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수시
발레리는 말라르메의 시론을 '순수시' 개념으로 발전시켜 프랑스 상징주의의 시의 정점을 이뤘다. 그는 19세 때 시를 처음 발표했으나 1년만에 중단하고 철학과 수학, 물리학 등을 연구하다가 앙드레 지드의 권유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장시(長詩) [젊은 파르크(1917)]를 출간했고 청년기의 시를 모은 [구시첩(舊詩帖)(1920)]을 펴냈다. 이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해변의 묘지]를 비롯해 [나르시스 단장(斷章)] 등 20편의 작품을 묶은 [매혹(1922)]을 출간 함으로써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시 쓰기를 중단하고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탁월한 시론을 전개했으며, '순수시'를 주창하여 그 특징을 규명해나가게 된다. 그는 1920년 동료 시인의 시집 머리말을 쓰다가 '순수시'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1928년에 발표한 [시론(詩論)]을 통해 '순수시론'을 정면으로 거론함으로써 프랑스 문단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을 통해 그의 '순수시' 이론은 다듬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순수시'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특징을 대변하는 용어가 됐다.
발레리가 말하는 순수시의 의미는 오늘날의 의미와 사뭇 다르다. 발레리는 시를 논할 때 '시적(詩的)인 것'과 '비시적(非詩的) 인 것'을 구분하고, 비시적인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를 '순수시'라고 칭했다. 그는 1927년에 작성한 [시인의 수첩]을 통해 순수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물리학자가 순수한 물(증류수)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에서 나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적이 아닌 요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작품 하나를 구성해낼 수 있으냐의 여부를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시란 언제나 이 순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고, 또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발레리는 이처럼 "순수한 물"과 같은 시,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시를 '순수시'라고 칭했다. 또한 그는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함과 동시에 "이거야 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며, 시는 그 순수한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그 상태는 발레리가 꿈꾸었던 '시의 우주'인데, 그 우주는 시에 쓰이는 언어에 의해 구현된다. 그는 '실용적인 언어, 논리적 형태의 언어, 습관적이고 무질서하고 무이성적(無理性的)인 언어' 때문에 '절대시'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의 '절대시'는"절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음악성과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다.
2. 시의 음악성
발레리는 1939년 옥스퍼드대에서 행한 강연 [시와 추상적 사고]를 통해 "산문은 보행이요, 시는 춤이다." 라는 명제를 던졌다. '춤의 언어', 즉 '시'가 지니는 리듬은 리듬 자체가 목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독자에게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의 언어는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재생된다. 반면 산문의 언어는 의미의 목적지에 닿는 순간 소멸된다. 게다가 산문의 언어는 일상어이기 때문에 시가 추구하는 '관념'을 포착해낼 수 없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해내는 기능을 지니는데, 이것이 곧 시의 상징이다. 시의 언어는 사물이나 감정을 지시하는 도구적 기능을 수행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춤의 율동처럼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시인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말라르메에게 보낸 편지글(1891년)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세계를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우주의 화음'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때의 '화음'이란 시적 주체와 이 세계의 '상응(相應)'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상응이야 말로 상징주의 시가 추구해온 궁극적인 지향점이자 시의 음악성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우주는 온갖 리듬의 하모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은 여기서 현실적 사물들이 암시하는 신비롭고 아름답고 불투명한 '불가해의 세계'를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바로 만물과 교감하는 '상징'이 된다. 이러한 상징은 섬세한 감각과 영감이 부여된 사람만이 직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적 영감을 '시인의 특권'으로 믿고 거기에 의존하기보다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시의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발레리의 주장이다.
3. 첫 구절
발레리는 시를 창작할 때 "손을 깨끗이 하고 수술을 준비하는 외과의사"처럼 머릿속을 말끔하게 비우고 그 무엇보다도 '첫 단어'를 주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시의 첫 구절은 공짜로 준다. 그것과 화음을 이룰 둘째 구절을 불러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나의 단어로 시작되는 시는 "아직 말을 더듬거리기 때문에" 우발적인 단어를 빌려 쓸 수 밖에 없는데, 그 단어는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또 다른 단어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즉, 단어와 단어들이 호응하여 "음악화 되고" "화음적으로 대응하는" 공명 관계를 이룰 때, "시적 우주"가 열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레리에 있어서의 시는 '말의 배합과 결합 그리고 변형된 조직체'인 셈이다.
그러나 시는 시인이 겨냥하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레리는 '절대의 책'을 향한 '언어의 연금술'을 꿈꾸기보다는 '수공업'처럼 언어를 매만지고 두드리고 밀고 나가는 창작 행위를 중시했다. 다시 말해 완성된 시보다도 창작 과정의 정신 활동에 더욱 큰 의의를 두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발레리는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녔다. 그에 의하면 시는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다. 게다가 아름다운 시구 하나로도 순수시가 이뤄진다고 보았다. 즉 순수시란 '한 언사(言辭)의 재료 중에 얽힌 순수시의 파편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발레리의 주된 관심사는 '시의 완결성'보다 '시작 과정'이었다. 그는 "시를 만드는 나를 관찰하면서 시를 썼다."고 말했는데, 시 창작의 메커니즘을 살피는 데 더 많은 기간을 보냈던 셈이다. 그의 '순수시론'은 현실에선 결코 실현되지 않을 '이상론'이었다. 그래서 발레리는 '불가능의 시 쓰기'를 수단으로 삼아 인간 의식의 명료성을 탐구한 학자로 불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해변의 묘지]의 부제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오 나의 영혼이여, 영원불멸을 꿈꾸지 말고, 다만 가능성의 영역을 다 소진시켜라."라는 말이 그것이다.
비둘기들이 걷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펄럭인다 소나무 사이에서 무덤 사이에서,
엄정한 자, 정오는 거기 불로써 빚어낸다
바다를, 언제고 새로 시작해 있는 바다를!
오 생각 하나에 따른 보상이여,
신들의 평온을 오래 관조하는 시선이여!
(중략)
아름다운 하늘이여, 진실된 하늘이여, 변화하는 나를 보라!
그토록 대단한 자존 끝에, 이상하나 힘에 찬,
그토록 대단한 무위의 끝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나를 맡긴다
(중략)
오 나만을 위하여, 나 자신에게 감, 나 자신 속에서,
마음 곁에서, 시의 원천에서,
공허와 순수 사건 사이에서,
나는 나의 내면의 위대함이 메아리치기를 기다린다.
항상 앞날에 다가오는 공동이 영혼 속에 울리게 하는,
쓰라리고 어둡고 소리 울리는 저수조여!
(중략)
아니다, 아니다! ⋯⋯ 일어서라! 계속되는 시대 속에!
부숴라,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틀을!
마셔라,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바다에서 뿜어 나오는 서늘함이
내게 나의 혼을 돌려준다 ⋯⋯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가, 거기서 생생하게 솟아오르자!
(중략)
바람이 인다! ⋯⋯ 살아보아야 한다!
광막한 대기는 나의 책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파도는 가루로 부서져 바위 위에 용솟음치려 하네!
눈부시게 하얘진 책장들이여 날아가라!
부숴라 파도여! 기쁨을 되찾은 물로써 부워버려라
비둘기들이 모이 쪼던 그 고요한 지붕을!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中 -
발레리는 이 작품을 창작하면서 "어떤 착상"도 갖지 않았고 "떠도는 단어들"이 주제를 만들어 나갔다고 한다. 운율의 토막들이 저절로 움직여 앞뒤의 시행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발레리는 낱말들의 공명, 시어의 음향 효과 그리고 리듬에 의한 시쓰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의 리듬과 이미지, 상징과 비유 등 말의 모든 힘을 구사하여 '언어 공학'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시인은 '언어 공학'의 '기하학자' '건축가'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영감보다는 명료한 의식과 각고의 노력으로 '불가능의 꿈'을 찾아가야 한다는 그의 '인공 시학'은 "나는 무아 상태에서 번갯불을 기다리느니보다 맑은 정신, 의식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반짝거리는 불꽃을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