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교지(이현보-세자시강원보덕) 敎旨(李賢甫-世子侍講院輔德) |
1526년(중종 21) 11월에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통훈대부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임명한 교지이다. 이현보는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고,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 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관작, 시호, 토지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로, 관직을 내려주는 교지를 고신(告身)이라 하고, 문무과 과거합격자에게 주는 것을 홍패(紅牌), 생원시와 진사시에 주는 교지를 백패(白牌)라 한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9.0X81.0
연대 : 15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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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교지(이현보-용양위대호군) 敎旨(李賢甫-龍驤衛大護軍) |
1528년(중종 23) 3월 3월에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절충장군 용양위대호군으로 임명한 교지이다. 이현보는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고,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관작, 시호, 토지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로, 관직을 내려주는 교지를 고신(告身)이라 하고, 문무과 과거합격자에게 주는 것을 홍패(紅牌), 생원시와 진사시에 주는 교지를 백패(白牌)라 한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51.5X87.5
연대 : 15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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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교지(이현보-지중추부사) 敎旨(李賢甫-知中樞府事) |
1543년(중종 38) 3월에 이현보(李賢甫, 1467~1555)를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로 임명한 교지이다. 이현보는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고,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관작, 시호, 토지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로, 관직을 내려주는 교지를 고신(告身)이라 하고, 문무과 과거합격자에게 주는 것을 홍패(紅牌), 생원시와 진사시에 주는 교지를 백패(白牌)라 한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48.0X84.0
연대 : 15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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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교지(이현보-홍패) 敎旨(李賢甫-紅牌) |
이현보(1467~1555)가 1498년(연산군 4) 4월에 문과시험에 병과(丙科) 20등으로 합격한 후 받은 합격증인 홍패(紅牌)이다.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이나 관작, 시호, 토지 등을 내려줄 때 쓰는 문서로, 관직을 내려주는 교지를 고신(告身)이라 하고, 문무과 과거합격자에게 주는 것을 홍패(紅牌), 생원시와 진사시에 주는 교지를 백패(白牌)라 한다. 이현보는 본관이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이고, 참찬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 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기탁자 : 영천이씨 농암종택
크기 : 96.5X75.5
연대 : 14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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