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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 적중률 높이기>의 줄거리 :
온 세상이 공유하는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한 사람이 선민입니다. 마음에서 보이는 영광의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시기 때문에 벌어지는 이탈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이탈자인 선민에게는 반드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적용하는 대상과 영역이 적절하지 못하면 실제로 특별함과 예외적임이 모두 지워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특권의식과 예외의식 적중률 높이기
(창세기 12:10~20)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 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특권의식은 많이 들어본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외의식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습니다. 예외주의라는 말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국민들이 자국을 생각할 때 전 세계의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으뜸가는 국가라고 하는 정체성 의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외주의입니다. 이것을 나 개인의 입장에 적용한다면 예외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목에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 적중률 높이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선민으로서 어떤 부분에 대해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적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민은 이탈자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한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마음에 보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 상태로 세상을 살기에 이탈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마음 상태 그 자체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민이라면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선민이 특권의식을 갖지 못하고 예외의식이 없다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의 가치체계로부터 이탈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세상이 공유하고 있는 까마귀파들의 가치체계이자 사탄의 언어에 지배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선민을 자처하면서도 특권의식이 없는 것이고 예외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잘못 적용하거나 남발하여 소모한다면 선민 됨 자체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문제 또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이 잘못 적용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선민이라면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영역으로 적용된다면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예외적이다.’라는 의식을 가질 때 어떤 부분에서 특별하고 예외적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확하지 않으면 선민 됨 자체가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온 세상이 공유하는 가치체계로부터 이탈한 선민이라면 이 세상 삶에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예외적이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선택받았음 자체가 지워집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어떤 부분에서 특별하고 예외적이라는 것일까요? 우리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이유는 세상의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동창을 만나서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나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만을 좋아할 수 있음이 선민의 특권이고 예외적인 이유입니다. 한편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특권이자 예외적인 사실이 삶에 적용될 때는 이상한 일이 나타납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을 아무것도 갖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삶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나는 선민이기 때문에 예외적일 수 있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선민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난관이나 어려움을 비롯한 문제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으로서 갖게 되는 특권의식을 적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나는 예외적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함이 선민의 특권이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 가치체계에 정복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특출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애굽의 바로에게 보냈다가 되찾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왔다. 이러한 모습은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속되는 유랑생활과 극심한 기근 속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머물지 못하고, 인간적인 처신술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애굽으로 내려가는 선택을 한다. 그 결과 아내 사라를 빼앗기게 될 뻔한 더 큰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신실하게 사랑하시고 일일이 보살피셔서 삶에 깊이 관여하고 계셨다. 그래서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로부터 아브라함을 구원해 주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큰 오해를 담고 있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낸 부끄러움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하체를 드러낸 사건은 의롭고 완전하고 동행하는 자가 하체를 드러내게 됨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롭고 완전하고 동행하는 자의 오리지날은 바로 인간으로 오실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벌거벗음은 단순히 포도주에 취해 부끄러움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해석도 하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기를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서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음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자의 관점에서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 내려갔고,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보낸 사건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상황 속에서 진정한 믿음, 오리지날 믿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 부족이나 실수로 치부한다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먹거리를 장만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믿음을 잃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한 더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들어가기 직전에 사라에게 하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11~12절을 보면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저와 동갑인 셈인데 아무리 미인이라지만 65세 여인을 왕이 탐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에 들어가기 직전에 아내를 빼앗길 것을 예견합니다.
아브라함은 9절에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라는 말대로 가나안 남방의 네게브 사막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가려고 가나안 남방에서 발을 뗀 시점에서 이미 아내 사라를 빼앗기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턱대고 가다 보니 아내 사라를 빼앗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했던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이 부분을 아브라함이 믿음을 잃은 상태에서 먹거리를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위기를 만났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아브라함은 애굽에 가면 아내 사라를 빼앗길 것을 이미 예견했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으로 갔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지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어떤 위협이 있을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0장을 보면 본문의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납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고백하기를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갈 때 사라를 버리기로 했던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사라도 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안정된 터전을 떠난다면 자기 힘으로는 아름다운 아내를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자면 본문에서 사라에게 하는 말은 이미 결정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사라를 버리겠다는 결심은 하란을 떠날 때 이미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아내를 잃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가나안 땅에 와서도 이어집니다. 어렵게 도착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닥쳤습니다. 기근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주권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근으로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너무하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셨기에 이역만리 떨어진 가본 적도 없는 낯선 땅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으로 대표되는 안정적 삶의 터전을 버리고, 여행길에서 아내 사라를 지킬 수 없음도 알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장 비옥한 땅을 예비해 주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이 곳에서 살아라. 네가 내 말을 믿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고 심지어 마음에서 아내 사라까지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내 지시를 따랐으니 이제 상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실 만한 상황입니다. 가나안 주민들이 플래카드라도 들고 아브라함을 환영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겪은 상황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아내도 지킬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겨우 도착했던 가나안 땅인데, 하나님은 그 가나안 땅을 무시무시한 기근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영광의 하나님만 보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보는 자는 눈앞에 모든 현상을 하나님에 의해서 나타난 것으로 알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는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아도 하나님이 비를 내리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가나안의 기근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이런 땅으로 나를 오게 하셨습니까? 나를 오게 하셨으면서 이런 기근으로 덮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 한 마디도 항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 하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젖과 꿀이 흐르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나안 땅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될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에 가나안 땅이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아브라함을 내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내 사라에 대한 것입니다. 기근이 덮였어도 가나안 땅에서는 적어도 아내를 잃어버릴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왕국인 애굽에 유랑민의 신세로 들어가게 된다면 도저히 아내를 지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애굽의 바로가 아브라함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아내를 마음에서 버립니다.
유랑생활과 심각한 기근이 덮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미안하고 애틋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아내는 누가 보더라도 빼앗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녀도 없고 땅도 없었습니다. 기근 때문에 먹거리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들어올 만한 대상이 있다면 아내 사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아내 사라도 담지 않기를 바라시며 애굽으로 내모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애굽으로 갑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속한 땅이 아니라 나를 마음에 담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마음에 걸리는 아내를 마음에서 버립니다. 그리고 사라는 본래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기에 애굽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말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아내를 버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가나안 땅을 버렸고 아내도 버립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상을 버리면서 하나님 아버지만을 더 많이 갖는 여정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에 이삭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버리는 여정을 끝마치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지켜내기 위해서 버리고 또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모시는 상황에서, 마음에서 아내 사라가 걸릴 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셨음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내 사라를 잃는다면 자손의 축복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아내를 지켜주시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선택받은 유일한 이탈자였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면 남편을 죽여서라도 빼앗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시대 상황일지라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유일한 이탈자로 선택하셨기에 예외적인 역사를 얼마든지 일으키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그러한 특권이나 예외적 대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대적 상식이 자기에게도 똑같이 임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보여 준 진정으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내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민으로서의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이 세상 삶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함을 통해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 비해서는 세상에서 특별하거나 예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번제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모습이자 이탈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남편을 죽여서라도 빼앗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시대상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합니다. 악한 자들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이 행하는 악행이 자기에게 미칠 수 있음에 대해서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소원을 빌고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속아서 거짓된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삶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혹은 스스로 방책을 동원해서 현재 주어진 상황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드러난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주권자 하나님께 선택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하거나 예외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브라함의 특별함이고 예외적인 모습입니다.
주권자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특별하고 예외적인 이유는 스스로 방책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볼 때 아브라함이 기근이라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애굽에 내려가는 방책을 세웠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방책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까지 남에게 넘길 생각을 하면서 먹거리를 찾아 애굽으로 내려가겠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고 하셨기에 아내를 빼앗길 것을 알면서도 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마음에 아내가 걸렸기에 아내를 버립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내가 누구냐?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다. 자손의 축복을 약속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과 하나님의 선택함에 근거하자면 나는 특권자이고 예외자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내도 지켜주실 것이고 먹을거리도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세상에 대한 특권의식이나 예외의식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전체를 믿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내 사라에 대해 끝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서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 앎을 이 세상에 대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의 이유로 삼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데 세상에서 이렇게 밖에 못살아? 내가 지금 당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구해주시지 않을 리 없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오직 하나님을 가질 수 있음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고 조금도 예외적일 것이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에 하나님은 개입하시며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을 만들어 가십니다. 애굽은 이미 제도가 정비되고 조직이 완비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 애굽의 왕실 안에까지 들어갔던 사라를 돌려주시되, 떡고물처럼 막대한 재산까지 묻혀서 나오게 하시는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 속에서의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내가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한다는 의식 속으로 매몰되고 함몰되고 집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지금 주어진 상황이 마땅치 않다.’라고 여기는 마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 대해 불평이 나온다면 세상에 대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을 갖기 때문입니다. 왜 병이 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자녀는 형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돈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승진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이 세상 삶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특권의식이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재 상황을 불평하는 삶에 대한 특권의식이나 예외의식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오직 하나님을 갖는 일을 향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 삶의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아내를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나의 특권은 오직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지는 것에 있다. 이 땅에서 나의 특권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가짐이 있다면 지금 상황이 불만일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상황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특권의식과 예외의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세상에 십자가보다 더 나쁜 자리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 삶에서는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미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잃어버려도,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어도, 아내를 잃어버릴 상황에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지금 어떤 상황이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 내게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나에게 이런 상황은 마땅치 않다. 내 외모는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무력하여 쓸모가 없다고 여겨짐이 왜 나를 피해 가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지 잘못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으로 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내게서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서나 하나님의 주권은 똑같이 임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일이 내게는 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선민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리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건과 일들과 내용으로 삶을 채워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질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세상 삶의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특출남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에서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만을 예수님 안에서 죽도록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세상 것을 좋아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할 수 있는 예외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만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어떠한 특권의식과 예외의식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불평과 원망이 섞인 태도로 맞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다는 것의 일면은 이 세상 삶에서 주어지는 어떤 상황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의 소모가 없는 것임을 깊이 새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지금 주어지는 어떤 상황도 감사함으로 받고 오직 우리의 특권의식과 예외의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