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포왜관 시절부터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에서 목욕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1898년 드디어 일본 영사가 우리 조정의 궁내부와 직접 교섭을 벌여 동래온천탕 일부와 부속건물을 10년 계약으로 일본거류민단이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임시경영권에서 차용권을 얻게 된 일본인들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동래온천 침투에 나섰다. 일본인 전용 목욕탕을 겸한 여관을 짓고 도요타 후쿠타로는 별장도 지었다. 1915년 10월이면 부산진과 동래 간에 전차가 운행되고, 전기가 가설되면서 동래온천장은 활기를 띠고 흥청거리기 시작한다. 일본인 거주자도 늘어났다.
동래기생, 권번에서 엄격한 교육
판소리, 단가, 가야금, 승무 익혀
매월 대회 열어 우열 가리기도
3·1운동 투옥 학생 유학비 지원
보육원에 재산 기부 후 봉사하기도
천한 신분으로 차별 받았지만
예와 기, 지조 지킨 예인으로 기억을따라서 동래 기생도 바빠졌다. 이들은 요정의 부름에 따라 주연에 나갔다. 동래 기생들은 행실이 좋지 못하다든가, 손님 앞에서 몸가짐을 소홀히 하여 실수를 범하거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일이 발견되면 당장 행수기생이나 호장(戶長: 조합의 기생을 관리하고 배정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엄한 벌을 받아야 했다. 심한 경우 조합 명단에서 빠져 쫓겨나기도 하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누구나 매일 정한 시간에 권번으로 출근하여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정해진 시간만큼 교육을 받아야 했다. 오늘은 판소리 한마당, 내일은 단가, 모레는 가야금, 다음 날은 승무로 이어지는 교육은 엄격했다. 성적이 지나치게 나쁘거나 출석률이 낮으면 손님방에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매월 한 번 권번 소속 전 기생들의 기예대회를 열었다. 요즈음 학교의 월말고사 같은 성격의 각종 예능 실기시험이었다. 그들이 지닌 기예의 정도나 자질에 따라 알게 모르게 우등생과 열등생 등급이 매겨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런 등급들이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어 불렸다.
택시가 등장하면서 동래 권번 기생들은 택시로 출퇴근했다. 동래에서 온천장까지 80전이었는데, 당시 부산역에서 온천장까지 왕복 전차요금이 25전이었고, 왕복 버스요금은 1원이었으며, 막일꾼 하루 품삯이 1원 5전이었다.
동래 기생들의 지조는 대단하였다. 일급명기 연홍(蓮紅)은 애써 저축해 둔 돈으로 동래고보(현 동래고) 삼일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학생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귀국하여 대학교수가 되게 했다. 연홍은 성공한 교수가 아무리 찾아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나머지 재산도 기부하여 복지재단을 만들어 보육원에서 부모 잃은 아이들을 거두다가 조용히 숨졌다.
동래교방 행수기생 출신으로 기생조합 창설의 주인공이었던 한동년은 선교를 목적으로 권번을 찾아온 김만일 목사를 만나면서 크게 감화를 받아 용호동 나환자들을 방문하고 보육원 봉사를 함께하면서 자신보다 더 깊은 불행에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알뜰하게 모아둔 많은 재산을 이곳에 기부하고 자신은 보모가 되었다.
호산장이란 요정을 경영했던 이연숙은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과 더불어 부산에서 BBS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켜 청소년선도운동에 앞장선 깬 여인이었다. 동래학춤 구음으로 잘 알려진 유금선은 마지막 동래기생으로 춤·소리·가야금·드럼·기타 등 연주에 빼어난 예인 중 예인이었다.
비록 명분을 중히 여겼던 조선 후기 8천(賤)으로 멸시와 차별을 받기도 했으나, 동래기생들은 스스로 가꾸고 예와 기를 닦아 그들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로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