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訓鍊判官, 종5품, 김광필(金光弼)
① 승정원일기 2704책 (탈초본 128책) 고종 3년 7월 15일 신미 24/24 기사
1866년 同治(淸/穆宗) 5년
○ 兵批, 判書李圭徹, 參判姜㳣, 參議趙埰, 參知金昌秀進 以李裕膺爲副摠管, 韓元植爲同知, 李舜器爲宣傳官, 鄭完默爲內禁將, 金弼求爲公事官, 白樂三爲宣傳官, 柳冀大爲尙州營將, 具駿鉉爲晉州營將, 李鍾龍爲西原營將, 金東稷爲三陟營將, 李尙權爲黃海中軍, 申祖顯爲五衛將, 孫海遠爲慶州營將, 吳鶴善爲羅州營將, 安錫麒爲慶尙中軍, 南宮鈺爲神光僉使, 權永秀爲副摠管, 李邦鉉爲訓鍊都正, 徐光復爲訓鍊正, 李奎參爲都摠經歷, 李種完爲公忠兵虞候, 李本修·金翊相·金益和爲五衛將, 李賢運爲忠壯將, 李魯洙爲訓鍊判官, 金景道·高鎭衡爲五衛將, 車敬栻爲景福將, 邊成龍·車道亨爲慶熙將, 田重民爲平薪僉使, 金錫恒爲蝟島僉使, 車元模爲古今島僉使, 金晉炯爲棃津萬戶, 鄭弼寬爲黑山島別將, 金亨達爲所斤僉使, 田基靑爲西林僉使, 金宗範爲乶下僉使, 金學素爲柔遠僉使, 李星敎爲多慶浦萬戶, 李允亨爲臨淄僉使, 金得弼爲老江僉使, 李宗培爲包伊萬戶, 玉乃錫爲位羅萬戶, 鄭在璣爲金城別將, 朴震楗爲潼關僉使, 公尙文爲伐登僉使, 崔膺烈爲在德萬戶, 李弘允爲撫夷萬戶, 韓範一爲鳥嶺別將, 金義敍爲慶尙中軍, 李鍾元爲全羅兵虞候, 金尙祿爲柔院僉使, 康孝良爲靑水萬戶, 朴昌愼爲森森坡萬戶, 金萬祥爲景福將, 金敎明·洪永疇爲慶熙將, 金薰性爲訓鍊僉正, 李鼎九爲主簿, 李圭浩爲兼司僕將, 鄭周默爲訓鍊判官, 洪萬燮·金錫輔爲文兼, 李經權爲守門將, 金學默·張鳳喆爲五衛將, 洪鍾倫爲忠壯將, 金禹圭爲訓鍊主簿, 金敬禧爲所安島別將, 宋禧來·劉致祐爲五衛將, 金泰麟爲訓鍊副正, 李奎遠爲守門將, 金正煥爲景福將, 尹啓煥·朴宗賢爲慶熙將, 任憲禹爲議政府公事官, 張泳汲·趙希永爲五衛將, 李根豐爲宣傳官, 邊晉奎爲武兼, 李建鎰爲御營從事官, 李敎春·王殷疇爲五衛將, 李奎參·李秉淑爲禁衛把摠, 任元模爲右捕從, 殷德珉爲景福將, 權起燮·金胤興爲慶熙將, 尹宜鉉爲中樞經歷, 李根周爲都摠經歷, 張繼燮爲五衛將, 李謇熙爲都摠都事, 尹錫莘爲訓鍊判官, 李經權爲主簿, 沈魯錫爲武兼, 高宅寬爲景福將, 梁鶴聲·趙顯禹爲慶熙將, 林基春爲訓鍊主簿, 趙瑋顯爲議政府公事官, 李儒行爲五衛將, 朴齊恒爲訓鍊僉正, 金文彦·鄭東明爲守門將, 李基養爲景福將, 趙東鉉·洪文羲爲慶熙將, 具寅熙爲都摠都事, 金善弘爲訓鍊主簿, 李冀周·元度常·李世鎬·權敎應·李赫周·柳箕東·李奎鳳·李秉奎爲宣傳官, 具然湜·李圭秀·金漢杓爲武兼, 朴命漢爲部將, 景元明爲部將, 加設李完根, 金炳烋爲守門將, 朴興植爲守門將, 加設平南權管單李章權, 馬馬海權管單趙羲斗, 舊KC00032坡知權管單李寅KC01687, 吾村權管單□□□, 楸仇非權管單胡允臣, 大吉號里權管單咸應周, 於汀灘權管單許怔, 聖頭里權管單鄭芝溶·梁永萬, 洞權管單康永運, 以上竝單付, 訓鍊判官陳景祥·金光弼·李一遠, 以上加設, 依定式減下, 潘羲淵爲訓鍊判官加設, 林守喆·元世哲·趙載明爲訓鍊主簿加設, 訓鍊主簿單安正民, 五衛將高啓正加設, 依定式減下, 尙州營將柳冀大, 晉州營將具駿鉉, 三陟營將金東稷, 西原營將李鍾龍, 黃海中軍李尙權, 以上竝加折衝加資事, 承傳。同知十四單安重鎭·車敬栻·邊成龍·車道亨·金萬祥·金敎明·洪永疇·金正煥·劉致浩·朴宗賢·權基燮·金胤興·尹啓煥·殷德珉。僉知十單, 金益和·李賢運·申祖顯·李本修·金翊相·金景道·高鎭衡·金學默·張鳳喆·宋熙來。副司果趙羲仁·金德潤·韓圭稷·趙載觀·李冕鎬·柳丞魯·尹致稷·孫珪憲·吳正善·李漢龜·金商鎭·白益洙·黃宗秀·朴昌運·李明鉉·徐學錫·池禹洪·金龜喜·張禹喆·閔致駿。傳曰, 守令·邊將·初仕人, 皆令明日待令。上入小次。少頃, 通禮跪, 啓請乘輿。上乘輿, 出靑陽門, 由協陽門, 入宣化門還內。諸臣以次退出。
◎ 고종 3년 병인(1866) 7월 15일(신미) 맑음 03-07-15[23]
춘당대에서 칠석제 시취를 하고 도목 정사를 행할 때 행 도승지 조석원 등이 입 시하였다
○ 진시(辰時).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칠석제(七夕製) 시취를 하고 그대로 도목 정사를 행하였다. 행 도승지 조석원(曺錫元), 좌승지 정현덕(鄭顯德), 우승지 박도빈(朴道彬), 좌부승지 이원규(李源珪), 우부승지 이연응(李沇應), 동부승지 정운귀(鄭雲龜), 가주서 - 원문 빠짐 -, 별겸춘추 남일우(南一愚)ㆍ홍원식(洪遠植)ㆍ조정섭(趙定爕), 검열 홍만식(洪萬植), 검교직제학 이재원(李載元), 검교직각 이순익(李淳翼)ㆍ민승호(閔升鎬)ㆍ이승순(李承純), 검교대교 정범조(鄭範朝)ㆍ조영하(趙寧夏)ㆍ이재면(李載冕)ㆍ조경호(趙慶鎬), 부제학 서대순(徐戴淳), 검교전한 민승호(閔升鎬), 이조 판서 이재원(李載元), 참판 김보현(金輔鉉), 참의 이순익(李淳翼), 병조 판서 이규철(李圭徹), 참판 강노(姜㳣), 참의 조채(趙埰), 참지 김창수(金昌秀)가 차례로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꿇어앉아 의장과 호종을 제자리에 정돈시키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선화문(宣化門)을 나서니, 약방 제조 김세균(金世均), 부제조 조석원(曺錫元)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그리고는 춘당대 강여소(降輿所)로 나아가니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여에서 내려 어좌에 올랐다. 승지가 표신을 내어 둘러친 포장을 열기를 계청하니, 상이 이미 내려준 표신으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승지가 입문 단자(入門單子)를 읽기를 마치고 나서 아뢰기를,
“따라 올라온 사람 중에도 시관으로 낙점된 사람이 있는데, 내려가서 함께 행례(行禮)하게 할까요?”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독권관 홍순목(洪淳穆)ㆍ김세균(金世均)ㆍ김보현(金輔鉉), 대독관 이재면(李載冕)ㆍ조영하(趙寧夏)ㆍ이순익(李淳翼)ㆍ엄세영(嚴世永) 등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차례로 자리로 나아갔다. 상이 명하여 부(賦)의 제목을 쓰게 하였는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 하여 목소리와 얼굴 빛을 바꾸지 않으니, 천하를 태산같이 안정된 곳에 둔다.[垂紳正笏 不動聲色 措天下於泰山之安]’라는 내용이었고, 마감 시간은 신시라고 썼다. 홍순목 등이 꿇어앉아 쓰고는 읽기를 마치자, 엄세영 등이 받들고 나가서 글제를 내걸었다.
상이 이르기를,
“전 황해 감사는 앞으로 나오라.”
하니, 홍순목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신이 해서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금천(金川) 조포(助浦)의 일과 관련하여 바로잡아 고친 것이 있었습니다. 이 포구는 해서(海西)의 상선이 왕래하는 한 도회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사로이 세금을 나누어 매기는 제반 명색(名色)이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없지 않았던바, 상업이 이로 인하여 침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본 고을 민고(民庫)에 붙여서 관에서 세를 거두어 공적인 경비에 보태게 하였습니다. 근래 듣건대 모리배가 다시 넘보고 있다 하니, 이것을 만약 엄히 금단하지 않으면, 금천은 일로의 으뜸가는 역참 고을이므로 허다한 책응(責應)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길이 정식으로 삼아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擧條)를 냄 - 홍순목이 또 아뢰기를,
“이로 인하여 또 우러러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포구의 폐단만 이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도내 백성들의 들과 어장은 섬과 육지의 생민이 의뢰하여 살아나가는 밑천인데, 경향(京鄕)의 무뢰배가 여러 경로를 통해 청촉을 꾀하거나 함부로 가탁하여 차지하고 빼앗아 마침내 실업(失業)에 이르게 되니, 원통하고 억울한 정상은 진실로 빈궁한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체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하는 방도에 대해 신이 이미 절엄한 자교(慈敎)를 받들었는데, 3년 간 안찰하면서 조금의 보탬도 드리지 못했으니, 삼가 황송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거듭 밝혀서 금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일체 관문으로 신칙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이르기를,
“시관은 임시로 물러가라.”
하였다. 승지가 사알을 통해 여쭙기를,
“먼저 제출한 시권이 이미 들어왔으니, 표신을 내어 포성을 연 다음 시권을 바친 유생들을 차례차례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사알을 통해 거두어진 시권 단자를 아뢰고, 이어 고시(考試)를 계품하니, 상이 고시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번에 몇 사람을 뽑을지를 계품하니, 상이 20명을 뽑으라고 명하였다. 또 과차(科次)를 계품하니, 상이 과차하여 들이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칠석제(七夕製)의 부(賦)에서 수석한 초삼하(草三下) 유학 박관양(朴寬陽)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고 그 다음 초삼하인 유학 정인건(鄭寅健) 등 2명에게는 2분을 주고, 그 다음 초삼하인 유학 조인승(曺寅承) 등 2명에게는 1분을 주고, 그 다음 차상(次上)인 장철수(張喆秀) 등 15명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 1건(件)을 사급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입격한 유생들을 내일 연영문(延英門)에서 시상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주서(注書)와 상서원(尙瑞院) 관원을 전례에 따라 승륙(陞六)하라.”
하였다. 주서 윤영신(尹榮信)을 일체 승륙하라고 탑전 하교(榻前下敎)하였다.
전교하기를,
“정사를 열라.”
하였다.
이비에, 판서 이재원(李載元), 참판 김보현(金輔鉉), 참의 이순익(李淳翼)은 나왔다. 김병연(金秉淵)을 양지 현감(陽智縣監)으로, 박제문(朴齊文)을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이병석(李秉奭)을 진천 현감(鎭川縣監)으로, 윤속(尹涑)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신석희(申錫禧)를 대사헌으로, 이인설(李寅卨)을 대사간으로, 홍재신(洪在臣)을 집의로, 이규린(李奎麟)을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박정현(朴定鉉)을 사간으로, 남이복(南履宓)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유치윤(柳値潤)을 금산 군수(金山郡守)로, 민응선(閔應善)을 교하 군수(交河郡守)로, 정숙(鄭塾)을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권한성(權翰成)을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조안섭(趙安爕)을 응교로, 홍원식(洪遠植)을 부응교로, 조석만(曺錫萬)을 헌납으로, 심의붕(沈宜朋)을 운산 군수(雲山郡守)로 신응조(申應朝)ㆍ신명순(申命淳)을 지의금부사로, 이종상(李鍾祥)을 강원도 도사로, 김봉(金鳳)을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이재현(李在顯)을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이규학(李奎鶴)을 개천 군수(价天郡守)로, 양주성(梁柱星)을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이풍익(李豐翼)을 동지 정사로, 이세기(李世器)를 부사로, 엄세영(嚴世永)을 서장관으로, 이한규(李漢奎)를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김성익(金性翼)을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이흥철(李興喆)을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홍종만(洪鍾晩)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유석(柳奭)을 무산 부사(茂山府使)로, 최석규(崔奭奎)ㆍ홍희린(洪羲麟)을 장령으로, 서학문(徐鶴聞)ㆍ한준희(韓俊熙)를 지평으로, 정기회(鄭基會)를 대사성으로, 이원린(李源麟)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최우기(崔遇基)를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안익풍(安翊豐)을 금교 찰방(金校察訪)으로, 이승수(李承洙)를 주서로, 이용만(李容萬)을 정언으로, 이익(李)을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홍종헌(洪鍾軒)을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여규익(呂圭益)을 강동 현감(江東縣監)으로, 서원순(徐元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망통(望筒)을 지체한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추고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해당 주서 방효린(方孝麟)을 추고하라.”
하였다.
이우회(李友會)를 정언으로, 홍순목(洪淳穆)을 판윤으로, 김보현(金輔鉉)을 동지춘추관사로, 김원식(金元植)을 좌윤으로, 정택선(鄭宅善)을 우윤으로, 유정환(兪貞煥)을 부교리로, 홍유명(洪裕命)을 동지경연사로, 이용우(李龍雨)를 주서로, 권경선(權敬善)을 장릉 참봉(長陵參奉)으로, 김학년(金學年)을 현릉 참봉(顯陵參奉)으로, 유치화(兪致和)를 영릉 참봉(永陵參奉)으로, 민종덕(閔種德)을 정릉 참봉(靖陵參奉)으로, 정준화(鄭駿和)를 의릉 참봉(懿陵參奉)으로, 홍찬주(洪瓚周)를 희릉 참봉(禧陵參奉)으로, 이이두(李以斗)를 장릉 참봉(蔣陵參奉)으로, 이만원(李萬遠)을 수릉 참봉(綏陵參奉)으로, 권응우(權應禹)를 경릉 참봉(景陵參奉)으로, 홍병균(洪秉均)을 예빈시 참봉으로, 황이주(黃履柱)ㆍ박성발(朴聖發)ㆍ김상효(金尙斅)를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으로, 황희룡(黃羲龍)을 가인의(假引儀)로 삼았다.
병비에, 판서 이규철(李圭徹), 참판 강노(姜㳣), 참의 조채(趙埰), 참지 김창수(金昌秀)는 나왔다.
이유응(李裕膺)을 부총관으로, 한원식(韓元植)을 동지로, 이순기(李舜器)를 선전관으로, 정완묵(鄭完默)을 내금위장으로, 김필구(金弼求)를 공사관(公事官)으로, 백낙삼(白樂三)을 선전관으로, 유기대(柳冀大)를 상주 영장(尙州營將)으로, 구준현(具駿鉉)을 진주 영장(晉州營將)으로, 이종룡(李鍾龍)을 서원 영장(西原營將)으로, 김동직(金東稷)을 삼척 영장(三陟營將)으로, 이상권(李尙權)을 황해도 중군으로, 신조현(申祖顯)을 오위장으로, 손해원(孫海遠)을 경주 영장(慶州營將)으로, 오학선(吳鶴善)을 나주 영장(羅州營將)으로, 안석기(安錫麒)를 경상도 중군으로, 남궁옥(南宮鈺)을 신광 첨사(神光僉使)로, 권영수(權永秀)를 부총관으로, 이방현(李邦鉉)을 훈련원 도정으로, 서광복(徐光復)을 훈련원 정으로, 이규삼(李奎參)을 도총부 경력으로, 이종완(李種完)을 공충도 병마우후로, 이본수(李本修)ㆍ김익상(金翊相)ㆍ김익화(金益和)를 오위장으로, 이현운(李賢運)을 충장위장으로, 이노수(李魯洙)를 훈련원 판관으로, 김경도(金景道)ㆍ고진형(高鎭衡)을 오위장으로, 차경식(車敬栻)을 경복궁 위장으로, 변성룡(邊成龍)ㆍ차도형(車道亨)을 경희궁 위장으로, 전중민(田重民)을 평신 첨사(平薪僉使)로, 김석항(金錫恒)을 위도 첨사(蝟島僉使)로, 차원모(車元模)를 고금도 첨사(古今島僉使)로, 김진형(金晉炯)을 이진 만호(梨津萬戶)로, 정필관(鄭弼寬)을 흑산도 별장(黑山島別將)으로, 김형달(金亨達)을 소근 첨사(所斤僉使)로, 전기청(田基靑)을 서림 첨사(西林僉使)로, 김종범(金宗範)을 볼하 첨사(乶下僉使)로, 김학소(金學素)를 유원 첨사(柔遠僉使)로, 이성교(李星敎)를 다경포 만호(多慶浦萬戶)로, 이윤형(李允亨)을 임치 첨사(臨淄僉使)로, 김득필(金得弼)을 노강 첨사(老江僉使)로, 이종배(李宗培)를 포이 만호(包伊萬戶)로, 옥내석(玉乃錫)을 위라 만호(位羅萬戶)로, 정재기(鄭在璣)를 금성 별장(金城別將)으로, 박진건(朴震楗)을 동관 첨사(潼關僉使)로, 공상문(公尙文)을 벌등 첨사(伐登僉使)로, 최응렬(崔膺烈)을 재덕 만호(在德萬戶)로, 이홍윤(李弘允)을 무이 만호(撫夷萬戶)로, 한범일(韓範一)을 조령 별장(鳥嶺別將)으로, 김의서(金義叙)를 경상도 중군으로, 이종원(李鍾元)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김상록(金尙祿)을 유원 첨사(柔院僉使)로, 강효량(康孝良)을 청수 만호(靑水萬戶)로, 박창신(朴昌愼)을 삼삼파 만호(森森坡萬戶)로, 김만상(金萬祥)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교명(金敎明)ㆍ홍영주(洪永疇)를 경희궁 위장으로, 김훈성(金薰性)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정구(李鼎九)를 주부로, 이규호(李圭浩)를 겸사복장으로, 정주묵(鄭周默)을 훈련원 판관으로, 홍만섭(洪萬爕)ㆍ김석보(金錫輔)를 문신겸선전관으로, 이경권(李經權)을 수문장으로, 김학묵(金學默)ㆍ장봉철(張鳳喆)을 오위장으로, 홍종륜(洪鍾倫)을 충장위장으로, 김우규(金禹圭)를 훈련원 주부로, 김경희(金敬禧)를 소안도 별장(所安島別將)으로, 송희래(宋禧來)ㆍ유치우(劉致祐)를 오위장으로, 김태린(金泰麟)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규원(李奎遠)을 수문장으로, 김정환(金正煥)을 경복궁 위장으로, 윤계환(尹啓煥)ㆍ박종현(朴宗賢)을 경희궁 위장으로, 임헌우(任憲禹)를 의정부 공사관으로, 장영급(張泳汲)ㆍ조희영(趙希永)을 오위장으로, 이근풍(李根豐)을 선전관으로, 변진규(邊晉奎)를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건일(李建鎰)을 어영청 종사관으로, 이교춘(李敎春)ㆍ왕은주(王殷疇)를 오위장으로, 이규삼(李奎參)ㆍ이병숙(李秉淑)을 금위영 파총으로, 임원모(任元模)를 우변포도청 종사관으로, 은덕민(殷德珉)을 경복궁 위장으로, 권기섭(權起爕)ㆍ김윤흥(金胤興)을 경희궁 위장으로, 윤의현(尹宜鉉)을 중추부 경력으로, 이근주(李根周)를 도총부 경력으로, 장계섭(張繼燮)을 오위장으로, 이건희(李謇熙)를 도총부 도사로, 윤석신(尹錫莘)을 훈련원 판관으로, 이경권(李經權)을 주부로, 심노석(沈魯錫)을 무신겸선전관으로, 고택관(高宅寬)을 경복궁 위장으로, 양학성(梁鶴聲)ㆍ조현우(趙顯禹)를 경희궁 위장으로, 임기춘(林基春)을 훈련원 주부로, 조위현(趙瑋顯)을 의정부 공사관으로, 이유행(李儒行)을 오위장으로, 박제항(朴齊恒)을 훈련원 첨정으로, 김문언(金文彥)ㆍ정동명(鄭東明)을 수문장으로, 이기양(李基養)을 경복궁 위장으로, 조동현(趙東鉉)ㆍ홍문희(洪文羲)를 경희궁 위장으로, 구인희(具寅熙)를 도총부 도사로, 김선홍(金善弘)을 훈련원 주부로, 이기주(李冀周)ㆍ원도상(元度常)ㆍ이세호(李世鎬)ㆍ권교응(權敎應)ㆍ이혁주(李赫周)ㆍ유기동(柳箕東)ㆍ이규봉(李奎鳳)ㆍ이병규(李秉奎)를 선전관으로, 구연식(具然湜)ㆍ이규수(李圭秀)ㆍ김한표(金漢杓)를 무신겸선전관으로, 박명한(朴命漢)을 부장으로, 경원명(景元明)을 부장 가설로, 이완근(李完根)ㆍ김병휴(金炳烋)를 수문장으로, 박흥식(朴興植)을 수문장 가설로 삼았다. 평남 권관(平南權管)에 이장권(李章權)을 단부하고, 마마해 권관(馬馬海權管)에 조희두(趙羲斗), 구갈파지 권관(舊坡知權管)에 이인희(李寅), 오촌 권관(吾村權管)에 - 원문 빠짐 -, 추구비 권관(楸仇非權管)에 호윤신(胡允臣), 대길호리 권관(大吉號里權管)에 함응주(咸應周), 어정탄 권관(於汀灘權管)에 허정(許怔), 성두리 권관(聖頭里權管)에 정지용(鄭芝溶), 양영만동 권관(梁永萬洞權管)에 강영운(康永運), 이상을 모두 단부(單付)하였다. 훈련원 판관 진경상(陳景祥)ㆍ김광필(金光弼)ㆍ이일원(李一遠)의 가설은 정식대로 감하였다. 반희연(潘羲淵)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임수철(林守喆)ㆍ원세철(元世哲)ㆍ조재명(趙載明)을 훈련원 주부 가설로 삼았으며, 훈련원 주부에 안정민(安正民)을 단부하였다. 오위장 고계정(高啓正)의 가설은 정식대로 감하였다. 상주 영장(尙州營將)에 유기대(柳冀大), 진주 영장(晉州營將)에 구준현(具駿鉉), 삼척 영장(三陟營將)에 김동직(金東稷), 서원 영장(西原營將)에 이종룡(李鍾龍), 황해도 중군에 이상권(李尙權)을 단부하고, 이상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 열 네 자리에 안중진(安重鎭)ㆍ차경식(車敬栻)ㆍ변성룡(邊成龍)ㆍ차도형(車道亨)ㆍ김만상(金萬祥)ㆍ김교명(金敎明)ㆍ홍영주(洪永疇)ㆍ김정환(金正煥)ㆍ유치호(劉致浩)ㆍ박종현(朴宗賢)ㆍ권기섭(權基爕)ㆍ김윤흥(金胤興)ㆍ윤계환(尹啓煥)ㆍ은덕민(殷德珉)을 단부하고, 첨지의열에 김익화(金益和)ㆍ이현운(李賢運)ㆍ신조현(申祖顯)ㆍ이본수(李本修)ㆍ김익상(金翊相)ㆍ김경도(金景道)ㆍ고진형(高鎭衡)ㆍ김학묵(金學默)ㆍ장봉철(張鳳喆)ㆍ송희래(宋熙來)를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조희인(趙羲仁)ㆍ김덕윤(金德潤)ㆍ한규직(韓圭稷)ㆍ조재관(趙載觀)ㆍ이면호(李冕鎬)ㆍ유승로(柳丞魯)ㆍ윤치직(尹致稷)ㆍ손규헌(孫珪憲)ㆍ오정선(吳正選)ㆍ이한귀(李漢龜)ㆍ김상진(金商鎭)ㆍ백익수(白益洙)ㆍ황종수(黃宗秀)ㆍ박창운(朴昌運)ㆍ이명현(李明鉉)ㆍ서학석(徐學錫)ㆍ지우홍(池禹洪)ㆍ김귀희(金龜喜)ㆍ장우철(張禹喆)ㆍ민치준(閔致駿)을 단부하였다.
전교하기를,
“수령, 변장, 초사인(初仕人)을 모두 내일 대령시키라.”
하였다.
상이 소차에 들어갔다. 잠시 후에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 오르기를 계청하니, 상이 여에 올랐다. 청양문을 나서서 협양문을 경유하여 선화문으로 들어가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참고로, 훈련원(訓鍊院)은 조선 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의 습독(習讀)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지사(知事, 정2품) 1인은 타관(他官)이 겸했고, 도정(都正, 정3품당상관) 2인 가운데 1인도 타관이 겸했으며, 정(正, 정3품당하관) 1인, 부정(副正, 종3품) 2인, 첨정(僉正, 종4품) 2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참군(參軍, 정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2인이었다. 그 밖에 습독관(習讀官)이 30인 있었는데, 이들은 병요(兵要)·무경칠서(武經七書)·통감(通鑑)·장감(將鑑)·박의(博議)·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을 습독하고, 사어(射御)를 익혔다. 관원은 모두 무관으로 임용되었는데, 특히 정은 당상관으로 승진될 수 있었다.
판관(判官)은 훈련원의 행정실무를 지휘,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군정에 참여하였다. 조선 초에 종5품관인 판관이 설치된 관아로 중앙에는 상서원·사옹원·내자시·내섬시·군자감·제용감·봉상시·내의원·예빈시·관상감·전의감·사복시·군기시·상의원·선공감·전함사 등이 있고, 지방에는 도·유수부·대도호부·목·도호부 등이 있으며, 그 뒤에 한성부·사역원·훈련원·돈녕부 등 중앙관아에 증치되었다.
- 이명수 처 남원김씨(李明秀 妻 南原金氏) 태종 / 양녕대군파 / 함양군파 13대
이명수 처 남원김씨(李明秀 妻 南原金氏) | ||
이명수(李明秀), 전주이씨(全州李氏) | 태종 / 양녕대군파 / 함양군파 13대 | |
이명수(李明秀) 처부(妻父) | 김광필(金光弼), 訓鍊判官, 종5품 | |
조부 이형엽(李亨燁) | 三馬洞子坐 | |
부 이태환(李泰煥) | 1855년(철종 6년) 을묘생(乙卯生) | |
본인 이명수(李明秀) | 1876년(고종 13년) 병자생(丙子生) | |
남원김씨(南原金氏) | 當宁丙子九月三日生娶南原金光弼女己卯生 | |
선영(先塋) |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汀浦洞 僧臥隅壬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