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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도차제 스크랩 재가불자교육의 체계화를 위한 시론
보타(dsw) 추천 0 조회 51 17.01.16 1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재가불자교육의 체계화를 위한 시론

 

경주 동국대 불교학과 김성철

 

 

 

차례

 

1. 들어가는 말

2. 불교적 세계관, 우주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3. 불교신행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4. 연령에 따라 차별화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5. 출가자와 세속을 매개하는 전문 인력이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6. 참회기도법이 새롭게 개발되어 적극 보급되어야 한다.

7.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1999년에 발표되었던 박선영의 논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불과 5~6년 전만 해도 재가불자의 교육에 대해 조계종단이 거의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계종의 경우 그 동안 종단적 차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전연 무관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가불자의 질 관리를 위한 교육을 등한시해온 것이다. … 최근에 조계종을 위시하여 각 사원이나 교당에서 불교교양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학교의 명칭과 같이 불교적 교양, 그것도 주로 인지적 차원의 것에 머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속된 각 사찰에 따라 교육내용이 각양각색이다. … 법계나 재가불자의 위계와 연계하여 교육과정이 구안되어 제도화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과 실천의 측면에서 전문적인 연구가 조속하게 착수되어야 할 것이다.1)

 

사실 1994년 개혁종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재가자는커녕 출가자를 위한 통일된 교육제도조차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종단 집행부에서 재가자의 교육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출가자를 위한 교육제도는 거의 정착단계에 와 있다. 출가 후 구족계를 받기까지의 의무교육과정이 원만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구족계 수계 이후 품계의 상승을 위한 승가고시 제도 역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렇게 출가자를 위한 교육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는 모습을 보이자 조계종단은 재가자교육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상기한 논문이 발표된 이듬해인 2000년 초두에 재가불자 교육을 위한 신도교육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 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불교입문■■2), ■■불교교리■■3), ■■불교의 이해와 신행■■4) 등 통일적 교재가 개발되었다. 그 후 이들 교재에 의거하여 재가불자를 교육하는 사찰이나 포교당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최근 들어 ‘대학생을 위한 불교강좌’를 기획하는 등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재가불자교육이 이제 태동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기독교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을 의미한다는 ‘한미준’이라는 기독교지도자 모임에서는, 2004년 7~8월 사이에 18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종교인구 통계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불교가 26.7%, 개신교 21.6%, 천주교 8.2%, 기타 0.6% 순으로 불교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동 단체에서 1998년에 실시했던 조사결과와 비교할 때 불교 인구는 3.2%가 증가하여 가장 큰 폭의 증가율을 보인 반면 개신교는 0.9%, 천주교는 0.7% 증가하는 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5)

 

우리나라의 불교가 이렇게 기독교계 종교 둘을 합한 신도 수와 맞먹는 신도를 가졌음에도 우리는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이는 정기적으로 종교집회에 참석하는 빈도, 시주금이나 헌금의 빈도와 양, 매일 매일의 삶에서 신행이 차지하는 비중 등에서 불교인이 타종교인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한미준’이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종교기관에 기부하는 시주금이나 헌금의 경우 개신교인은 월평균 125,000원, 천주교인은 59,700원인 반면 불교신자는 31,400원으로 가장 적었으며, 종교성전을 읽는 시간의 평균치를 일주일단위로 비교할 때 개신교인은 62분, 천주교인은 30분인 반면 불교인은 19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6) 또 최근 경상북도에서 시행한 종교인구통계조사에서 종교가 있다고 응답한 절반 정도의 사람 가운데 불교인이 67.4%, 개신교인이 19.4%, 천주교인이 9.5%로 불교인구가 단연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종교활동참석 빈도를 보면 개신교 신도의 84.4%가 매주 1회 이상 참여한다고 답한 반면 불교 신도의 경우 67.8%가 1년에 1~2회만 참석한다고 답했다고 한다.7)

 

물론 종교집회에 참석하는 횟수, 헌금이나 시주금의 양 등 외형적인 종교 활동이 결코 개개인의 종교적 깊이를 재는 잣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배타적 성격의 도그마를 갖는 종교가 조직화 되고 세력화 하는 것이 사회 통합의 측면에서 반드시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불교신도들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외형적 종교 활동이 활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신념체계’도 체계적으로 교육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종교인구통계조사’ 설문지의 ‘불교’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기에 불교신도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불교적 신행 활동에 적극 참여한 적도 없고, 불교적 신념체계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을 진정한 불자라고 부르기 힘들 것이다. 불교인 중에는 소위 ‘무늬만 불자’인 사람이 적지 않다.

 

1994년 개혁종단 출범 이후 1995년부터 조계종에서는 ‘신도등록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 후 9년이 지난 2004년 8월 집계한 결과 조계종도로 등록한 사람이 약 31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1000만이 넘는 불교신도 가운데 불과 약 3%만 조계종 신도카드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넣고 1만원의 신도교무금8)을 냈다는 말이다. 또, 신도등록사업 시작 이후 4년이 지난 1998년 당시 조계종 신도로 등록한 사람이 약 13만 명 정도였는데 ‘1년에 1만원’에 불과한 신도교무금을 이듬해에 재 납부 한 사람은 그 중 1/6도 안되는 2만 명에 그쳤다고 한다.9) 신도등록제도에 대한 홍보가 부족했고 신도교무금을 기꺼이 납부케 하는 동기부여가 제대로 고안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를 시행한 것이 저조한 신도등록율과 교무금납부율의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달리 해석하면, 우리나라 최대 종단인 조계종 산하의 사찰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적극적으로 신행활동을 하는 불자의 비율이 통계적 불교인구 전체의 3%를 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우리의 주먹구구식 직감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신도를 가진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인의 활동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적으로는 최대이나 그 구성원들의 종교 활동의 질은 다른 종교에 크게 못 미친다. 법보신문의 새해인터뷰10)에서 “앞으로 ‘핵심신도’ 100만 명을 양성하겠다”고 공표한 조계종 포교원장 스님의 포부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슴에 와 닿는다.

 

서구문화가 유입되기 전에 우리민족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무속이 혼재된 종교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만 초파일에는 절에 가고 힘들거나 아쉬운 일이 있으면 산신각에서 기도를 하든지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 그러나 서구적 종교관과 함께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종교와 종교 간에 진한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종교인구통계조사를 실시하는 행위’ 자체에는 ‘네 종교와 나의 종교는 전혀 다르다’고 선을 긋는 서구적 종교관이 짙게 배어 있다. 이 역시 우리가 앞으로 문제 삼고 우리사회의 모든 종교인들과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어쨌든 6.25이후 미국의 정치권력과 경제적 지원을 배경으로 ‘배타적 성향의 개신교’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유교’는 ‘구습’이라는 누명(陋名)과 함께 ‘내세관이 없다’는 이유로 종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했고, ‘무속’은 ‘미신’이라는 오명(汚名)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면서 거의 전멸하였기에 종교인구통계조사에 응하는 사람이 ‘유교’나 ‘무속’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 왠지 어색한 일로 되고 말았다. 불교가 자신의 종교라고 말한 사람들 중의 대다수가 원래 복합적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 소속된 사람’과 같이 불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자로 만드는 양적 포교보다 시급한 것은 자신의 종교를 ‘불교’라고 말하는 현재의 1000만 불자들을 진정한 불자로 교육해 내는 질적 포교일 것이다. 진정한 불자란 ‘불교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추고 일거수일투족을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면 1000만 불자 모두를 진정한 불자로 만들어내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 것인가?

 

2. 불교의 세계관, 우주론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재가불자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교육하는 일이다.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그 어떤 신념체계와 부딪혀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체계에 대한 확고부동한 인식과 믿음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를 전해 주고 그들을 설복하여 불교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인들이 자주 부딪히는 신념체계는 현대과학11)과 기독교이다. 불교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발견된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이 과학의 세계관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많은 불교인들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성이 입증된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불교는 현대과학과 공존할 수 있는 종교일 것이다.12)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은 다른 종교의 신념체계, 특히 기독교의 신념체계와는 강하게 부딪힌다.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신념체계 가운데 창조론, 섭리론 등의 신화는 아직도 수많은 ‘한국기독교인’들의 인생좌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다종교사회에서 이러한 기독교인들과 맞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재가불자’들을 교육할 때 시급하게 가르쳐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의 창조론과 섭리론에 대응되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주는 어떻게 해서 생겼나? 지구상에 사람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나?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해서 생겼나?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는 법칙이 있는가, 아니면 절대자의 섭리에 의해 운영되는가? 등등의 물음에 대한 불교적인 해답이 한국의 재가불자들에게 먼저 교육되어야 한다.

 

그 동안 불교학계에서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과 우주론에 대한 연구가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침묵, 즉 ‘무기설’의 취지를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학자들이 칸트철학의 틀을 적용하여 ‘형이상학적인 물음(metaphysical question)’이라고 번안한 여러 가지 ‘난문(難問)’들에 대해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는다. 자아와 세간은 상주하는가, 무상한가? 자아와 세간은 유변인가, 무변인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어딘가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전유경(箭喩經)■■에서는 이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화살의 비유를 든다. 이런 의문에 매달리는 사람은 독화살을 맞았는데도 “나는 이 화살을 누가 쏜 것인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기 전까지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다.13) 이런 의문들은 무의미하고[非義], 진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非法], 청정한 수행과도 무관하고[非梵行], 불교수행의 목표인 열반과 전혀 관계가 없기[不與涅槃相應]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답을 하지 않는다.14) 이런 ‘난문’들 가운데 ‘자아와 세간의 상무상(常無常)의 문제와 변무변(邊無邊)의 문제’를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의 문제라고 보는 칸트철학적 해석15)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상기한 우주론적 물음들 역시 이런 ‘쓸모없는 물음’에 속한다고 간주하여 방기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자아와 세간의 상무상의 문제’는 “전생이 그대로 현생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전생과 현생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지”의 문제이고, ‘자아와 세간의 변무변의 문제’는 “현생과 내생이 단절되어 있는지, 아니면 현생이 그대로 내생으로 이어지는지”의 문제로,16) 전생과 현생과 내생의 시간적 상속(相續: satāna)에 대해 우리의 사유를 적용할 수 없다는 중도의 가르침이지, 우주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에 대한 추구를 금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시간적 상속에 대해 우리의 사유가 적용될 수 없다는 중도의 가르침은 고의 자작자각(自作自覺), 타작타각(他作他覺)의 문제에도 나타나 있다. 업을 지은[作] 자와 그 과보를 받는[覺] 자가 같은 자인지[자작자각] 다른 자인지[타작타각] 여부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무기답으로 대응한다. 다음을 보자.

 

어떤 바라문이 …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떠합니까, 구담(瞿曇: Gautama)이시여, 자작자각(自作自覺)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셨다. ‘나는 이것을 무기(無記: 언표되지 않는다)라고 설한다. 자작자각, 이는 무기이니라.’ ‘어떠합니까, 구담이시여, 타작타각(他作他覺)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셨다. ‘타작타각, 이는 무기이니라.’ 바라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째서 자작자각을 여쭈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시고 타작타각을 여쭈어도 무기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고하셨다. ‘자작자각이라면 상견에 떨어지고, 타작타각이라면 단견에 떨어진다. 의설과 법설은 이런 양 극단을 떠나 있다. 그래서 중도(中道)에 처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것이 있음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에 저것이 생한다. 무명을 연(緣)하여 행이 있고 … 그래서 오직 고(苦)뿐인 엄청난 오온들이 연생(緣生)한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 … 그래서 오직 고뿐인 엄청남 오온들이 소멸한다.17)   

 

여기서는 업을 짓는 자와 그 과보를 받는 자를 소재로 삼아 상견과 단견을 비판하고 있다. 세간과 자아의 상무상의 문제나 변무변의 문제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상견과 단견이 비판되고 있지만 그 범위가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으로 넓어진 것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상속(相續: satāna)을 대하는 우리의 이율배반적 사유를 비판한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무기의 소재가 아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물론 궁극적 기원이나 궁극적 한계에 대한 해답은 우리 사유의 이율배반적 성격과 관계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시무종’이나 ‘무변허공’이라는 말에 사용된 ‘무’자는 ‘없음’을 의미하는 ‘무’자가 아니라, 쌍차적(雙遮的) ‘중도’를 나타내는 ‘무’자이다. 우리의 흑백논리적 사유가 일상생활에서 만들어낸 ‘시작’이나 ‘끝’이라는 개념을 우주전체에 대해 적용하여 의문을 품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의심에 답할 수 있을 정도의 불교적 우주론은 불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장아함경■■ 중의 세기경염부제주품(世記經閻浮提州品)18)이나 ■■기세경(起世經)■■19)이나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20), ■■대루탄경(大樓炭經)■■21) 등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22)에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축생이든 인간이든 천신이든 모든 생명이 사는 세계는, 욕망[욕]과 몸[색]과 정신[무색]을 가진 중생이 사는 욕계, 미묘한 색으로 된 몸[색]과 정신[무색]만 가진 천신이 사는 색계, 정신적 경지[무색]만 존재하는 무색계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삼계설, “이런 삼계는 수미산[지구] 주변에 펼쳐져 있는데 수미산 하나마다 해와 달을 갖고 있고, 이런 수미산이 10억 개가 모인 것이 온 우주이다”라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이론, “삼계가 각각 20겁 동안 지속되는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의 네 주기를 거쳐 생성과 파괴를 되풀이하는데,23) 공겁의 시대에는 모든 중생이 색계 제2선천 이상에 사는 천신이 되기에 색계 초선천을 포함하여 그 하부의 욕계의 육욕천과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며, 공겁 이후 성겁이 시작될 때 색계 제2선천의 극광천(極光天)에 살던 천신 중 하나가 초선천으로 가장 먼저 타락하여 창조주의 행세를 하게 되었다24)”는 얘기 등등 사실적이고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현대과학의 우주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합리적인 우주론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데 어째서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려 하는가? 이런 삼계설의 우주론은 “열반하기 전까지 많아야 욕계에 7번 환생[極七返]한다”는 수다원(śrota āpanna), “열반하기 전까지 욕계에 1번만 환생[一來]한다”는 사다함(sakdāgamin),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不還] 곧바로 색계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 열반한다”는 아나함(anāgamin)을 말하는 성인(聖人)의 수행 계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이를 배제할 경우 초기불교의 수행론 역시 무너지고 만다.

 

불교의 우주론에 근거할 때 “우주는 태초의 대폭발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빅뱅이론이 아니라,25) “우주는 수축과 팽창을 주기적으로 반복 한다”는 맥동(脈動)이론이 옳다고 해석되며, 인간이라는 종(種: Species)은 ‘삼천대천세계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무량한 중생들의 윤회와 진화를 통해 출현하였다.’고 해석된다. 지금 필자의 이런 주장과 해석을 비학문적이고 허무맹랑한 담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경우 현재 ‘양식 있다고 생각되는 과학자’들조차 특이한 ‘학술단체’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창조론적 세계관을 논증하려 하고 있으며, 현학적 수사를 통해 많은 대중들에게 이를 주입하려 한다는 황당한 현실을 직시하자!

 

3. 불교신행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불교신행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해 보자. 전 세계의 불자들 가운데 도대체 몇 명이 현생에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그 목표를 아라한으로 낮추어도 얘기는 마찬가지다. 전 인류 가운데 지금 아라한이 된 사람은 몇 명이고, 앞으로 아라한이 될 수행자는 몇 명이나 될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부처나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만일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교신행을 한다면 대부분의 불자들은 평생을 헛물켜며 신행생활을 하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물론 출가수행자의 경우는 다르다. 발심이 투철하고 깨달음으로 가는 정확한 지도(地圖)만 갖고 있다면 부처님 당시에 그랬듯이 수많은 수행자가 아라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이 강해서 출가할 엄두를 내지 못한 일반인의 경우는 현생에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쉽지 않다.

초기불전에서는 윤회하는 생명체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몇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먼저 ‘눈 먼 바다거북의 비유’에서는, ‘대지가 모두 바다로 변했을 때 수명이 무량겁인 눈 먼 바다거북이 백년에 한 번 바다 위로 목을 내밀다가 우연히 그곳을 떠다니던 판자의 구멍에 목이 끼는 확률’보다 ‘생명체가 윤회하다가 인간으로 태어나는 확률’이 더 낮다고 가르친다.26) 또, 생명의 세계에서 인간의 수는 마치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적고 축생이나 아귀와 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수는 대지의 흙과 같이 많다고 한다.27) 이런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지금 60억으로 추산되는 전 인류 가운데 전생에도 인간이었거나 내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자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인간계 이상의 천상에 태어나거나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물론 불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않을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의 윤회관에 의거할 때,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것’ 이전에 내생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하늘나라[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재가불자의 1차적인 신행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 이전에 ‘윤회하는 삶 속에서 향상하는 것’이 불교신행의 현실적인 목표로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성취하는 방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보시와 지계의 ‘선업’을 짓는 것이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남을 도우며 살고[보시], 고결하게 살 경우[지계]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하늘나라에 태어난다[생천]. 성욕, 재물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과 같은 오욕락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출가하지 못한 재가자이기에,28) 이런 욕망을 모두 끊고 ‘깨달은 자’인 아라한이나 부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삼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한 총명한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괴로운 일이 생기면, 갖가지 향이나 꽃이나 음식을 준비하여 천신에게 기복적 기도를 올리게 마련이다.29)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열반’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재가자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재가자는 내세의 행복을 기원할 뿐이다.30) 초기불전 도처에서 부처님께서 재가불자를 교화할 때, 해탈의 가르침 이전에 ‘많이 보시하고, 계를 잘 지키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입문적 가르침, 즉 ‘시(施), 계(戒), 생천(生天)’의 설법을 먼저 베풀었던 이유가 이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가자가 성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잡아함경■■을 보면 음욕을 포함하여 오욕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재가자라 하더라도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結]’ 가운데 유신견(有身見)과 계취견(戒取見)과 의심(疑心)의 세 가지 번뇌를 끊을 경우 ‘많아야 일곱 번 욕계에 재생한 후 색계에 태어나 열반에 드는 성자인 수다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31)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유신견이란 ‘내[我]가 있다거나 나에게 속한 것[我所: 눈, 귀, 코, 苦, 樂…]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끊었다는 것은 ‘무아’의 진리를 체득했다는 말이 된다. 계취견이란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규범이나 의식을 옳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의심이란 ‘불교에 대한 의심’을 의미한다. 이런 세 가지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성자가 수다원이기에 수다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재물욕과 명예욕과 음욕과 수면욕과 식욕의 오욕락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다시는 추락하지 않는 ‘불퇴전의 성자’인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희망을 갖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희박해 질 경우는 ‘한번만 욕계에 재생한 후 색계에서 열반에 드는 성자인 사다함’의 지위에 오를 수 있으며,32) 부부생활도 금하고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를 모두 끊을 경우 다시는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색계에서 열반에 드는 성자인 아나함’이 될 수 있다고 한다.33)

 

이상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재가자의 신행목표를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았다. 재가불자에게 막연하게 ‘깨달음’을 그 신행목표로 제시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천신’으로 재생할 것을 목표로 삼는 ‘복락의 길’, 또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지위에 오르는 ‘지혜의 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자신의 수행목표로 삼게 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신행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재가불자가 ‘아나함’을 수행목표로 삼았다면, 그는 먼저 부부생활을 금해야 하고 그에 덧붙여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인 오하분결, 즉 탐욕과 분노와 유신견과 계취견과 의심이라는 다섯 번뇌 하나하나를 완전히 끊는 수행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지면 관계상 대승불교나 선불교의 수행목표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겠다. 대승불교의 수행목표는 성불이다. 보살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 후 3아승기 100겁의 세월 동안 윤회하며 공덕을 축적해야 부처가 된다. 사홍서원에서 보듯이 우리 불교전통에서는 이런 보살도를 수행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보살도를 ‘진심으로 다짐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공허한 ‘기어(綺語)’로 그치기 쉽다. 또, 선불교 수행의 경우 그 귀결은 다양하다. ‘보살’도 있고, ‘아라한’도 있고, ‘선불교적인 부처’도 있다. 견성을 했음에도 임종시에 ‘내생의 삶’을 서원했다면 그는 ‘보살’이다. 견성 후 열반한 다음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수행자는 ‘아라한’이다. 그리고 선불교에서 지향하는 ‘부처’는 인도불교의 견지에서 볼 때 ‘부처와 아라한을 구분하지 않았던 초기불교적 의미의 아라한’이다.34)

 

4. 연령에 따라 차별화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수년 전, 조계종단에서 티베트의 재가불자 교육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불교에 대해 깊은 신앙심을 가진 티베트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재가자를 교육시키는 별도의 시설이나 제도는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티베트나 미얀마와 같은 불교국가의 경우는 재가자들의 삶 자체에 불교가 녹아 있기에, 굳이 재가자를 위해 별도의 불교교육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억불의 조선시대 500년간 깊이 뿌리내린 유교문화의 풍습과, 근대화의 이름을 달고 물밀듯이 들어온 서구적 생활방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이 이제 겨우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들 불교국가들과는 사정이 매우 다르다.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출생과 결혼, 장례 등의 통과의례나 제사의식을 여법하게 만들어 재가불자들에게 보급해야 하고,35) 불교적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신행방법 등을 교육체계로 조직해 내어 재가자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누구에게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교육과정’으로 구현해내어야 한다. 이는 불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교가 재가자에게 효율적으로 가르쳐지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이 짜여져야 한다. 그런데 불교를 가르치는 일이 인생의 어떤 특정시기에 국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교육’, 또는 ‘불교적 교육’은 개인의 탄생 이후, 장성하여 늙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반교육학에서 말하는 ‘평생교육’의 개념은 불교교육체계의 정립을 위해 좋은 참고가 된다. “평생교육은 개인 및 집단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평생을 통하여 개인적, 사회적 직업적 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이다”36)라는 정의에서 보듯이 ‘평생교육’은 그 목적이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교교육’과 차별되지만, ‘개인의 출생부터 사망에 이를 때까지 전 생애에 걸친 교육’37)이라는 점에서 그 시간적 범위가 불교교육과 합치한다. 평생교육에서는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라 교육내용을 유아교육, 아동교육, 청년전기교육, 청년후기교육, 성인전기교육, 성인후기교육, 그리고 노인교육으로 구분하여 교육목적과 내용을 다르게 설정하는데,38) 우리가 재가자를 위한 불교교육체계를 정립하고자 할 때 ‘평생교육’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피교육자의 연령대에 따라 불교교육의 내용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불교의 모든 내용을 모든 연령대의 재가불자에게 무차별하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유아들에게 ‘탐욕을 없애기 위해 시체를 관찰하게 하는 부정관’을 가르칠 수는 없다. 인간의 발달단계에 대한 일반교육학의 분류법을 참조하여, 불교적 조망 하에 피교육자의 연령대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 태교 - 결혼 이후 출산 이전

② 영유아교육 - 출생 이후 언어습득 이전

③ 아동교육 - 언어습득 이후 사춘기 이전

④ 청년전기교육 - 사춘기 이후 고교졸업 이전

⑤ 청년후기교육 - 고교졸업 이후 대학졸업 이전

⑥ 장년기교육 - 대학졸업 이후 정년퇴임 이전

⑦ 노년기교육 - 정년퇴임 이후 사망 이전

 

앞으로 불교와 교육학의 소양을 모두 갖춘 전문가들에 의해 각 연령대의 재가불자들을 위한 교육과정이 세밀하게 짜여져야 할 것이다. 이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불교교육이 ‘불교문화교육이나 불교의식교육’을 넘어서 ‘피교육자가 불교적 심성을 갖도록 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나 일반 교육체계에는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교육방법을 사용하여 ‘신속하고 강력하고 정확하게 피교육자의 심성을 변화시키는 교육’이 고안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피교육자의 연령대에 맞추어 다르게 고안되고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면 피교육자의 연령대를 위와 같이 일곱 단계로 구분한 이유와 각 연령대 별로 가르쳐져야 할 불교교육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보기로 하자. 이하의 논의 모두는 철저히 불교의 세계관에 의거한 해석이고 제안이다.

 

①태교 - 결혼 이후 출산 이전(0~1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태교는 지금의 우리사회나, 일반교육학계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태아의 발육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임산부의 생활이나 마음가짐이 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임산부의 배속에 지금 어떤 태아가 들어와 있는가에 따라 임산부가 달라진다. 사리불의 어머니가 사리불을 임신한 후 갑자기 총명해졌다는 일화39)에서 가르치듯이 전생에 지혜와 복덕을 많이 닦은 중음신이 수정란에 결합되어 자궁에 자리 잡으면 그 어머니가 달라진다. 따라서 임신 이후의 태교보다 중요한 것은 임신하기 이전에 좋은 중음신이 자신의 자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일일 것이다. 또,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어떤 여인이 있어서 아들을 낳기를 원하여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양하면 문득 복덕과 지혜를 갖춘 아들을 낳을 것이며 딸을 낳기를 원하면 곧 단정하고 아름다움 딸을 낳으리니 전생에 심었던 공덕으로 여러 사람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리라”40)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불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태교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중음신을 불러들이는 ‘입태기도(入胎祈禱)’이다. 앞으로 우리사찰에서 ‘신혼부부를 위한 입태기도’ 의식을 새롭게 개발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의식에 기복적 기미가 배어 있지만 ‘실수로 임신하고, 낙태가 횡횡하는 지금 우리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상기하면 이는 ‘참으로 건전한 기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② 영유아교육 - 출생 이후 언어습득 이전(1~3세)

동물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규범교육과 사회화 교육. 일반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 부모는 자식이 무사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기도할 수 있다.

 

③ 아동교육 - 언어습득 이후 사춘기 이전(3~13세)

아동기는 언어를 습득한 이후 사춘기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언어능력이 있기에 불교적 세계관, 우주관이 교육될 수 있다. 가능하면 놀이와 동화를 통해 불교적 세계관과 인과응보의 교훈을 가르친다. 또,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고 이를 발표케 함’으로써 반야지혜를 훈련시킨다. 이 때 분석과 토론을 유도함으로써 분별력과 언어구사력을 키워준다. 내가 발에 밟히는 지렁이가 되어 보고, 병아리가 되어 보고, 아픈 친구가 되어 보는 ‘역할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자비심을 교육시킨다. 아동기는 성(sex)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이기에 ‘탐욕’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따라서 탐욕을 대치하는 ‘부정관’ 수행은 시키지 않는다. 또 아동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별도의 좌선 삼매의 훈련 역시 필요하지 않다. 영유아기 이후 아동기까지,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지 않은 아동일 경우 잡념이 없이 항상 삼매에 빠져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④ 청년전기교육 - 사춘기 이후 고교졸업 이전(13~19세)

 

아동기에서와 같이 불교적 우주관과 세계관과 인과응보의 이치에 대해 가르치지만, 독해능력과 이해력을 갖추고 있기에 그림이나 놀이가 아니라 문서와 강의를 통해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가르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성적(性的)인 성숙이다. 성적인 발육과 함께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생존본능’이 발휘되어 탐욕과 분노와 교만이 강력하게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신적으로는 미숙하기에 자기통제를 못하여 ‘왕따’와 교내폭력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 아동기 이전까지는 가르치지 않았던, 부정관과 자비관과 삼매를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한다. 부정관을 통해 음욕을 제어하고, 자비관을 통해 분노를 제어하며 삼매를 통해 잡념을 제어하는 훈련을 한다. 또 잘못을 저질렀을 때 참회기도를 통해 이를 정화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와 아울러 하나의 사건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반야지혜를 훈련시킨다. 이는 분석과 토론과 깊은 사색을 통해 분별력을 키움으로써 터득된다. 이 시기에 출가의 길을 권장하고 출가할 인재를 발굴한다.

 

⑤ 청년후기교육 - 고교졸업 이후 대학졸업 이전(19~25세)

불교전공자가 아닌 경우 청년전기교육과 그 내용은 동일하나 좀 더 심도 있게 교육한다. 그리고 이 때 대학에서 ‘불교전문인 교육’이 시작된다. 동국대와 위덕대와 금강대 등의 불교계 종립대학 불교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 그 대상이 된다. 불교학과 졸업생에게 현행의 ‘포교사’와 차별화 하여 ‘전법사(傳法師)’라는 이름의 법사자격을 부여한다. 부전공제를 활용하여 ‘심리상담’, ‘문화재관리’, ‘종무행정관리’, ‘정보통신기술’, ‘명상지도’, ‘시민운동’ ‘사회복지’, ‘유아교육’, ‘불교미술’, ‘불교음악’, ‘문화관광’ 등의 특기를 부여하고 이를 전법사 자격증에 병기한다. 엄격한 관리를 통해 각종 특기를 가진 전법사를 배출함으로써 졸업 후 불교계에서 실질적으로 이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⑥ 장년기교육 - 대학졸업 이후 정년퇴임 이전(26세~60세)

불교계 밖에서 일반 불자로 살아가는 생활인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별도로 마련되어야 한다. 이 시기에 재가불자들은 생업에 종사하며 가정살림을 꾸려나가고 자녀를 교육해야 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생활 속의 어려움을 불교적으로 풀어나가는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 청년기 교육에서 가르쳤던 내용과 함께 불교적 심리상담, 참회기도, 작복의 생활, 대인관계, 가족관계, 자녀교육 등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결방안이 계속 교육되어야 한다.

 

⑦ 노년기교육 - 정년퇴임 이후 사망 이전(60세~사망)

우리나라의 불자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교육되어야 할 내용 중의 하나가 내세관이다. 앞에서 ‘불교신행의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인간, 천신’이라는 복락의 길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라는 지혜의 길을 나열한 적이 있다. 이와 아울러 ‘무한한 보살도 후의 성불’, 또 ‘아미타불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 등이 불자들에게 제시될 수 있는 내세의 모습이다. 노년기에는 앞에서 해 왔던 교육도 계속 해야 하겠지만, 각 개인으로 하여금 이런 내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하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시켜야 한다. 평생 지었던 악업을 참회하게 하는 ‘기도의 삶’, 평생 쌓아 온 재산을 남에게 베풂으로써 내생의 행복을 기약하는 ‘보시의 삶’, 내생에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살아갈 것인지 발원하는 ‘서원의 삶’을 살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노년기의 불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내용들이다. 그래야 ‘사망에 임박하여 개종하는 불자’가 사라질 것이다. 늙고 죽음이 임박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도로 우리는 그가 불교신행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가름할 수 있다.

 

5. 출가자와 세속을 매개하는 전문 인력이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다양한 종교지도자들이 있지만 불교의 ‘스님’이 다른 종교의 지도자와 차별되는 점은 재가신도를 위한 ‘복전(福田)’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우리가 축생에게 보시할 경우 보시물이 백배로 되어 내게 돌아오고, 악인에게 보시할 경우 천 배가 되어 돌아오며, 선인(善人)에게 보시할 경우 십만 배가 되어 돌아오고, 욕심을 떠난 사람에게 보시할 경우 십억만 배가 되어 돌아오며, 수다원 등 사향사과의 성인들에게 보시할 경우 무량한 복이 되어 돌아온다고 한다.41) 그리고 일반인의 경우는 욕심에서 벗어나 자비를 실천한다고 해도 제법의 실상을 체득하지 못했기에 무량한 복전이 될 수 없는 반면, 성인 가운데 가장 아래 단계인 수다원의 경우는 아직 오욕락에 대한 욕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긴 했어도 제법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기에 무량한 복전이 된다고 한다.42) 이런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모든 존재의 참모습[제법실상]을 깨닫는 것’이 ‘욕심을 버리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보다 복전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가르침에 의거할 때 출가한 스님의 가장 바람직한 사회참여 방식은 ‘자신을 양질의 복전으로 만든 후 재가자의 시주물을 받아주는 것’과 ‘재가자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리라. 출가자가 깊이 수행하여 모든 욕심을 버리고 제법의 실상을 파악함으로써 수다원 이상의 복전이 되었을 때 그에게 시주물을 올리는 재가자에게 무량한 복이 돌아간다. 불교적으로 볼 때 ‘한 그릇의 밥을 남에게 주는 것’보다, ‘한 그릇의 밥을 시주받음으로써 그 시주자에게 수만 그릇의 밥을 먹을 수 있는 복을 주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출가자의 이상적인 사회참여 방식이다. 우리사회의 복락이 지금 이렇게 유지되는 것도 복전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우리의 시주를 받으며 함께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불교는 사회참여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는 사회통념에 부응하여 이제는 출가자든 재가자든 많은 불교인들이 정치, 경제, 복지 등 사회 각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많은 사찰에서 사회복지시설이나 병설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고, 많은 스님들이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 앞장선다. 이러한 사회 참여 활동의 대부분은 원래 재가불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다. ■■대지도론■■이 대승사상을 피력하는 논서이긴 하지만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확연히 구분한다. 보시를 재보시와 법보시로 나눌 때, 재보시는 출가자가 아니라 재가자의 임무이며 법보시가 출가자의 임무라는 것이다.43) 왜냐하면 출가자가 재보시를 하기 위해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계를 어길 경우 ‘복전’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며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이지 출가자의 본분은 아니다.

 

■■사분율■■에 열거된 비구의 250계 중에는 땅을 파서는 안 된다는 굴지계(掘地戒),44) 식물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괴생종계(壞生種戒),45) 금전을 비축해서는 안 된다는 수축금은전계(受畜金銀錢戒),46) 상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판매계(販賣戒)47) 등이 있다. 이는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고 승가의 명예를 지키며 세속적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목들이다. 그런데 이런 계목들을 그대로 지키고자 할 경우 출가자의 사회생활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승가의 주변에서 생활하면서 출가자와 세속을 중개해주는 재가자가 필요했으며 율장에서는 이런 재가자를 淨人(kappiyākaraka)이라고 부른다.48)

 

우리는 “불교가 사라지는 것은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에게 올리는 시주물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출가자들이 바르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49)라는 부처님의 유훈을 명심해야 한다. 서구의 물질문명, 감각문명이 세계를 주도하면서 수행환경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 도처에 ‘청정한 수행’에 장애가 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가득하다. 불교가 전통적 수행환경을 보존하면서 대사회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전문교육을 받은 재가불자들이 세속적 업무에 적극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불교상담, 불교NGO 활동, 신행안내와 포교, 신도관리, 사찰유지보수, 사회복지업무, 사찰부속유치원운영 등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하는 ‘현대의 정인(淨人)’들이다. 그리고 각 종단에서 설립한 종립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한 재가불자들이 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참회기도법이 새롭게 개발되어 적극 보급되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세속에서 살아가는 재가불자의 경우 욕심을 완전히 버리거나 화를 전혀 내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대지도론■■에서는 재가자의 수계에 대해 융통성 있게 해석한다. 오계를 모두 받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지만, 다섯 가지 계목을 다 지킬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재가자라면, 자신의 처지에 맞게 선택적으로 수계해도 된다. 그래서 오계 가운데 한 가지만 받아 지키는 우바새를 ‘일분행(一分行) 우바새’라고 부르고, 두세 가지를 받아 지키는 우바새를 ‘소분행(少分行) 우바새’, 네 가지를 받아 지키는 우바새를 ‘다분행(多分行) 우바새’, 다섯 가지 계목 모두를 받아 지키는 우바새를 ‘만행(滿行) 우바새’라고 부른다.50) 그리고 만행 우바새 가운데 배우자와의 성생활도 끊기로 다짐한 우바새를 ‘단음(斷) 우바새’라고 부른다. 단음 우바새의 경우는 오계 수계식을 마친 다음에 계사 앞에 나아가서 ‘저는 이제 제 배우자와 음행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한다.51) 재가 오계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우바새계경■■에서도 발견된다.52)

 

재가불자 가운데에는 ‘불음주계’ 때문에 아직 수계하지 못했다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르침에 의거할 때 수계식 참석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음주계’ 이외의 네 가지 계만 받아 지니는 ‘다분행 우바새’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또, 생선회집을 운영하는 사람은 수계식에 참석하여 ‘불살생계’ 이외의 계만 받으면 된다. 소매업을 하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손님에게 ‘밑지고 판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인이라면 ‘불망어계’ 이외의 계만 받으면 될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오계 모두를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마음 속 다짐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재가 오계도 제대로 지키기 힘든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또 살아가면서 금전적인 문제, 친구나 친척과의 불화, 신체적 질병 등 갖가지 우환으로 시달린다. 재가불자들을 교육할 때 불교의 근본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겪는 이런 어려움들을 불교적으로 극복하는 방법 역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처님이 그랬듯이 ‘인지(認知)’의 전환을 통해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지혜가 아니라 복덕의 결핍으로 인해 야기된 불행의 경우 인지의 전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내가 받고 있는 불행은 모두 과거에 내가 지은 잘못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과거 언젠가 내가 ‘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이 지금 내가 받는 고통스러운 과보의 원인이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불교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런 불행을 야기한 전생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다.53)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우환이나, 앞으로 내게 닥칠 우환을 막는 불교수행 가운데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참회기도이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청변의 Tarka-jvālā를 인용하면서 “내생에 악취에 떨어질 죄를 지은 사람도 제대로 참회할 경우 현생에 골치가 아픈 정도의 과보만 받는다.”고 기술한다.54) 참회는 전생이나 과거에 지었던 악업의 종자를 말려버린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봉독하는 ■■천수경■■이나 백팔참회문 등을 통해서도 참회기도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참회기도의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하다. ■■천수경■■ 봉독의 경우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금일참회, 사음중죄금일참회, … 치암(痴暗)중죄금일참회”라고 외치면서 십불선업(十不善業) 모두에 대한 참회의식을 순식간에 치르기에 자칫하면 건성 ‘참회’가 되기 쉽다. 백팔참회의 경우도 항상 동일한 내용을 봉독하며 참회의식을 치르기에 기계적 수행이 되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일반적, 보편적 참회의식에 덧붙여 각 개인에 따라 달리 행해지는 특수한 참회의식이 개발되어야 한다.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지려면, 십선계의 계목 하나하나를 내가 어김으로써 다른 생명체가 받았을 고통을 떠올려야 하고 고결하지 못하게 행동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진정한 다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일한 참회문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내가 저질렀던 구체적인 죄목을 떠올리며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참회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죄목을 참회할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받는 고통은 모두 과거나 전생에 내가 지었던 악업의 과보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면 어떤 계를 범하여 그런 고통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기에 참회할 내용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전생이나 현생에 내가 지었던 살생죄’를 참회하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투도죄’를 참회한다.

 

신라시대에는 점찰법이 유행했다고 한다.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하면 주사위와 같이 여러 면으로 된 작은 나무토막 세 개에 각각 십선계의 계목과 그것을 어긴 정도와 그것을 지은 시기 등을 써 넣은 다음 바닥에 굴려서 자신이 전생에 지었던 죄의 내용과 강도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내어 그에 대처하게 하는 수행법이 점찰법이다.55) 말법의 시대가 되면 숙명통이 열린 사람이 전무하기에 이런 점찰법을 통해 전생의 죄업을 알아낸다고 한다.56) 그리고 전생에 죄업을 많이 지은 것으로 점괘가 나오면 깨달음의 수행에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그 죄업에 대한 참회수행부터 해야 한다. 전생에 지은 죄업이 중한 사람은 수행에 장애가 많고 마음이 산란하며 사견에 빠지기 쉬워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57) 이러한 점찰법 역시 개개인의 ‘현실감 있는 참회기도’를 위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참회기도의 또다른 장점은 불자들을 모이고 화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선수행이나 교학공부에서는 잘 나고 못난 사람이 드러나고 아래와 위가 정해지기에 그 구성원이 화합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참회기도를 위해 부처님 전에 섰을 때는 모두가 ‘못난 사람들’일 뿐이다. 불교에 입문한지 오래 된 사람이든, 갓 입문한 사람이든,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많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못난 중생’으로 모두 한 마음이 된다.

 

7. 맺는 말

 

불교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전체가 불교를 통해 해석되어야 하고 불교 역시 우리의 삶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재가불자에게 학문불교가 그대로 가르쳐져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삶에 녹아들 수 있도록 소화되고 풀이된 불교가 가르쳐져야 한다. 불교를 배우고 그에 따라 신행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삶에 대해 남달리 깊고 정확한 통찰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어떤 종교인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며, 그 누구에게든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사회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든 그곳을 밝히는 소리 없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인’이라는 말만 들으면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너무나 정직하고, 슬기로우며, 따뜻한 감성을 갖고 있고, 언제 어디서든 밝고 의연하며,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부지런하고 항상 남을 돕고 겸손하며, 지극히 검소하고 고결한58) 사람’을 떠올릴 수 있도록 모든 불자들을 교육해내어야 할 것이다.

 

‘석고화 된 불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불교’가 교육되어야 한다. ‘사구(死句)’가 아니라 ‘활구(活句)’가 교육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활구란 ‘우리의 인식과 행동에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가르침’이다. 이 시대의 활구를 만들기 위해 불교학자들은 삶과 교학에 대한 유기적 해석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열거했던 내용 하나하나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재가불자의 신행에 직접 사용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이외에 재가불자의 교육을 위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몇 가지 더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재가불자 교육용 교재와 함께 교안이 개발되어야 한다. 교안은 교재를 가르칠 때 교사가 참조하는 책이다. 일반불자들에게 불교신행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스님이나 포교사, 또는 전법사들이 일관되고 정확하게 불교를 가르칠 수 있도록 교재에 담긴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효율적인 지도방법을 해설하는 교안이 교재와 함께 이러한 불교지도자들에게 보급되어야 한다.

 

2. 마치 설문지를 통해 적성검사를 하듯이, 불자 개개인이 의식적으로 견지하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검사하는 방법이 개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자신의 자아가 신체 가운데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죽은 후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는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인가?’ 등과 같은 질문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르거나 적게 한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파악한 후 유사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강력한 대기설법적 교육’을 할 경우 보다 효율적인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아동교육이나 청년전기교육의 경우, 고정관념을 깨 주는 ‘반야 놀이’를 개발하여 활용한다. 하나의 사물을 제시한 후 그것에 다양한 이름을 붙여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백묵을 제시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보게 한다. 백묵 이외에 ‘조각품’, ‘한약재료’, ‘타악기’, ‘분장용 재료’, ‘잉크흡수기’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을 고안해 보게 한다. 이를 통해 피교육자는 하나의 사물에서 다양한 이름과 용도를 추출해 내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하나가 모든 것[一卽一切名]이라는 화엄적 조망과, 하나에 원래 이름이 없다[一卽無名]는 반야적 조망이 터득되는 것이다. 또, 예를 들어 ‘내’가 누군지 물을 경우 학생에게는 ‘교수’이지만 아내에게는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아빠’이고 옆집 아줌마에게는 ‘아저씨’이고 굶주린 사자에게는 ‘먹이’이고 바퀴벌레에게는 무서운 ‘괴물’이다. 나[一]에게 모든 이름이 붙을 수 있지만[一切], 그 어떤 이름도 나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無, 空]. ‘나’에 대해 이 모든 이름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이 화엄적인 절대긍정의 조망이고, 이 가운데 그 어떤 이름도 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반야적인 절대부정의 조망이다. 그런데 이런 조망은 ‘백묵’이나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세상만물에 대해서도 모두 적용 가능하다. 이와 같은 방식의 교육이 진정한 불교교육이다. 현대심리학의 용어로 말하면 ‘인지(認知)’교육인데 이를 통해 ‘인지의 구성’과 ‘인지의 해체’ 능력을 키운 아동과 청소년은 언제 어디서든 열린 사고로 사물과 사태를 대할 수 있기에 발명가가 되고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억에 의존하는 ‘지식’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지만, 고정관념의 해체를 의미하는 반야의 ‘지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생각을 쌓은 것이 아니라 허문 것이기 때문이다. 내생(來生)은 물론이고 성불의 그 날까지 가져간다. 그리고 이러한 반야교육은 ‘종교의 티’가 나지 않기에 ‘강력한 창의력 교육’으로서 일반교육과정에도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4. 재가불자의 교육에 컴퓨터나 핸드폰과 같은 정보통신기기가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불교수행과 불교포교 모두 이러한 정보통신기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컴퓨터 영상물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일종의 밀교 수행이다. 만다라, 무드라, 만뜨라를 통해 수행하는 밀교는 ‘시청각 자료와 놀이를 통한 불교수행’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모래만다라 수행의 경우, 고운 색 모래로 불보살을 모실장소인 만다라를 그리게 되는데 이 때 신앙심도 키워지고 삼매력도 키워진다. 그리고 여러 날에 걸쳐 정성껏 그렸던 모래만다라를 마지막에 지워버림으로써 무상의 진리가 체득된다. 경전을 읽지는 않았지만, ‘모래만다라 그리기’라는 일종의 놀이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리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컴퓨터 영상물을 통해 부정관이나 자비관 등의 불교수행이 가능하다. 정보통신문명의 등장은 제3의 물결59)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인류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으로 현재 우리의 삶을 급변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현실세계보다 가상세계에서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더 많은 즐거움을 찾고,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생활한다. 앞으로 불교포교와 수행을 위한 컴퓨터 영상물이 많이 제작되고 보급되어야 이들의 삶 속으로 불교가 스며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극심한 종교적 배타성으로 인해 그 동안 불교포교에 제약이 많았던 이슬람 문화권에 불교의 씨앗을 뿌리는데도 컴퓨터 영상물이 적극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상세계 속에서 불교포교의 선봉장이 된 ‘아바타’ 보살은 죽이고 죽여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 자비심을 키우기 위한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나와 남을 바꿔보기)’이 재미있는 놀이로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교육은 ‘불교의 외형’이 아니라 이렇게 ‘불교의 본질’을 교육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불교는 ‘해체법’이기에 성별이나 나이, 지능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교육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삼독심을 해체시키는 것이 그 목표이기에 개인의 지적능력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가르쳐질 수 있다. ‘욕심내지 않는 것’, ‘화내지 않는 것’은 머리가 좋건 나쁘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오히려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실천하기 힘들 수 있다. 또,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고정관념을 갖는 것’이라고 풀이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지능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벌레조차 우리가 모르는 해체의 지혜를 알고 있다. 사과벌레는 자신의 반야를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밥이 집이다!’ 한 구절 가르치면 돌아서서 잊었다는 주리반특가가 ‘쓸고 닦자’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아라한이 될 수 있었다는 일화 역시 불교가 해체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예증한다. 지식은 쌓아서 성취되지만, 지혜는 부수어서 얻어진다. 우리가 재가불자를 위한 교육체계를 정립하고자 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인지와 감성의 해체’,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지혜와 자비를 실질적으로 터득하는 것’이 그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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