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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지 말라>의 줄거리 :
엘림에서 떠난 후에 또다시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무라시는 대신에 만나를 내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무려 40년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그냥 양식을 공급하신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민들로 하여금 삶을 대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양식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지 말라
(출애굽기 16:1~36)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본문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만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만나는 40년 광야 생활 중에 계속 공급됩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주머니를 차지 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십계명의 1계명을 연상하게 하는 제목입니다. 이 제목의 의미를 만나의 관련성 안에서 말하자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주머니를 차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의 인격적인 주머니가 되시고, 지갑이 되시고, 창고가 되시고, 계좌가 되시고, 대비책이 되십니다. 본문은 이처럼 실시간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엘림을 떠나 시내산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출애굽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입니다.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고기를 먹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불평과 원망을 증폭시키기 위한 과장된 거짓말입니다. 애굽 사람들조차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불리 먹으며 함포고복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지 않을 정도의 양식만을 보장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원망을 위해 자신들의 상황을 과장한 것입니다.
출애굽으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가지고 나온 모든 식량이 떨어지고 이스라엘은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양식이 떨어진 현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압도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의 기적을 통해 당신의 위대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식량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시고 곧바로 만나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양식이 떨어진 상황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고자 하셨기에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는 따로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만나는 40년간 계속됩니다. 한편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40년 동안 매일 저녁에 내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민수기 11장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시점은 시내산에 도달하기 전입니다. 이때 불평을 하자 메추라기를 주시고 시내산 계약이 끝나고 출발한 뒤에 다시 한번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불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고기 냄새를 지긋지긋하게 여길 정도로 한 달 동안 메추라기를 먹게 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먹거리에 대한 계획을 가르쳐주시는 중에 4절에서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을 십계명과 구약 성경에 기록된 율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와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한 것입니다. 만나와 관련된 율법이란 결국 매일의 양식에 대해 선민이 가져야 할 자세와 태도입니다. 다만 이것은 양식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에는 꼭 필요한 항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필수 항목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교육하시는 장소는 광야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힘으로는 삶을 위한 필수조건들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선민은 양식과 관련해서 실시간으로 연결된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실시간으로 하나님께 공급받아 사는 것이 선민들의 몸에 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태도가 몸에 배도록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선민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먹을 양식을 위하여 능력껏 창고에 저장해 두려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창고가 가득 찬 상태가 되기를 바라고, 미래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사는 모든 인간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본자세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대비책이 없거나 창고가 비는 것을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저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민에게 용납될 수 없는 악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만나에 관한 규정을 요약해 보자면 ‘하나님은 저장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신다.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살게 하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하루치만 거둬서 먹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침에 만나를 거두면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이 함께 모여서 먹다 보면 다 배불리 먹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이나 적게 거둔 사람이나 다 배불리 먹고, 많이 거둬도 남는 것이 없고 적게 거둬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한편 마음에 불안함이 있어서 만나를 조금 남겼다가 내일을 위해 대비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의도에서 훈련을 시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양식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닐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양식을 절대로 저축하지 말라는 것은 그날그날 살아계신 하나님이 열려있는 주머니이자, 창고이자, 대비책이자, 밑천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고가 되시기에 따로 이 세상에 창고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대비책이 되시기에 따로 이 세상 삶을 위해 대비책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나를 조금이라도 남겨서 내일을 대비하려 했으나 곧바로 썩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된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섯째 날은 예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게 하시려고 여섯째 날에는 갑절의 양을 거두어서 일곱째 날에 먹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이날에 거둔 것은 썩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면서 선민들이 양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의 의미에 대해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형통하기를 바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잘 알아서 인도해 주시기로 작정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의미는 반대입니다. 우리가 삶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모든 신경을 천국을 향해 쓸 때, 하나님께서 팔을 걷어붙이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대상은 하늘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쓸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만 신경 쓰며 살게 되기에 건성건성 삶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건성건성 삶에는 하나님의 치밀한 인도하심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이 삶의 내용이 됩니다. 본문은 건성건성 삶과 가만히 있기의 삶 속에서 양식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하나님과 리듬을 맞출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9~20절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있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만나가 하루 만에 썩는 것은 ‘양식을 절대로 저장하지 말라. 실시간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이 너희의 주머니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민은 이 세상에 쌀을 쌓아두고 창고를 짓는 자들이 아닙니다. 만석꾼이 창고에서 쌀을 꺼내먹듯이, 선민은 하나님이 매일 제공하시는 양식으로 먹고 삽니다. 자기 창고에서 쌀을 꺼내 먹는 행위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선민이 아닌 이방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제공하시는 음식을 먹음이란 할례의 의미와 상통합니다. 살에 둔 표시인 할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실시간으로 열려있는 나의 인격적 주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이 땅에 저장해 둔 것으로 꺼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만나와 관련하여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는 말씀에 담긴 기본자세이고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선민과 관련하여 정말 싫어하시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 창고에 모아둔 식량이 있고 내 지갑과 주머니와 계좌에 돈이 있어서, 적어도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는 굳이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와 관련된 율법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때마다 공급하는 주머니이자 계좌이며 창고이다. 너희는 언제까지 나를 삶의 유일한 밑천이자 대비책으로 삼기를 주저하겠느냐?’라고 묻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졸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시간으로 나의 열린 주머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시간으로 나의 대비책이 되어주시고, 하나님은 실시간으로 나의 계좌가 되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로서 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십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나의 지갑이 되시고, 주머니가 되시며, 계좌가 되시고, 밑천이 되시고, 창고가 되십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공급하시는 유일한 대비책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정하셔서 때를 따라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만나와 관련된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이것을 40년 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연결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이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쌓아두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조건 쌓아두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쓸 것을 미리 쌓아두셨기에 내가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을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는 곧 내가 죽을 그날까지 먹고 입고 쓸 것에 대해 미리 쌓아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따로 쌓아둘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선민에게만 해당합니다.
세상에서는 인생의 출발점이 다름을 두고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둔 선민이 금수저입니다. 이 세상에서 흙수저 부모를 둔 자녀들은 자기가 쓸 것을 스스로 벌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지 않은 이방인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벌고 저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흙수저입니다. 자녀들이 어머니가 때마다 밥을 차려주시는 대로 먹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쌓아두시고 때마다 공급하시는 것을 받아서 먹고 살면 됩니다. 그렇기에 선민이 영적인 금수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들은 일용할 양식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18~20절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말할까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무엇을 행할까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열려있는 나의 주머니가 되시고, 창고가 되시고, 계좌가 되시고, 밑천이 되시고, 대비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에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말할 것, 행할 것에 대해서조차 미리 저축하고 준비하고 대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실시간으로 제공해 주십니다. 먹어야 할 그때, 마셔야 할 그때, 입어야 할 그때, 말해야 할 그때, 행해야 할 그때,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살아있는 인격적 주머니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으면 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러한 말씀을 읽고 들어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도 그저 예수님의 멋진 말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전과 다르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큰 곤란이 없기에 내 주머니와 계좌에 있는 돈으로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열린 주머니이자 대비책이 되시며 공급하시는 창고가 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나 상황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더 크면 믿음이 막힙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현장에서 먹고, 마시고, 입고, 말하고, 행할 것을 공급하시는 열린 지갑이 되시고 열린 대비책이 되시며 창고가 되신다’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상황과 마주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작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원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열 가지 재앙, 홍해 도하 사건, 마라에서 쓴물이 단물로 변한 사건, 엘림의 오아시스를 경험했는데도 식량이 떨어진 상황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압도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크면 반드시 스스로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식량이 떨어졌어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크면 절대로 식량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실시간으로 열린 주머니가 되셔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때마다 공급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떨어지고 부족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하다면 대비책을 마련하고, 연구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워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교수님은 강의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선민이라면 강의를 해야 한다는 상황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해야 할 강의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설교를 준비합니다. 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비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크게 느끼면서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열린 지갑, 열린 창고, 열린 대비책이 되십니다. 해야 할 설교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십니다. 반대로 제가 목사라는 직분으로 설교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준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설교를 해야 한다는 상황의 존재감이 지금 내 옆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더 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제 지갑이나 계좌에는 당분간 먹고 살 것을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돈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돈을 다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만들어야 할까요?’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도 계좌에 돈이 있다는 상황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로 느껴지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면 계좌에 돈이 있다는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활성화되는 중에 계좌에서 돈을 빼서 쓴다면 그것이 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돈을 쓰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태도를 견지하지 못한다면 계좌에 있는 돈은 악의 근원입니다.
계좌에 있는 돈을 버릴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계좌에 돈도 있고, 하나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계좌의 돈을 꺼내면 그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 됩니다. 계좌에 돈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좌에 돈이 없는 상황보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크게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계좌에 돈이 없는 상황이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감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만큼 공급되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할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따라서 하나님의 좋음만을 구합니다. 이렇게 하늘에만 신경을 쓸 때 세상에 대해 염려할 수 없습니다. 건성건성 살면서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먹고 살게 됩니다. 입을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입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데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이고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시내산으로 가는 길에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이 상황의 존재감을 느낀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떨까요? 식량이 떨어졌다는 상황의 존재감을 느끼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처럼 지금 식량이 떨어진 상황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우는 것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 죽고 예수님의 몸을 입으면 하늘로 올라감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십자가로 키우는 과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아예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상황의 존재감은 싹부터 잘라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마음이 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물러 있다 보니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어떤 고초와 환난이 임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크게 유지되는 동안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격적인 주머니가 되시고, 계좌가 되시고, 밑천이 되시고, 창고가 되시고, 대비책이 되십니다. 그것을 알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의 존재감이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다 보면 저절로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주머니가 되신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주머니를 차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삶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고, 사람을 만나고,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마주할 때라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크다면, 나의 유일한 주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실시간으로 공급받는 선민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훈련 시키고자 하신 그 선민의 모습을 우리가 드러내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선민의 모습을 보이며 여생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며 쌓아두고, 저축하고, 대비하며, 마련하는 부담감을 갖지 않게 하시고, 나의 모든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실시간으로 공급받아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본받아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모든 상황의 존재감을 압도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