 것일까요? 마흔두 달은 삼 년 반입니다. 7이란 완전한 숫자로써 칠 년이란 어떤 과정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절반인 삼 년 반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과정 중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칠 년이 과정의 완결된 상황이라면 삼 년 반은 단순히 절반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아직 완성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완성을 향해가고 있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표면상으로만 성도인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이것이 거룩한 땅을 짓밟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진정한 성도들에게 환난이라는 하나의 코스가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내 마음 둘 곳이 되시고, 하나님만이 내 마음 채울 것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약속이 입에서는 달지만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마음의 배에서는 쓴맛으로 느껴집니다. 이 쓴맛이 단맛이 되려면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합니다. 이 변화의 과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 프로젝트를 실시하십니다. 두 증인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증언하고 예언하고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이 유일한 마음 둘 곳이 되시고, 하나님이 유일한 마음 채울 것이 되시는 실제 과정을 겪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환난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무지개 축복의 약속은 우리에게 실제가 됩니다. 이것은 이천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입니다.
이어서 3절을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두 증인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읽지 않은 8절을 보면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두 증인을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두 증인의 증언이란 어린 양 십자가와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대한 증인은 두 명만 아닙니다. 열두 제자도 있었고, 마가 다락방의 백이십 문도가 있었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언급되는 두 증인은 예언을 하는 선지자로 언급됩니다. 이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일까요?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30~31절을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였습니다. 별세란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 받으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로부터 별세의 증인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언급된 것입니다. 이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 속에 두 가지 내용이 들어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두 가지 내용이 무엇일까요? 이 두 가지 내용을 의인화하여 두 증인이 언급되고, 이 두 증인은 배에서 쓰게 느끼던 하나님을 달게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이유는, 모세로 상징되는 내용과 엘리야로 상징되는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선민을 이끌고 출애굽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몸이 살아있는 동안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세상 탈출의 상징이고, 엘리야는 천국 진입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와 엘리야로 상징되는 두 가지 내용이 바로 어린 양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통해서 성도들이 배에서 쓰게 느끼던 하나님을 달게 느끼는 상황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습니다.
모세로 상징되는 탈출의 내용은 십자가의 죽음을 별세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탈출하는 사건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 마음 둘 곳이고, 내 마음을 채울 것이 되신다는 말씀을 입에서는 좋게 여깁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의 체질 때문에, 마음의 배에서는 하나님을 여전히 쓰게 느낍니다. 내 마음의 배가 굶주려서 먹고 싶어 하는 대상은 내심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극복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세로 상징되는 탈출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 탈출입니다.
모세로 상징되는 탈출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라면, 엘리야로 상징되는 진입은 승천과 보좌 우편에 도달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은 모세와 엘리야로 상징되는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 내용에 대한 증언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쓰게 느끼는 단계에서 달게 느끼는 단계로 변해갈 수 있습니다. 두 내용의 증언이 없다면 이 세상 누구도 실제로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 없고, 실제로 하나님만을 소원하여 마음의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더라도 실제로 마음의 배에서 내심 원하는 것은 이 세상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관찰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내심 세상 것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세상 것으로 배부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는 ‘돈 좀 있으면 좋지.’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돈이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라고 하는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이라는 사건에 숙달해야만 합니다. 세상 탈출에 숙달해야 하고, 천국 진입에 숙달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둘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천이백육십 일은 마찬가지로 삼 년 반입니다. 앞서 성전 뜰을 짓밟는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선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방인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함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교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기간이 삼 년 반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삼 년 반 동안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과정을 통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상반된 과정의 사건이 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주변에서 두 증인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에 대한 증언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인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방인의 뜰에 머물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만을 마음 둘 곳으로 삼고, 하나님만이 마음 채울 것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겪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방인과 선민은 병존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마흔두 달과 천이백육십 일이라는 같은 기간으로 진행 중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굵은 베옷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쓰게 느껴지는 상태에서는 끊임없이 내심으로 세상 것을 소원하게 됩니다. 세상 것의 존재감에 의지하며 마음을 두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내 배에서 하나님이 쓰게 느껴지고 세상 것이 달게 느껴질 때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탈출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에 숙달한 달인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배에서도 달게 느끼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으로만 배를 채우려는 소원이 내심에서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지개 축복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마음 둘 곳이 되어주시고 하나만이 마음 채울 것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달게 느껴지는 모든 사람은 내심으로는 하나님을 쓰게 느끼며 거부하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을 탈출하여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날마다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을 먹는 숙달한 자가 되고 달인이 됩니다. 입에서나 배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기가 막히도록 달고 맛있는 분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두 증언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망시키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이라는 두 증언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하심과 보좌 우편에 이르심은 모세와 엘리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우리에게는 반복되어야 할 코스입니다. 이 코스를 반복함으로써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달인들이 될 수 없다면 결국 구원은 없습니다.
아무쪼록 내심으로 아직도 세상 것이 달고 맛있는 우리의 상태는 변해야만 합니다. 두 증인 프로젝트를 통하여 입에서나 배에서나 하나님만을 달고 맛있게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렇듯 하나님만을 맛있게 느끼는 영적 체질로 변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하나님이 배에서 쓰게 느껴지고,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럼 느꼈던 것들을 달게 느끼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늘도 회개하기에 게으르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도들을 위해 준비하신 두 증인 프로젝트에 열심히 참가하여 세상 탈출과 천국 진입의 달인들로 변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