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의 첫 다리 융희교
한때 이리팔경에 꼽혔던 “만경강 융희교(萬頃江 隆熙橋)”, “만경강 범선(萬頃江 帆船)”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른 아침 시내에서 내려다보는 목천포 동자포에 몰려든 돗단배와 융희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만경강 건너 맑게 갠 하늘에 아득히 보이는 안개 띠 두른 모악산과 구성산의 그윽한 풍경을 그려 본다.
융희교는 남개(木川浦)에 있었던 만경강 최초의 다리였다. 1908년 군산-전주 신작로가 개통되었다. 공식 이름은 군산전주선 일등도로였으나 일본식으로 전군가도라고 불렀다. 1915년에 간행된 이리안내에서 전군가도가 1908년 가을에 개통되었다 하니 전군도로의 만경강 도강 통로인 융희교는 융희 2년(1908년)에는 완공되어 있어야 한다. 1909년 10월 만경강 대장포에 세천교, 1912년 10월 고잔 마을 앞에 만경강 철도교, 1914년 11월 삼례 비비정 옆에 경전북부선 만경강철교가 개통되었으니 융희교가 만경강의 첫 다리임이 분명하다.
융희교의 역사는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어 진면목을 찾아 보기 힘들다. 융희교의 길이나 너비는 문헌기록에서 찾지 못했지만 1915년 지적원도의 만경강 폭으로 보아 다리 길이는 70 m이상으로 추정된다. 1911년 제정된 도로규칙의 기준에 따르면 다리의 너비는 일등도로의 경우에는 도로 너비와 같이 7 m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득이한 경우 5.45 m까지 축소를 허용했기 때문에 융희교의 정확한 너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23년 전군도로에 있는 백구면 득용교와 오산면 신용교, 조촌면 추천교를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개량할 때 너비를 5.8~6 m로 하였고, 1928년 만경강개수공사로 강물의 지름길(捷路)을 뚫은 새 만경강 위를 지나는 만경교의 너비가 6 m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융희교도 도로규정의 원칙인 7 m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융희교의 다리 구조에 대한 기록도 찾지 못하였다. 1901년 1월 9일 제국신문에 ‘황토현 신작로 다리 역사는 불원간 필익이 된다 하는대 그 다리를 돌로 놋는 것이 아니라 외국법을 모방하야 기둥이 없시 전수히 나무로만 매우 견고하게 놋는다 하니 우리나라에 처음 구경하는 다리가 되겠다더라“고 보도하였다. 이 광화문 앞 황토현 신작로 나무다리 신교는 1913년에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고쳐 놓았다. 1917년 10월 다리 위에서 총독이 축사를 하고 도교식을 거행했던 한강인도교도 나무다리였다. 1차 치도사업이 완료되는 1917년 이전에 완공된 도로의 다리는대부분 나무다리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융희교도 나무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융희교가 언제 폐기되었는지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1925년 5월 31일 이리공설운동장에서 만경강개수공사 기공식이 성대하게 열린 후 1926년 6월 22일 만경교 가설 공사를 시작하고 12월부터 만경강 목천포와 동자포의 지름길(捷路) 뚫기와 오산제 둑쌓기를 시작했다. 1928년 2월 14일 10시 목천포에서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만경교 준공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 다리는 흔히 목천포다리라고 불렀다. 만경강 새 물길에 새 다리가 만들어졌으니 융희교는 만경강 다리로는 역할이 끝이 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새 만경강이 뚫리고 새 만경교가 놓였지만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융희교는 1933년 이전까지 전군도로에서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계속 이용된 것 같다. 융희교는 적어도 30년 이상 전주 이리 군산 고베 오사카의 쌀 고속도로의 핵심 다리로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군도로와 융희교가 완공된 후 교통요지가 된 남개는 전군가도, 이리가도, 김제가도, 만경가도, 부용가도로 통하는 4통 8달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0에는 1일 6일마다 장이 서고, 포구에는 만경강을 오르내리는 배가항상정박해 있고 나룻가 하역장에 온갖 물건이 모여들어 4시에서 6시 사이에는 남개-이리 간 우마차의 왕래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1년 만경강 삼례면 후정리-오산면 남전리 간 개수공사가 끝나고 융희교도, 목천포 동자포 돗단배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융희교가 있던 만경강은 한동안 강줄기로 남아있다가 언제부터인가는 잡종지 빈터로 남거나 집이나 창고가 들어섰지만 옛 만경강의 흔적을 일부 희미하게 남기고 있다.
1915년 지적원도로 복원한 융희교의 위치는 동북단은 김제군 목연면 조문(삼정리 452번지) 잡종지, 동남단은 김제군 목연면 유천(유강리 249번지) 잡종지, 서북단은 익산군 남일면 목천포(목천리 435번지) 집 옆, 서남단은 익산군 남일면 목천포(목천리 438번지) 집 옆에 있었다. 현재의 지번으로는 익산시 목천동 437-2, 183-37번지와 김제시 유강리 539-27번지 사이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주 김제 익산 군산 4개 시와 함께 2022년까지 30억 원을 들여 번영로 100리 벚꽃길을 되살린다고 한다. 볼품없는 벚나무를 뽑아낸 뒤 벚나무를 새로 심고 주변 문화 역사 경관을 새롭게 조성하고 마라톤이나 사이클 등 국제스포츠대회 유치도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화사한 벚꽃길을 되살리는 것도 좋겠지만 수탈의 역사를 되살리는 것도 필요하다. 융희교는 우리나라 첫 신작로의 다리, 만경강의 첫 번째 다리, 한강다리보다 먼저 놓은 다리, 506년 만에 사용한 우리나라 연호로 이름을 지은 다리로 역사성과 상징성이 충분히 있다. 이번 기회에 전군도로의 융희교를 복원하고 다리 옆에 헌납과 부역 그리고 쌀 반출의 상징물로 수탈상을 세워 후세에 길이 교훈으로 삼기를 기대한다.
雲步散人 李在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