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시 낭송>
빈집들
이 인 범
그 섬 푸른 기슭 하얀 길
빨강 파랑 지붕의 길섶 빈집들
멀리서 보면 정겨운 풍경
늙은 무당의 까슬한 진한 화장처럼
승방 툇마루에 가지런히 놓인
떠나버린 스님의 흰고무신
초승달이 애써 비추고 있네
달빛 파르라니 흰고무신에 슨 빈집들
때로는 등대처럼 비장한 풍경처럼
갯벌 잃은 땡볕의 게처럼 처연하게 움츠린
빈집들, 우리는 그 섬의 흙에 바람에 이르지 못하고
그 섬 짙푸른 바다 하얀 모래톱
파도에 쓸린 빈집의 파편들
바다가 하늘이네 하늘엔 흰고무신
이인범: 2002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달빛자국』
한국작가회의 회원.
어떤 취기(醉氣)
박시영
한 권 분량의 단어를 털어 넣고
잇 사이에 끼인 씨앗을
안주 삼아 되새김 한다
정오의 방처럼 가끔씩
씨앗 몇 개가 환해질 때도 있다
언어에서 빵을 찾는 이들
이스트를 넣지 않은
바늘과 밀을 섞어 만든 빵을 원하지
바다 건너편 지도를 읽어내는 새처럼
한 생이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양파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한 때
화살 같은 단어를 키우고 싶었지
반복되는 낮의 시간들
마른 강바닥을 서성이다
빈주먹으로 돌아가고
밤새 어두운 갱도 안을 날아
희미한 빛을 안고 나오는
나방들의 날개가 눅눅히 젖어 있다
느리게 물들이며
피가 도는 저녁시간
잠행(潛行)은 유효한 존재 방식이 되고
일렁임을 타고 먼 곳으로 간다
밥에 대한 소고
김황흠
하루 삼 세끼 꼬박 꼬박 밥을 챙겨 먹던 시대가 아니다.
"아야, 쌀 떨어졌으면 쌀 가져가그랑"
어머니 말씀,
"아직 쌀이 있는디요."
언제 가져간 쌀인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냐고 어머닌
묻지 않으셨다.
"엄니는 참, 요즘 삼 세끼 안 놓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당가"
푸념인지 하는 말을 해본다.
텔레비젼 뉴스에선 쌀을 수입 전면 개방할 것이라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숟가락 든 손목이 멕아리 없다.
나는 날마다 삼 세끼를 먹어야
든든하고, 없는 힘도 쌈박하게 나오는데.
언제부터 밥 한 그릇 비우는 일이 보기 드문 일이 되었는지,
쌀은 나라의 근간이라는 말,
밥 한 끼 챙기면 그 하루 펄펄 힘난다던 말,
쌀 한 톨 한 톨에 쏟는 땀방울이 금방울이라던 말,
그 말들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쓴 건지 단 건지 모를 말들이 식은땀 흘리듯 흘러내린다.
올봄부터 등허리에 자꾸 걸리는 통증이
삼복더위에 더 지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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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흠
2008. 광주.전남 <<작가>> 신인상
2010. 제6회 농촌문학상 시 부문 수상
첫시집 초교初稿를 보다 혀를 놀림
- 전동진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딴 사람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은 몹쓸 일, 짜릿 찌릿하다. 그럴 땐 혀를 윗잇몸에 살짝 찰싹 붙여야 한다.
시도 사랑도 바람도 모든 욕망과 사유도 신목(神木)의 혀를 타고 온다. 그러니까 붓은 극단적으로 갈라놓은 섬세(纖細)의 혀라는 말이겠다.
귀소(歸巢)의 새처럼 시원(詩原)의 둥지를 향해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오를 준비만 해대는, 그러나 새는 이미 지워지고 단 한 번의 솟구침으로 치명(致命)에 닿겠다는 각오? 날개도 거죽까지 내팽개쳐버린 새! 이 흉물은 그러니까 내 몸에 달라붙어 있으나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나와는 무관하게 순간순간 시를 뿜어대는 내 가장 강직한 붓!
스무 해도 훌쩍 넘은 약속이 있었다.
……
애초에 내 몸은 시를 일구기에는
많이 척박한 밭이었던가 보다
오래 쓰고 있던 비닐집을 벗어버린
이랑의 느낌이랄까. 시도 힘들었겠지만
나도 무척 힘들었다.
그 동안 여러 세상이 내 몸에 쌓이고
그만 하면 잘 썩었다.
잠시 맡았던 새도 어느새 많이 날아가 버리고 없을 터,
다시 20년이 걸리지는 않겠다.
그때는 좀 자연스러운 시를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산문낭송>
<저학년장편동화 - 막난할미와 덜덜이> 중 일부
안오일
"거울 앞에 너무 오래 있어."
덜덜이가 쫑알대자 막난 할미는 거울을 통해 덜덜이를 보며 말했다.
"이놈아 넌 나만 감시 하냐? 너 할 일 없어?"
"난 로봇이야."
"응?"
막난 할미는 뒤돌아 덜덜이를 보았다.
"로봇은 시키는 일만 해. 내 일은 막난 할미 친구야. 친구가 돼 주는 거야."
막난 할미는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다시 거울을 보며 분을 발랐다. 분을 바르다가 거울을 통해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덜덜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덜덜이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지 마. 헷갈려."
"뭐가?"
"지금 막난 할미 설레는 마음이야. 그런데 웃으니까 헷갈리잖아."
"참 신통하기는 하네."
"어디 가는데? 나도 데려가는 거지?"
"너도?"
막난 할미는 덜덜의 말에 뒤돌아 앉았다. 저걸 데려가? 아냐 귀찮게 할 수도 있어. 골똘히 생각하는 막난 할미를 보며 덜덜이도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망설이지 말고 데려가."
순간 찔끔 놀라던 막난 할미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 가자."
"어디?"
"노인대학에서 노래자랑 해. 거기 가는 거야."
"막난 할미 대학 다녀? 공부 해?"
"하도 오라 그래서 몇 번 가고 안 갔어. 근데 노래해서 상 타면 손자들 선물하라고 상품 준대."
"손자 있어? 없다고 했잖아."
"잔 말 말아. 내가 꼭 타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나가는 거니까."
막난 할미는 시계를 보더니 급히 서둘렀다. 덜덜이가 처음 보는 꽃무늬 옷을 입고 구슬이 달린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덜덜이의 목에다 리본으로 나비 모양을 만들어 매 주었다.
"이런 촌스러운 건 나 안 해."
"사람들 많이 오니까 좀 멋있으라고 해준 건데 뭐 촌스러워?"
"나는 그냥 내 모습일 때가 가장 멋있어."
"콜라병에서 김빠지는 소리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
서둘러 도착한 대회장에는 이미 노인들이 꽉 차 있었다. 모두들 선물 타서 손자들 줄 욕심에 목을 풀며 기대에 찬 모습들이다. 한 사람 씩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노래 연습 하고 왔는지 꽤 잘 불렀다. 한 곡 씩 끝날 때마다 박수 소리가 컸다. 저것들 뭔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 잘못 하면 안 되겠는 걸? 막난 할미는 상 타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아 걱정이 많이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달걀을 한 개 깨 먹고 올 걸 그랬나? 나도 옛날에는 잘 한다는 소리 많이 들었었는데……. 막난 할미는 자기 차례가 가까워오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막난 할미 왜 그래? 심장 막 뛰는 소리 들려."
막난 할미는 덜덜을 쳐다보았다. 노인정에서 사람들이 덜덜을 보고 박수치며 막 웃었던 생각이 났다. 막난 할미의 눈이 반짝거렸다. 입가에 미소도 번졌다. 그런 막난 할미의 얼굴을 쳐다보던 덜덜이 말했다.
"막난 할미 뭔가 중요한 거 발견했다."
"맞아. 발견했어."
"뭔데?"
"덜덜아, 네가 나 좀 도와줘야겠다."
"막난 할미 지금 많이 불안해. 편안한 마음 가져."
"그러니까 날 좀 도와줘. 내가 노래 부르면 그 옆에서 춤을 춰줘. 그러면 점수를 더 줄지 몰라."
"춤? 나 춤은 못 춰. 난 다리가 짧아서 춤추는 게 잘 안 돼."
"걱정 마. 그냥 평소처럼 덜덜거리기만 하면 돼."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해. 불안해하면 내 마음 안 좋아. 난 친구니까."
"잔소리 그만 하고. 덜. 덜. 덜. 이렇게. 알았지?"
막난 할미는 덜덜덜 떠는 모습을 흉내 내며 말했다.
"친구는 믿어야 해."
덜덜은 막난 할미 손에 자기 손을 얻으며 말했다.
드디어 막난 할미 순서가 됐다. 막난 할미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덜에게 눈짓을 하자 덜덜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어났다. 앞으로 나간 막난 할미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막난 할미는 살짝 살짝 엉덩이까지 흔들어가며 노래를 했다. 앞니가 빠져서인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흥에 겨운 듯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불렀다. 막난 할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막난 할미 모습에 놀라워했다. 늘 무뚝뚝하고 장난말도 할 줄 모르던 사람이 이렇게 살랑살랑 춤까지 춰가며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옆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덜덜의 모습에 사람들은 웃움보를 터트렸다. 덜덜이는 박자에 맞춰 신나게 덜덜거렸다.
순서가 다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자 막난 할미는 긴장을 했는지 덜덜의 손을 꽉 잡았다.
"막난 할미 우리 1등은 아니어도 2등은 됐으면 좋겠다."
"쓸 데 없는 소리 마. 난 1등도 2등도 다 싫어."
"왜?"
아차상과 장려상 발표가 지나고 인기상을 발표한다고 하자 막난 할미는 덜덜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런데 인기상이 털보 영감에게로 돌아가자 막난 할미는 잡았던 덜덜의 손을 확 놔버렸다.
"문둥이 영감."
막난 할미는 인기상을 받은 털보 영감을 미워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미워하는 마음 건강에 안 좋아."
덜덜은 막난 할미가 걱정 되었는지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너 춤 확실하게 춘 거 맞아?"
"응. 나 그렇게 덜덜거려 본 적은 처음이야."
"아니야. 좀 더 멋지게 췄어야 했어. 내 노래는 완벽했거든."
막난 할미는 덜덜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2등 우수상이 발표 되고 1등 최우수상을 발표 한다고 하자 막난 할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
"응? 아직 발표 안 끝났어."
"필요 없어."
그때 막난 할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막난 할미를 사람들이 시상대 위로 떠밀었다. 막난 할미는 상패를 받고 부상으로 멋진 스탠드를 받았다. 하지만 1등 상을 받은 막난 할미의 얼굴은 단단히 심통 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