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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0년 월간 <문학세계>6월호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원래 '홀아비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연작을 계획했습니다마는 아직 2편에 머물고 있습니다.
홀아비로 살아남기 2
-변신-
밖에서 일하랴, 살림하랴, 아이들 뒷바라지하랴, 사실 마흔일곱의 홀아비로선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달랑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나로선 재혼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그래서 끊임없이 생각한 것이 변신이었다. 줄타기를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 아니 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국문과를 나오고서 건설회사에 근무한 나는 엉뚱했다.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였기에 결과적으로 국문과는 낭비로 남은 셈이잖은가. 대학시절엔 과의 특성상 어중이떠중이 모두 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열망하여 시를 끼적이거나 소설을 쓴답시고 폼을 잡지 않는 동기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나도 그 중 한 사람. 열병까지 앓진 않았다 할지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걸고 있었다. 신춘문예는 그런 문청들의 꿈의 무대가 아니었을까. 거액의 상금과 군계일학으로서의 출발. 그리하여 대학시절부터 군대시절까지 거의 매번, 몇 군데 신문사에 거듭거듭 응모하였으나 딱 한 번, 소설에서 최종심에 오른 게 최고성적. 혹시는 역시라는 한계만 확인한 채 떠나갔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정말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열망도 뜨겁지 못하고 처절한 기도도 없이 어떻게 고등고시보다 어렵다는 관문을 뚫으려고 했는지, 참 어리석고도 막연했던 시절, 그게 문학과의 끝이라면 끝이었다.
군을 제대하고 국어선생이 될 수가 있어 문학 주변에서 맴돌 기회도 있었으나 무슨 놈의 치기였던지 교직에 몸담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 아마도 하다하다 못하면 선생이라도 하리라던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 편승했던 탓이리라. 결국 여러 회사를 기웃거리다 선택된 게 건설회사 홍보실이었고 어찌어찌하여 현장 근무까지 하게 된 것인데 아내가 마흔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고 나자 내 유용한 밥벌이 수단이 된 줄타기로 연결되기에 이르렀으니. 국문학은 줄타기에서도 낭비였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선 글쓰기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 책 읽는 걸 멀리 하진 않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늦여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저절로 흐르는 날씨 속에서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들어온 어느 날이었다. 방학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추빈이 부엌을 치우고 있던 내게 가방도 벗지 않고 신발주머니를 손에 든 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빠가 하시는 일이 옥상에서 줄 내려놓고 거기에 매달려 유리창 닦는 거예요?”
추빈은 내가 줄타기를 하면서 일을 하는 줄 막연하게나마 안다. 자동차 트렁크에는 밧줄과 거기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있으니까.
“아니 몰랐어? 너 알고 있었잖아. 꼭 유리창을 닦는 건 아니지만.”
건성으로 말했다.
“알긴 아는데요, 줄 타고 쪼르르 내려오면서 일하는 줄은 몰랐어요.”
애가 무슨 얘길 하려고 이러나? 추빈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를 빼닮아 피부도 하얗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녀석의 표정이 묘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하는 줄 몰랐단 말이야?”
“네.”
추빈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기분이 더욱 이상했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에 묻은 물기를 닦고서 양손으로 추빈의 볼을 감싸들었다. 아니?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양 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신발주머니를 받아들고 녀석의 방으로 가서 가방을 벗겨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왜,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어떤 아저씨가요, 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유리창을 닦고 있었는데요, 아이들이 밑에서 줄을 잡고 장난치다가 아저씨가 벽에 부딪치고 또 유리창이 깨져서 피가 많이 나 병원차가 와서 싣고 갔어요.”
그 상황이 눈에 환히 그려졌다. 아마도 밑에서 갑자기 흔들어대니까 당황하기도 했을 거니와 그러지 마라고 야단을 치다가 아무래도 발 짚는 걸 놓쳤던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대도 벽에 발만 잘 짚고 있었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서투른 줄타기 꾼이었을 것이다. 학교 일을 하기로 했다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대비해 밑에도 사람 하나를 더 두었어야 했다. 그래야 아이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으니까.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짓궂은가?
“그래서 아빠 걱정을 하는 거야?”
추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짠해 왔다. 네 맘을 안다. 엄마가 가고 나서 이 아빠가 네게 얼마만큼 소중한 존재인가를.
“아빠가 그런 일 안했으면 좋겠어요.”
추빈의 마음은 간절했다. 아들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아무나 사업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일을 벌일 돈도 없고 너희들이 어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려야 하는 회사에 다닐 수도 없지 않느냐.
“아빠가 추빈이 마음 다 안다. 그러나 추빈아, 그런 사고는 흔치 않아. 아빠는 또 누구보다도 안전사고에 대비하면서 일하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떠들어도 그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현 시대에도 분명히 우러러보이고 선망하고 돈을 많이 벌어 아쉬울 게 없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에게서 존경까지 받는 직업이 있는 반면에, 모두가 하찮게 여기고 기피하고 싶고 힘들면서도 돈은 적어 딸린 식구 먹여 살리려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삼척동자도 다 아니까. 3D라는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어째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각종 자격시험에 붙으려 기를 쓰고 용을 쓰겠는가. 그러나 아들아, 줄타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란다.
그때부터 암암리에 변신을 꾀했다. 고민에 고민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젊은 날에 도전하다 포기했던 소설가가 되기로. 내 인생에서 국문과의 시간이 낭비가 아니었길 바라면서. 추빈이 날 일깨워준 것이라 믿고서. 그렇게 결정하기까지는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게 첫째 이유였다. 또 하나 아무리 그 시절에 포기했다손 치더라도 문학에 관심까지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을 다그쳐먹었다. 철저하게 다시 파보리라고.
이제는 시간 때우기로 건성건성 읽어가는 소설이 아니었다. 재미를 좇아 줄거리만 따라가는 책읽기도 아니었다. 문장 하나하나 분석하고 따져들었다. 대학시절에 읽었을 소설 창작 기법을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파고들고, 소설을 분석한 평론을 읽고, 최근 나오는 작품부터 근대소설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막상 습작에 들어가자 막연하고 망연하기만 했다. 젊은 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쓸 얘기도 많았고 단편 하나 쓰는데 하루면 족했다.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일기 쓰듯 거침없이 써내려가곤 했었다. 나이 탓인가? 맞춤법도 만만치 않았고 띄어쓰기마저 쉽지 않았다.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들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벽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별 도리 없었다. 다행히 버리지 않고 남아있는 대학 1학년인 딸, 수빈이의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단편소설을 있는 대로 원고지에 쓰고 최고의 문학상을 탄 작품들을 찾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베끼고 또 베꼈다. 또 유명 문학지를 정기 구독하여 꼼꼼히 읽으며 소설의 최근 흐름도 파악하려 애썼다. 마침내 어느 정도 감이 잡히자 슬픔 가득한 아내의 초상을 그리고 아득한 고향의 전설을 써 내려갔으며 세태를 반영하는 40대 실업자의 딱한 사연을 절절히 엮었다.
그러면서도 줄타기는 해야 했고 살림에 무관심할 수 없었으며 비가 오는 날이면 카페 Black & White의 김서희와 본능의 갈증도 풀어야 했다. 그러나 김서희는 그녀에겐 모욕이 될지 몰라도 정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관계이지 맘 같아선 당장 청산하고픈 여자. 나의 질투가 문제. 카페 마담이 어찌 나 혼자만의 마담일 수 있고 손님을 어디 나 하나만 바라고 장사할 수 있으랴. 내가 있어도 이 자리 저 자리를 순례해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당연할진대 나만 바라보길 원했으니……. 더군다나 사랑이라 여길 마음도 없으면서, 모두 나와 같은 특수한 관계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그녀의 행태가 싫었으니……. 그래도 내 밴댕이 속 같은 소갈머리를 보듬으며 그녀는 난 당신밖에 없어, 그랬다. 그러나 그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 달이 넘도록 발걸음을 안 하자 전화가 빗발쳤다. 하지만 계속 속 끓이느니 혼자만의 비애를 즐기리라, 디 엔드를 선택했다. 상대가 없는 섹스가 비애라면 사랑이 없는 섹스는 공허한 유희일 뿐.
‘아내의 초상’과 ‘어느 실업자의 하루’는 단편이고 고향의 모습을 그린 ‘느티나무 그늘 아래’는 중편이다. 고치고 또 고치고, 살피고 또 살폈다. 내가 맘에 들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데 어느 심사위원인들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고 감명을 받겠는가. 그들은 맨 앞, 한 장만 달랑 보고서도 소설의 수준을 가늠할 것인데……. 줄을 타면서도, 밥하고 빨래하면서도,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소설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작품을 구상하고, 누가 보면 무모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무게 있는 장편문학상을 겨냥하여 IMF시대를 살아가는 한 가장의 어처구니없는 추락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집에만 오면 컴퓨터에 매달리는 내게 수빈과 추빈은 불만을 터뜨렸다. 그 전엔 메일이나 겨우 검색하던 나였기에 음악을 듣지 못하고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별 수 없이 내 방에 중고컴퓨터를 한 대 더 들여놔야 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쓴답시고 일상을 크게 변화시킨 건 아니었다. 다만 시간상 헬스클럽을 그만 두었고 카페 Black & White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달 뿐. 건강을 챙기려 새벽에 달리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시월, 날씨가 환장하리만치 좋은 날이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내가 실리콘이 오래되어 벽체와 창틀의 벌어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들어가는 걸 막아주는 실링 작업을 해준 집, 해월아파트 3동 1704호. 고스란히 나체를 감상하고도 시치미 뚝 뗀 채 고객으로 만들었던 최수정.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녀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주방 하수구가 막혔다고, 도와줄 수 있느냐고, 수고비도 드리겠다고. 긴 머리에 마흔넷의 나이치곤 주름살이 보이지 않은 깨끗한 맨 얼굴이 돋보였던 여자.
그날은 일이 없는 날이라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적이다가 바지주머니 속에서 허벅지를 자극하는 전화기 진동에 놀라 수고비는 사양하겠다며 단숨에 달려갔다. 일하지 않는 날의 내 옷차림은 거의 양복. 양복이 어울린다는 소리를 곧잘 듣기도 하지만 스스로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의식적인 처세 방법의 하나다. 어쨌든 양복을 입고 자동차 짐칸에서 소형 하수구 뚫는 기계를 꺼내든 채 초인종을 눌렀다. 올 수 있는 핑계만 있으면 오고 싶었던, 아니 만나고 싶었던 여자. 그녀는 움직일 때마다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몸매가 다 드러나는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나를 맞으며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내기로 했었던가?
“다른 분인 줄 알았어요! 친구한테 그토록 무심해도 되는 거예요?”
“그러는 그대는 일이 터져야 전화하시나?”
그녀의 말대로 무심한 척 했다.
“어떻게 여자가 먼저 전화해요?”
“우리 나이에, 우리 처지에, 여자 남자 가리게 생겼던가요?”
“그래도 그렇지…….”
바로 저고리를 벗어 주방 탁자에 올려놓고는 소매를 걷어 붙인 채 개수대 구멍을 막고 물을 틀어 반쯤 차올랐을 때 구멍 막은 걸 빼냈다. 문제가 없으면 콸콸 소리를 내며 물이 빠져야 되지만 물결이 제자리에 맴도는 걸로 보아 거의 막혔다고 봐야 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꽤 됐어요. 그래도 한참 있으면 물이 빠지니까 불편해도 참았죠. 많이 쓰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예뻤다. 아니, 섹시했다. 샤워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물기가 남은 머리칼이 애욕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물이 빠지길 기다리느라 주방 의자에 앉아 그녀를 눈이 부시게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따라 앉았다. 그 순간에 갈급한 욕망들이 상대방을 향해 날아가지 않았을까. 탁자에 놓았던 내 저고리는 어느새 어디론가 치워졌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최수정은. 그렇지만 오후 다섯시 출근이라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김서희처럼 또 속 끓이는 게 아닐까 싶어서. 착각은 자유라고 김칫국이 생각났다. 멋쩍어졌는가.
“커피? 아니면 맥주?”
“간단히 맥주가 좋지 않나요?”
오후 2시. 그녀의 출근 시간까진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엉큼한 속셈도 작용했다.
“일 많이 하시죠? 인상이 좋으셔서 서로 일 해달라고 하겠어요?”
인상이? 하긴 요즘 웃는 연습까지 한다. 나를 좋게 봤음직한 그녀는 오징어를 구웠다. 자신감이 생겼다.
“여자가요, 남자가요?”
“여자든, 남자든.”
“별 말씀을. 밥 굶지 않을 만큼은 합니다. 지금도 다섯시에 출근합니까?”
“네.”
“도대체 그 시간에 어디로 출근하죠?”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섯시에 출근. 밤일이라면 빤하지 않은가? 카페나 술집, 마찬가지지만. 그러면서도 늑대가 되고 싶은 나의 남자. 어딘지 알게 되면 가서 수작이나 걸어보려는 얄팍한 나의 술수.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맥주를 따랐다. 두 잔에 가득.
“이상해요? 지금 술집이라 생각하시죠?”
입을 다물고 웃었다. 내 소갈머리를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천만의 말씀. 백화점이랍니다.”
역시나가 혹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의 상상력은 술집과 카페, 음식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카페의 여인이라야 딱 어울리는데 백화점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안심하는가.
“백화점인데 그렇게 늦게 출근해도 되나요?”
“24시 백화점도 모르세요? 인건비가 비싸서 알바는 낮에 쓰고 힘든 밤은 제가 한답니다.”
일테면 그녀는 백화점 한 코너의 점주, 사장이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감의 발로, 대담한 눈빛 교환이 여러 번 일어났다. 홀아비와 혼자 사는 여자로서 나눌 수 있는 도발적인 언어들도 스스럼없이 나열됐다. 의도적인 내 입에서, 그녀의 눈과 귀에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러나 노닥거리는 데도 분수가 있는 법.
개수대의 물이 다 빠졌다. 싱크대의 바닥판을 떼어내고 바닥에서 올라온 PVC관에서 개수대와 연결되는 호스를 빼낸 다음 스프링을 꽂아 스위치를 눌렀다. 전력으로 돌아가는 스프링이 2미터쯤 들어가다가 뭐에 걸린 듯 한참동안 치고 나가지 못하더니 어느 순간 쑥쑥 들어갔다. 뚫린 것이다. 그 짓을 두 번 되풀이 한 다음 모든 걸 원상태로 돌려놓고 개수대 물을 틀었다. 물은 시원스럽게 쑥쑥 빠졌다.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그녀에겐 경이로웠는가.
“어머! 어머머머! 정말 못하는 게 없으시네.”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놀랍게도 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뭉실한 젖가슴의 촉감이 등짝에서 몸부림을 쳤다. 아! 어쩔 것인가. 내 엉큼한 기대가 너무나 쉽게 그녀에 의해 일어났다. 나는 목석이 아니다. 한동안 굶주려 있었다. 예전에 창문 바깥의 실링 작업을 다 마치고 준비한 음식과 술을 마실 때 그녀는 이미 남다른 호감을 보였었다. 나도 그런 데는 도가 튼 상태라 먼저 전화를 해 만났어도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여자의 자존심상 어찌 먼저 전화를 할 수 있으랴. 그때, 서재로 꾸며놓은 그녀의 작은방에 있는 수많은 책을 보고 내가 멀어져버린 세상의 단면을 보았다. 그래서 꼭 사귀어보리라 다짐까지 했었는데. 하는 일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미리 주눅이 들고 말았던지, 우세를 당하기 싫었던지, 하여간에 선뜻 전화를 할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내가 돌아서자 그녀는 내 가슴에 그대로 있었다. 기회였다. 그녀를 껴안고 입술을 찾았다. 냉큼 그녀의 혀가 쏙 밀고 들어왔다. 이런 행운도 있는가. 혹시라도 착각하지 마시라. 이런 행운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려니…… 달콤하고 짜릿한, 그래서 흥분이 고조된 우리는 어디까지?
그녀가 날 방으로 이끌었다. 방은 침침했다. 나도 없고 너도 없이 오로지 우리만 남아 침대에 쓰러져 엉겨 붙은 채 서로를 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신은 처음 본 순간부터 남달랐어요. 이러는 나를 헤픈 여자랄까 봐 겁이 나요.”
그녀는 내 목을 핥으며 속삭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천만에요.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망설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말은 진심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행동했지만 그녀에 대한 내 머뭇거림의 실체를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 그럼 사귀는 거죠?”
“당연하죠.”
난 쉽게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최수정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황홀했다. 아내 이후 최고의 여자를 만났다는 기쁨이 용솟음쳤다. 횡재한 기분이기도 했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아내여, 용서할 수 있는가?
길고 긴 육욕의 시간이 지나고 그 집을 나올 때, 그녀는 내게 키스를 퍼부으며 현관 열쇠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언제든 환영한다고. 나를 자기가 찜했노라고.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빠른가요? 그래도 하고 싶어요. 구름에 탄 기분이 그럴까. 엘리베이터 속에서 내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최수정과 나의 새로운 정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가을의 끝 무렵, 한국의 문청들이 몸살을 앓는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때를 맞추어 더 이상 작품에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마감일이 많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단편 두 편은 신문사에 중편은 정상의 문학지 신인상에 응모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탈진한 것 마냥 다른 작품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던 탓이라고 맥이 빠진 나를 스스로 위로하면서. 어쨌든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부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12월은 초조함도 있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당선을 가정한 상상의 나래 짓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성탄절을 전후하여 당선자에게 통보된다는 심사 결과는 12월 31일이 되어도 오질 않았다.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월 1일 두 개의 신문을 편의점에서 사서 보았으나 당선자는 물론이고 심사평에도 내 이름 석 자나 작품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참담한 심정이었다. 혹시나 했던 희망은 가엾이 사라지고 역시 나는 소설가 자질이 없나 보다는 좌절감의 늪에 형편없이 침몰되어 갔다.
가소롭게도 당선 소감까지 준비하여 아이들과 같이, 나를 매료시킨 최수정과 함께 그 기쁨을 어떻게 누릴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나는 절망했다. 줄타기도 뜸한 겨울철, 아무에게도 벙어리 냉가슴을 하소연하지 못한 채 서서히 술에 빠져 들어갔다. 오전엔 으레 최수정의 집으로 출근하여 절망감을 잊기 위해 그녀의 알몸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녀가 집을 나설 때 같이 나와 그녀는 백화점으로, 나는 싸구려 술집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자연히 집안은 엉망이 되어 세탁기는 일주일이 넘도록 정지해 있고, 그렇게도 빤질빤질하던 가구들엔 먼지가 쌓이고, 내 방의 컴퓨터가 켜진 지는 언제인지 모르고, 아이들 반찬은 맨 날 똑같고, 거슴츠레한 아빠의 눈에 아이들은 침묵했다. 달리기도 멈추고 시계 바늘처럼 움직이던 나의 일상이 시계 제로가 되어 암담한 겨울잠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그때 아이들의 가슴은 갑자기 찾아온 혹독한 날씨를 대하는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냥 움츠러들었으리라.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소설가가 되겠다고? 나는 나를 냉소했다. 술에 취해 부르는 나의 노래는 처연하기만 했다. 텅 빈 세상인 것 같아, 그대가 나를 떠나던 날에, 눈물만 흘러 아무 말 없이 그냥 멍하니 시린 눈을 감아버렸어~(이룰 수 없는 사랑). 내가 만든, 내가 불러들인 슬픔이고 절망이었다.
변신이라고? 이것밖에 안 되는 내가 변신을 꿈꾼다고? 나는 내가 같잖았다. 아내가 죽어 술독에 빠졌을 땐 그나마 주변의 동정이나 받았다. 그런데…….
몸을 가눌 수가 없도록 취한 날밤 다리가 휘청거리고, 발걸음이 쉽지 않았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매섭게 바람은 불어 더욱 초라해진 늦은 시간, 비틀거리며 질질 끌던 발이 미끄러운 보도블록 조그만 틈새의 차이도 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얼굴을 사정없이 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그 순간, 눈에 불꽃이 튄 그 순간, 잘못되었구나! 절망의 심연을 절감했다. 광대뼈가 후끈거리고 입술이 얼얼하여 혀를 내밀자 앞니가 이상했다. 철렁! 날벼락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절망 보태기. 안경은 튕겨져 나가고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이 모습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무도 날 일으켜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하긴 술 취한 주정뱅이를 그 누가 동정할 것인가. 가까스로 일어나 어쩌다 들르는 노래방 출입구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계단에 앉았다. 이게 꿈인가? 꿈이라면, 제발 꿈이라면…… 그러나 빛과 어둠과 소음과 정적이 감도는 그 싸늘한 계단에 앉아 영락없이 몽둥이에 두들겨 맞은 미친개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화상이 바로 나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안경도 챙겨오지 못해 다시 밖으로 나가 형편없이 뒤틀려버린 걸 간신히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시 들어와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니 피가 묻어 나오고. 보도블록에 부딪친 광대뼈 한쪽이 무척 쓰라렸다. 다시 혀로 이빨을 더듬었지만 처음 느낌 그대로 허망하고 허전하기만. 어떡하라고, 난 어떡하라고. 아무리 내 탓일지언정 현실은 가혹했다. 두 개가 잘못된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빈인 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빈인 컴퓨터에 매달려 있을 게 뻔했다.
컴컴한 계단을 올라갔다. 한두 시간은 더 얼쩡거려야 딸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이리라. 5층까지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올라가 옥상으로 통하는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어쩐 일인지 문이 열렸다. 대부분 잠겨있는 법인데.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거세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둥근 물탱크 외에는 휑한 어둠의 공간, 막막한 하늘, 전봇대에 걸려있는 희부연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진눈깨비의 사선 행렬이 처절하여 세상의 고통이란 고통 모두 혼자 짊어진 양 허리까지 올라온 옥상 난간에 기대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보았다. 차는 씽씽 달리고 형형색색의 간판들이 내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치열한 삶의 불빛은 저토록 요란한데 어찌하여 나는 홀로 찬바람 부는 옥상에 올라왔을까. 소름이 쭉 끼쳤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이러는가. 자멸. 자멸?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그냥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이 못난 꼴을 아이들에게 보일 자신이 없으니,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이 옥상 난간에 올라 뛰어내린다면 이 추한 모습이나마 감춰질까? 번개처럼 스친 생각이었는데.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 두 병을 사서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을, 비를 맞는 상처가 난 얼굴이 쓰라리고 이빨 전체가 충격을 받아 입술이 부풀어 오른 느낌인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아무 생각을 말자. 병뚜껑을 후다닥 비틀어 까고는 병째 목구멍에 부었다, 한 병을 다. 짜르르한 슬픔이, 내 스스로 자초한 절망이 뱃속 깊이 전달되었다. 나 혼자 세상에 버려진 기분으로 무연한 옥상을 한 바퀴 돌았다. 허리 높이의 플라스틱 물통이 두 개 엎어져 있었다. 생각도 진화하게 마련인가. 그 하나를 소주 마시던 난간 옆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여길 올라가서 눈 딱 감고 뛰어내리자. 하늘나라? 천만의 말씀, 그런 건 없다. 죽으면 그걸로 끝. 천당과 지옥은 인간이 만든 가상세계일 뿐. 인간 조종을 위한 이념으로 혹은 믿음으로 인간 스스로 자위하면서 삶의 좌표로 삼고자 한 허구일 뿐.
통에 앉아 남은 한 병을 마저 깠다. 엄청난 취기가 몰려왔다. 갈 데까지 가버리자던 자포자기의 심사일지언정 마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대로 통으로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깃줄이 얽히고설키어 난맥상을 이루고 있었다. 밑은 인도, 그리고 차도. 옥상 바닥에서 밑을 보던 것보다 한결 높아보였다. 어지러웠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 이 시버럴 놈의 세상(도저히 ‘성성할 놈의 세상’이란 나만의 욕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눈을 감았다. 뛰어내리자. 이 고통의 항해를 여기서 멈추자. 왜 미련이 없을까마는 그 미련마저 무의미로 돌아갈 것이니. 나의 전부, 아이들 생각일랑 말자. 그랬는데…… 그런 다짐이 이미 아이들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수빈이가, 추빈이가 슬픈 얼굴로 다가왔다. 아빠, 아빠, 애처롭게 부르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들을 떠올린 건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내가 나를 변명키 위한 충동의 객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내게 창피했다.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병신, 쪼다, 머저리 같은 놈! 뭘 머뭇거려? 아예 뒈져버리지. 너 같은 놈, 아, 너 같은 놈이 무슨 애비라고. 가라, 가라, 제발 가버려라! 빠방-.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조롱 소리. 이제 그만, 솔직해지자, 죽고 싶지 않잖아? 그래, 이유를 만들자. 가만? 추빈이가 내일 눈썰매장을 간다고 돈을 달라고 했는데? 수빈이는? 집을 나서는 내게 뭐라더라?
“아빠, 요즘 왜 그래? 아빠답지 않게. 실연이라도 당했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까짓 신춘문예 떨어졌다고 세상이 모두 끝난 것인 양 자멸이라니? 줄타기 하면서도 잘만 살아왔지 않은가. 아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죽었는데도 잠깐 술독에 빠졌지만 그 전보다 얼마나 활기차게 살았는데? 아니, 소설가 안 되면 어때? 아니, 소설가 되는 길이 신춘문예뿐인가? 겨우 단편 두 편에 절망해서 자살이라니?
우스웠다. 장난도 아니고. 누가 나의 행동을 빤히 지켜봤다면 재미없는 코미디라 여길 게 뻔했다. 얼굴은 두문불출하면 될 것이고 이빨은 해 넣으면 될 게 아닌가. 우습다, 내가 우습다.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역시 수빈이가 금방 받았다.
“아빠?”
“그래.”
“어디? 왜 이렇게 늦으셔? 데이트?”
맑은 목소리. 아, 딸내미는 이렇게 해맑게 커 가는데 이 형편없는 꼬락서니라니.
“수빈아, 아빠가 오늘 술이 좀 취했는가 보다. 실수로 엎어졌는데 얼굴을 깎았어.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고 미리 얘기하는 거야.”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오기나 하셔.”
소주를 옥상 바닥에 부어버리고 물통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은 뒤 빈 소주병을 들고 허적허적 계단을 내려와 길가에 놓고는 집을 향하여 걸었다. 오늘 나의 행동은 소설 감도 아니잖아? 죽어버렸다 해도 그건 더욱 소설 감이 될 수 없다. 소설은 감동이어야 한다. 나의 행동은 감동은커녕 역겹기만 했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데 막 바로 문이 열렸다.
“이제 오세요!”
“어서 오셈!”
놀라고 말았다. 아들딸 두 놈이 바로 앞에 서서 나를 맞이하는 게 아닌가. 어째서 추빈이까지 자고 있지 않았단 말인가. 입을 다물고 웃어주었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둘 다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와락 안겨 들었다. 아, 토끼 같은 내 새끼들. 많이 놀랐을 것이다. 피로 얼룩졌을 얼굴을 보고.
“아빠, 왜 이렇게 됐어! 왜 갑자기 이래?”
수빈이가 울먹였다.
“아빠 괜찮다. 들어가 자거라.”
그러나 아이들은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서 들어가 자라니까?”
아이들은 둘 다 울고 있었다. 아내가 죽은 뒤 처음 보는 아이들의 눈물. 내가 왜 이리 못나빠졌을까. 아이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다니.
“아빠, 소파에 앉아봐.”
수빈이 코맹맹이 소리로 눈까지 벌겋게 되어 내 손을 끌었다. 추빈인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탁자에는 이미 약품상자가 놓여 있었다. 수빈인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내 얼굴을 닦아냈다.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아직 거울을 보지 않아 내 상판이 어느 정도 망가졌는지 감을 잡을 수 없는데 수빈이 소독약으로 눈가와 광대뼈, 입술 주변을 적시는 걸 보고 상처 난 곳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추빈인 말없이 제 누나 하는 짓을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아빠, 소설 당선 안 된 것 나 다 알아. 아빠가 열심히 한 것도 다 알고. 그렇지만 소설가 아니라도 아빠 잘해왔잖아, 안 그래?”
수빈인 속이 깊은 딸이다.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빠 힘들고 위험한 일 하는 줄도 내가 모를 것 같지만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어. 그리고 추빈이한테 얘기 다 들었었어. 추빈이 학교에서 어떤 아저씨가 줄타기하다 아이들 때문에 다쳤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아빠가 소설가 되려고 한다는 것까지. 이제 겨우 한 번 떨어졌잖아. 아빠 바보야? 신춘문예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빠가 더 잘 알잖아. 나도 그런 것쯤 다 아는데. 난 아빠가 꼭 소설가 아니라도 일하면서 책 보는 게 너무 좋았어. 다시 하면 되잖아.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속상해 해. 아빠 잘못되면 우린 어떻게 살라고.”
아빠가 잘못되면? 이 말에 내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신히 우물우물 말했다.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그리고 아빠 줄타기 하는 것 절대 위험하지 않아. 추빈이가 어린 마음에 놀라서 그렇지.”
“정말 위험하지 않아요, 아빠?”
추빈의 말에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아빠가 한번 결심한 것은 포기하지 않을란다. 소설가가 된다고 바로 생활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더 어려우면 어렵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야. 그런데도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것은 추빈이가 말해서도 그렇지만 아빠의 생활에 새로운 의미를 주려고 그랬다. 너희들은 모르지만 아빠가 젊은 날에 소설가가 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 그러나 그때는 간절함이 없었다. 지금은 달라. 아빠 나이 곧 오십이야. 엄마를 먼저 보냈고 인생에 대해서 진솔하게 얘기할 수 있는 나이야. 그런데 떨어지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하더라. 이유가 있었겠지만 솔직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 더 채워야겠지. 그런데도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술로 잊어버리려고 했다. 술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걸 빤히 알면서. 너희들에게 부끄럽구나. 하지만 설령 아빠가 소설가가 되었어도 꾸준히 좋은 글을 발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허깨비야. 생활 때문에 줄도 계속 타야 돼. 그게 몇 년이 될지 아빠도 모른다. 너희들이 보기에 위험해 보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는 않으니까 추빈이 더 이상 걱정하지 마라, 알았지?”
“네.”
“이제 아빠 들어가 주무셔. 엄마하고 행복했던 때나 기억하면서.”
수빈이 맑게 웃었다. 그러자 추빈이도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안방으로 날 이끌었다. 어느새 이부자리까지 깔아놓았다. 추빈일 안았다.
“잘 자라, 아들.”
“안녕히 주무세요.”
추빈인 제 방으로 건너갔다. 내 절망의 깊이가 최고로 깊은 날, 그 어처구니없는 절망도 끝났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 덕분에. 이렇게 산다, 나는.
다음날, 예전과 마찬가지로 새벽에 일어나 입마개와 모자를 쓰고서 중앙공원을 달리고 한동안 소홀했던 내 건강과 아이들의 아침을 챙겼다. 수빈이가 나름대로 집안청소를 해놓은 덕분에 내 일은 한결 수월했고 놀라운 것은 어느새 세탁기까지 돌려 말린 빨래를 깔끔하게 개어놓기까지 해 마음이 아프면서도 흐뭇했다.
추빈인 눈썰매장으로 친구들과 함께 떠났고 클래식에서 실용음악으로 방향 전환한 수빈인 밤새껏 컴퓨터와 키보드로 연습을 했는지라 일어나질 못해 아침을 같이 먹지 못했다.
아홉시가 넘어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부러지기만 해 갈아서 끼워 넣을 수 있어 큰돈은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고. 집에 돌아와 얼굴의 상처에 수시로 연고를 바르며 멈춰버린 작품들을 연이어 써나갔다. 의도적으로 거울은 그때까지 보지 않았다.
역시 소설은 쓰면 쓸수록 문장도 매끄러워지고 자기 나름의 문체까지 생겨나는가. 차츰 자신이 붙었다. 한바탕 내 마음의 홍역을 치르고 두문불출한 보름 동안 단편과 중편의 초고가 완성되고 장편은 700매를 넘어섰다. 최수정에게는 몸살을 핑계 삼았다. 그녀도 나의 진통을,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런 방황을 눈치 챘을 것이리라. 그래도 하루에 두 번씩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으니, 내가 그녀에 빠진 만큼 그녀도 내게 빠진 걸까.
그 사이에 난 소설가가 된 기분에 흠뻑 젖어들었다. 쓴다는 것의 행복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만든 사람, 내가 만든 성격, 내가 만든 행위에 따른 흥분과 감동. 쓰는 맛을 알게 된 나는 기뻤다. 얼굴도 깨끗이 나았고 이빨도 예전보다 더 가지런히 태어났다. 앞니 두 개 중 하나는 원래 살짝 앞으로 뻐드러졌는데 아주 고르게 된 것이다.
겨울이라 해도 아주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새로 지은 10층 건물의 창틀 실리콘을 쏴주는 작업을 맡아 줄타기 꾼 두 명을 불러 같이 처리했다. 겨울철 막노동은 하루 일하면 열흘은 먹고 산다고 내게 그 일은 차츰 줄어들기만 하던 통장의 잔고를 멈추게 했다.
2월초였다. 수빈이는 피아노를 치고 추빈인 만화책을 보고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 음악이 울렸다. 쇼팽의 야상곡.
“송한영 선생님이시죠?”
저음의 남자 목소리. 내게 사장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있어도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습니다. 어디십니까?”
“아,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우주문학입니다.”
아! 축하란다. 전율이 일더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우주문학은 4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잡지다.
“저희 우주문학에 중편소설 느티나무 그늘 아래를 응모하셨죠?”
“그렇습니다.”
벌렁거리던 내 가슴은 이제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 작품이 신인상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3월호에 나갈 예정이니 당선소감과 저자 약력, 사진을 이메일로 빠른 시일 내에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벌써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손짓으로 부르고 있었다. 저쪽에서 얘기할 때 입모양으로 당선이라 외치며.
“정말 고맙습니다. 먼저 메일을 보내고 조만간에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아, 송한영 선생?”
“네, 접니다.”
“예, 저는 편집국장입니다. 이번에 아주 논란이 많았습니다. 월간지 지면 사정상 중편을 뽑는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어요. 그렇지만 작품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작을 낸 겁니다. 송 선생께서 참고로 하시어 기쁨이 더하시길 바라는 뜻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며칠 내로 꼭 찾아뵙겠습니다.”
편집국장은 상당히 유명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않은, 이미 포기했던 문학지 신인상 당선 통보 전화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아이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아이들은 팔딱팔딱 뛰다가 내게 달려들었다. 너희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희들에겐 내가 갖는 의미보다 엄청났구나. 미안하다, 너무 못난 모습을 보여서. 암담했던 날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상 끝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절망했던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의 소설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인 셈이었다.
“아빠, 문학지에도 냈었어?”
“그래.”
“그런데 그걸 못 참고 방황하고 그래?”
“거기에 떨어지니까 이것도 당연히 떨어질 걸로 봤지.”
“상금도 있어요?”
추빈이 자못 상기되어 물었다.
“물론 있지.”
“아빠 그럼 당선 기념으로 우리 점심 때 통닭파티 해요.”
그래그래. 나보다도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수빈이의 피아노 소리는 더욱 경쾌했고 덩달아 눈으로 읽던 추빈인 목청껏 소리 내어 만화책을 실감나게 읽었다. 나는 차분하게 전화기 앞에 앉아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나의 변신을 통보하고 아내와 절친했던 몇몇 지인들에게도 소설가 탄생을 알렸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며 언제 그렇게 준비를 했느냐고 놀라워했다. 당선소감을 썼다.
<난소암을 앓았던 아내. 5년의 투병은 처절했다. 의사의 치료가 시작될수록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고통의 흔적이 추하게 온몸에 퍼졌다. 가망이 없었다. 그새 나는 미쳐 있었다. 그래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의사. 그러나 그는 끝내 두 손을 들었고, 아내는 눈부신 5월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의사는 오늘도 새로운 환자를 만난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우리가 그 실패한 의사를 찾아간다. 감동을 만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답답한 현실이다.
나는 나 혼자만의 의식을 치렀다. 모두가 비난해마지 않는. 나의 기도는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비탄을 동반한, 가는 이와 남는 이가 오열하고 자지러지는, 네가 가면 나도 따라 죽으리라는,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가는 게 낫다는 남는 자들의 이기에서 오는 동정을 받고 떠나는 게 아니었다.
나의 문학도 마찬가지리라. 늦은 나이라고 우려하지 마시라. 그만큼 준비기간이 길었을 뿐.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땅한 작품을 뽑으셨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당선의 영광은 순전히 아내의 몫입니다.>
그리고 책장 앞에서 찍은 사진과 약력을 그날 중으로 보내버렸다.
2월의 일상은 신명이 나 있었다. 달리기도 즐거웠고 일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으며 최수정과의 만남에도 열정과 진실이 묻어났다. 어떤 면에서 난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줄타기 꾼 소설가.
느닷없이 선을 보란다. 언제까지 혼자 살 거냐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라면서 친구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설가와 중학교 국어선생이 어울릴 것 같다며. 3년 전에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처녀장가 가지 못할 바엔 이혼한 여자보다 사별한 여자가 더 좋다고. 웃겼다. 처녀에게 장가갈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내가 아직 소설가라는 걸 실감치도 못하는데,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선을 보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사양했다. 지금 당장 결혼할 맘도 없거니와 내 빈약한 가정경제를 이유로 들었다. 걱정하지 마란다. 오빠에게 이익이 됐으면 됐지 손해가 갈 여자는 아니라고. 한사코 만나볼 것을 강요했다. 정말 괜찮은 여자고 경제력도 충분하다고. 지금 당장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고. 친구처럼 사귀어보라고. 그러다 보니 내가 흔들렸다. 서로 느낌이 좋아서 친구처럼 사귀다가, 서서히 애인처럼 지내다가, 헤어질 수 없는 부부처럼 행세하다, 내 아들이 대학에 갔을 때 합칠 수 있는 여자, 그런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네 성의를 보고 만나는 거다? 송내역 앞 카페에서 만났다. 어쨌거나 도둑놈심보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하마였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돼지였다.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돼지와 친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나는 여자를 볼 때 얼굴부터 본다. 예쁜가 안 예쁜가. 그리고 그 인상이 좋은가 안 좋은가. 그런 다음 느낌을 살핀다. 예쁘지 않으면 앉아서 얘기하기도 싫다. 여자의 과거는 모두 용서할 수 있어도 얼굴 안 예쁜 건 용서가 안 된다는 실패한 어느 천재화가의 말에 공감한 나였다. 그런 나의 여자관이 설령 비난받을지라도 별 수가 없다. 맘에 없는 걸 어찌하랴. 소개한 친구 동생에게 만나자마자 솔직히 말했다. 인연이 아니라고. 인연은 억지로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라고. 나의 인연은 내가 알아본다고. 일찌감치 카페를 나와 버렸다. 은근히 최수정에게 미안했다. 만약에 국어선생이 그녀보다 예뻤더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야비해질 게 뻔했다. 이런 나는 저주받을 지어다, 내 안에 깃든 속물이여.
드디어 책이 나왔다. 일부러 서점에서 그 문학지를 10권이나 샀다. 추빈인 중학교에 들어갔다. 첫날 교복을 입고 등교하면서 내게 물었다.
“아빠, 아빠 것 소설 나온 잡지 한 권 제가 가져가면 안 돼요?”
“뭐 하려고?”
“저희 담임선생님 드리려고요.”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소설가 아빠를 내심 자랑하고 싶었던가.
“그러렴.”
수빈이도 한 권을 가져갔다. 남자친구에게 자랑하겠노라며. 나의 변신은 아이들의 바람이었구나. 그날 반을 배정받은 추빈이는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걸 내게 보여주었다. 아빠가 써야 하는 거라며. 거기에 아빠의 직업란이 있었다. 주저할 것도 없이 소설가라 썼다.
바람은 날로 성질을 달리하여 내게 다가왔다. 따뜻하게, 아주 따뜻하게. 변신은 성공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그 변신이 정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최수정이 한다는 백화점 코너를 책 한 권을 가지고 처음으로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소설가가 된 걸 아직 모른다. 3층 아동복코너. 손님이 셋. 주변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날 먼저 발견했다. 아파트에서 보던 것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손짓한다. 들어오라고, 어서 빨리 들어오라고. 멋쩍었지만 성화의 몸짓에 못이기는 척 들어갔다. 그녀는 의자를 권하고 조금만 기다리란다. 한보따리 물건을 산 손님들이 나가고.
“너무 뜻밖이에요, 자기가 여길 다 오다니?”
“전해줄 게 있어서……”
“뭔데요?”
“선물.”
책을 내밀었다. 그녀는 독서광이다.
“책이네? 웬 문학지? 내가 문학소녀였다는 것도 아셨어요?”
그녀는 표지를 꼼꼼히 살피더니 박스로 되어있는 신인문학상 당선자 명단을 보았는지 나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곤 목차를 보고 내 작품이 실린 페이지를 서둘러 펼치더니 사진과 이력, 당선소감을 보고 나서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와락 달려들어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축하해요. 당신은 뭔가 달라도 달랐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근사한데 난 어쩌지?”
“왜?”
“소설가로 유명해지면 당신이 파랑새처럼 날아가 버릴까봐서.”
그럴지도 모른다. 소설가로 유명해져서 파랑새처럼 날아가 버리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사이가 나와 아이들 간 행복의 걸림돌이 될 때, 지금은 서로의 간절함으로 육체를 먼저 알아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지만 차츰 장점보다 결함이 발견되고 그게 더 크게 느껴질 때 나도, 너도 파랑새가 될지 모른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그럼 우리 애인 사이도 건너뛰고 서로 헤어질 수 없는 부부 사이가 되면 안 될까요?”
“내 아들은 아직 중학교 1학년이야. 빨리 먹는 밥이 체해.”
“어휴, 이 에고이스트. 그런데 자기 정말 당선소감 멋지다. 벌써 소설가로서 자격이 흘러넘쳐요. 나도 국문과 출신이라 어느 정도 알 만큼은 알아요.”
어쩐지. 그렇지만 당선소감 멋지게 쓴 친구치고 잘나가는 소설가 없다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어쩐 일이에요!”
그렇게 묻는 그녀의 눈을 따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점잖게 생긴 신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심상치 않아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냥 앉아계세요, 송 선생님. 이 분은 저의 옛 남편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있을까. 자리를 비켜줬다.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나는 이런 장면이 싫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그 신사 앞에서 죄인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옛이라니? 나는 아직도 엄연히 당신 남편이야.”
“왜 이렇게 쩨쩨하게 구세요? 우린 별거할 때부터 남남이 됐어요.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한사코 도장을 안 찍는 거죠? 내가 돌아갈 거라고는 꿈도 꾸지 말아요. 난 이 분을 사랑해요.”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그녀가 말한 이 분은 나였다. 그렇다고 사람 무안하게 대놓고 얘길 하다니, 너무 당돌해 보였다.
“작은 애가 많이 아파.”
그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며 내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비위가 상했다.
“뭐라고요! 어떻게요?”
파르르 떨리는 최수정의 놀란 숨결에 슬그머니 아동복코너를 나왔다. 내가 잘못했소. 이렇게 빌 테니, 제발……. 그 신사의 처연한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 발걸음을 빨리해서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뭣인가 잘못 되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 그 미묘한 갈등 관계. 최수정과 그 신사가 내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나는 어떻게 결말을 맺을 것인가. 그 아이는 언제부터 어디가 어떻게 아프단 말인가. 어렵다. 거기에 끼어든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게 가장 어렵다.
어쨌든 나는 변신에 성공하여 소설가가 되었다. 아들이 원하는. 내 쓰는 것에 따라 줄타기를 단기간에 끝낼지도 모르는. 그러나 걱정이 앞선다. 무늬만 소설가일지 몰라서. 하지만 모든 문학행위가 감동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기 전에 그 주체인 내가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안다. 끝(11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