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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씨앗교회 10주년 기념예배
“주님 안에서 자라나는 성전”
에베소서 4장 교독문 81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2장 17-22절 말씀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이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시다.”
들꽃향린교회 김경호 목사 초청 설교 말씀
설교말씀 요약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지킬까?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랑해야할 교회입니다.
하늘씨앗교회 1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순천에 이 귀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송기득 교수, 홍순관목사, 한성수 목사, 김남규 목사 등 귀한 인물만 보내주신 것을 보면 하늘씨앗 교인들은 복받은 교우들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같이 고민해 보는데 의미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볼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앞으로의 10년 기도하고 추구할 문제를 생각하며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성전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은 보이는 건물, 교회 재산, 숫자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도와 예언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진 건물이요. 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가 그 모퉁이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주님 안에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 연결되어 맺는 것이 성전입니다.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가 아름다운 성전이 됩니다. 보이는 크기나 숫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건물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결이 되어 주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것이 성전입니다. 자라게 된다는 말은 희랍어로 오이코도멘(oikodomen 영어 building, 21절)입니다.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각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리에서 각자 자기 몫을 다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간다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건물입니다. 그것이 연결되어 성전이 됩니다. 모든 차별이 소멸되고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 거룩한 성전이 되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됩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목표
우리는 흔히 교회를 목표로 삼습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목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위해 필요한 조직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재림이 올거라고 믿었습니다. 불의한 통치자들 그 당시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통치자를 무릎 꿇리는 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의 시간이 늦어지자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늘려 놓았습니다. 그 늘어진 중간 시간에 유용한 것이 교회의 조직입니다. 그 기간이 교회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중간의 경과조직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를 잊고 교회만 목표가 됐습니다.
어떤 비전을 갖느냐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열매가 맺어질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안디옥 교회 등 그 유명한 교회들은 교회라는 건물이 없이 가정 집에서 모였습니다. 가정에서 모이니 가정에서 큰 공간이 다락방이었는지 2층 다락방에 모여 예배하다가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기도 했습니다. 많이 모여봐야 20-30명입니다.
지난번 여러분의 토론회를 보면 앞으로 10년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를 불안해 했는데 여러분이 어떤 비전을 갖느냐에 따라 상상할 수 없는 열매가 맺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만들어 갑니다.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로마사회에서 초대 교회 교인들의 인구는 인구의 0.1%도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시대에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됩니다. 지루하고 답답했겠지요. 20-30명 정도의 고린도 교회는 그나마 네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자체에 목표를 두고 살면 실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목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죽어줄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교회론이고 선교론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자체를 강한 성체로 만들려고 하기에 한국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 어떻게 주어진 역량과 조건을 소모시키고 쓸까? 그것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어떻게 죽을까를 탐구하는 것, 죽을 자리를 찾는 것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들 각자의 신앙의 자리는 내가 죽을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죽을 자리라는 것을 찾은 분들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물리적인 목숨을 유지할까 노력하는 것은 십자가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자리를 찾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위해 가셨듯이 내가 죽을 자리가 어딘가를 찾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루어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나 혼자서 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은 좋은 뜻을 세우고 찾아낸다 해도 그것을 이루어 가며 살기가 어렵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하는 구조 속에서는 뜻을 아무리 숭고하게 가지고 있다해도 어렵습니다. 바울 사도는 개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즉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개개인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뜻은 있지만 그것을 이루어가기에는 돈이 허락되지 않는다든가 돈은 있지만 시간이 나지 않는다든가 하나가 되면 하나가 안됩니다. 이런 부족함을 가진 개개인이 모여져 된 교회,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실천단위입니다. 교회라는 집단의 인격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서 부여받은 새로운 인격입니다. 교회 집단의 인격, 우리는 그 안에 새로운 지체들입니다. 이 교회가 무엇을 실천하고 무엇을 이루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삶의 본체입니다.
집단이 무엇을 이루는가? 뜻있는 개인들이 모여 열 사람이 모이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모여 오늘의 기독교를 세웠습니다. 뜻을 같이 한 열 사람이 모여 진심으로 기도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뜻과 의지와 진심의 문제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자기 자신을 내어준 것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어떻게 이 교회를 희생시킬까? 어떻게 이 교회를 소멸시킬까? 연구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지역 공동체, 민족과 연대해 자기 자신을 던질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그것이 교회의 선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맛본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시는 부활의 능력을 비로소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워싱턴 디시에 있는 빈민가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하겠습니다. 1947년에 세워진 그 교회는 고든과 메리 코스피라는 분이 세웠는데 2차 세계대전 때 파송되어 전쟁을 치른 후에 크리스챤의 삶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초대교회가 가진 급진적인 헌신성을 갖고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목표를 갖고 목회를 하는데 교회 설립 후 50년이 지난 1995년 에야 교인이 150명이 됩니다. 그동안은 그들이 뜻을 세우고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규모가 안되는 거예요. 150명이 되었을 때야 결단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에서 하자고. 150명이 6개 교회로 분가를 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로 분가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로 분가합니다. ‘토기장이의 집’이라고 카페와 서점을 겸한 찻집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자기들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복음의 장소가 되도록 했습니다. ‘요셉의 집’은 죽어가는 노숙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사랑을 베푸는 장소로 이용합니다. ‘사라의 집’은 가난한 노인들에게 낮은 비용으로 집을 제공하고 영적인 돌봄을 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집’이라고 병원 치료후 다시 노숙인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영적 치료와 재활서비스를 합니다 ‘섬김과 리더십 스쿨’이라는 공동체에서는 대안적인 신학교육을 통해 봉사합니다.
열명 만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이면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분가시킵니다. 내 소명의 자리를 찾아내면 그 사람에게 안수를 줍니다. 자기의 헌신의 자리를 찾아낸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 줍니다. 안수를 우리나라는 간단하게 하는데 외국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의 소명의 길을 찾게 하고 모든 사람이 축복해 줍니다. 비슷한 소명을 가진 사람을 찾아 자기가 발견한 소명지에 엮어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2006년 분가후 10년 만에 미국을 움직이는 10대 교회로 ‘토기장이의 집’이 선정됩니다. 인원은 적지만 교회라는 것이 교회건물, 크기,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지만 그 뜻을 이루어 가는가? 그것이 보이면 정신적인 기둥이 되고 그 나라를 움직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됩니다. 그런 사역을 하는 것이 ‘세이비어 Church’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 독일의 교회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손을 들어주고 히틀러를 합리화했습니다. 소수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이건 아니다”며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암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당시 히틀러에 동조한 숫자가 99.9%입니다. 거기에 대해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은 0.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독일 교회의 고백은 “우리는 고백교회의 신앙전통을 이은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숫자로 보면 99%가 넘는 사람이 교회의 맥이 되지 못했습니다. 0.1`%가 독일 교회 전체의 맥줄이 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숫자에 주눅 들지 마세요. 이 정도 숫자면 지구를 몇 번이나 바꿀수 있는 숫자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비전, 어떤 마음, 우리들의 진심을 어떻게 모아 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날뛰게 한다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온 교회 교우들이 신사를 향해 절을 하고 그 뒤 십자가를 열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난 뒤 또 신사를 열고 절을 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것이 보기 싫은 사람들은 늦게 예배에 참여하고 일찍 나가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신사참배할 때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몇몇 분이 투옥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한국 교회 교단들이 다 같이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해방이후 교단별로 총회를 하는 자리에서 양심적인 목사들이 “우리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 고백을 하자”고 발언 한 사람들은 벌떼같이 손가락질을 당하고 “네가 교회를 아느냐? 우리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는지 아느냐” 며 그들을 파문하고 쫒아냈습니다. 결국은 죄책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60년이 지난 다음 복음 교단들이 처음으로 고백했습니다. 그 다음에 기장 교단에서 했습니다. 다른 교단은 죄책을 아직도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순교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대를 이어 받은 교회라고 고백할 수 있는 터가 있다는 것입니다. 몇 분의 순교자지만 그들을 통해 교회가 살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런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그런 전통이 없습니다. 일본 교회가 대동아전쟁 때 전쟁을 독려할 때 교회가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소수가 깨어서 박해받고 자기들의 꿈을 꾸어가고 그러다가 망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정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날뛰게 한다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를 참배하고 전쟁 물자를 모으는 운동에 교회 종을 떼어 헌납하기 운동을 벌이며 호응한 사람들이 펼치는 논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엿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키는 교회는 뭡니까?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단지 교회의 재산과 건물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보이는 건물이나 재산, 교인의 머릿수는 우리가 지켜야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굽히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랑해야할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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