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격자창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담한 13평 공간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나무 서가에는 철학·문학·예술·교육·생태환경등 6개 분야 인문학 책 3,000여 권이 빼곡히 꽂혀 있다. 중고생이 주 고객인 서점이지만 참고서나 문제집은 찾아볼 수 없다. 은은한 간접조명에 키 큰 나무 화분들과 허브, 장미꽃 다발….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서재에 들어온 듯한 기분에 책 한 권 빼들고 소파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지고 싶어진다.
이 아름다운 서점의 주인은 허아람 씨(35세)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전용 서점’을 표방하며 2004년 8월 문을 열었다. 이곳을 찾는 청소년들은 그를 ‘아람 샘’이라 부른다. 대학 1학년 때부터 15년 넘게 독서지도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독서와 글짓기 지도를 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게 있었다.
‘동네마다 빼곡히 들어선 학원 대신 작은 책방들이 세워져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그곳에서 실컷 책을 읽고 토론을 벌일 수 있다면….’
서른 넘어 떠난 유럽여행에서 그는 이 꿈을 더 구체화시켰다. 일부러 대학도시들을 다니며 그곳 도서관과 서점들을 돌아본 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귀국하자 서점 개점을 서둘렀다. 책방 이름은 ‘인디고 서원’이라고 붙였다. 인디고는 쪽에서 나오는 천연 색소로, 심리학 용어로 ‘인디고 세대’는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자립적인 아이들’을 뜻한다. 허아람 씨의 이름 중에도 쪽빛(藍)이 들어 있다.
장영희, 최재천, 진중권 등 최고의 저자 초청해 토론회
“청소년에게 인문학의 향기를 맡게 하려 서점을 열었다”는 ‘인디고 서원’ 대표 허아람 씨. |
문을 연 지 1년 반 된 인디고 서원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한 달에 한 번씩 여는 독서토론회 ‘주제와 변주’ 덕이었다. 장영희, 최재천, 진중권, 도정일, 박홍규, 한홍구 등 내로라하는 저술가들이 청소년들과 토론을 벌이기 위해 이 작은 서점을 찾았다.
“서점을 열고 얼마 후 우리끼리 독서토론회를 시작했어요. 첫 책이 정신적 스승이 될 만한 사람 61인의 이야기를 담은 《틱낫한에서 촘스키까지》였지요. 그런데 ‘저자가 이 자리에 와서 함께 토론을 벌인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못 할 것도 없지’라는 생각에 실행에 옮겼습니다.”
제일 처음 초청한 저자가 《소설 속의 철학》을 쓴 부산대 이왕주 교수였다. 학교에 찾아가 ‘인디고 서원’을 만들게 된 취지와 토론회에 대해 설명했더니 흔쾌히 참석하겠다고 했다. 이후로도 강사 초청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이라는 사람들을 부산까지 불러들이는 데는 특별한 비법이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메일 편지로 우리 서점에 대해 설명하면서 초청을 하면 대부분 흔쾌히 응해 주셨어요. 간혹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 안식년 중이라 해외에 있다’든가 ‘장편소설 집필 중이라 끝나면 찾아가겠다’는 등 피치 못할 이유에서였죠.”
그 과정을 통해 허아람 씨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름만 듣던 저자들의 참여에 청소년들도 감동하지만, 초청 강사들도 토론회의 진지한 분위기에 감동하고 만다고 한다.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시대에 인문학의 힘을 믿는 여러분이 있어 고맙고 마음 든든하다”고 했고, 이왕주 교수는 “일그러진 교육제도로 부서진 희망을 여기에서 다시 발견하는 기분”이라며 두 번씩이나 초청에 응했다.
토론장의 분위기가 진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청소년들은 홈페이지(www.indigo-ground.net)에서 강연할 책 제목을 확인해 읽은 후 A4용지 한 장에 독서 감상문과 질문을 빽빽이 적어 와야만 입장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토론회 때마다 100여 명이 참석하는데, 마산, 창원에서 오는 학생도 있다. 이들이 토론장을 떠날 때는 저마다 인생의 화두 하나씩을 안고 간다. 이왕주 교수는 “여러 가지 가면(persona)을 가지고 인생을 살라”, 진중권 씨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철들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최재천 교수는 “청소년의 방황은 그 자체가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길”이라고 아이들을 격려했다.
허아람 씨가 청소년들을 위해 일을 벌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교 시절 그는 스스로 왕따가 된 일명 ‘자따’였다. 강압적인 교육제도 앞에서 입을 닫아 버렸다. 마음을 나누는 친구 한둘을 빼고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고, 자습 시간엔 학교 뒷산에 올라가 시를 끄적이곤 했다. 느닷없이 머리를 빡빡 밀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부산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후 서서히 밝은 성격을 되찾아 가는 그를 보고 고등학교 동기들은 “너 사이코인 줄 알았더니, 말도 잘하네” 하고 신기해했다. 대학 1학년 때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독일에서 살다 온 초등학생의 독서 지도를 해 주게 된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내 맘대로 수업을 고안해 가르치는 게 너무 신이 났어요. 노래, 연극 등 별별 실험적 방법을 다 써먹었지요.”
금세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나면서 여러 팀을 맡게 됐고, 어느덧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논술 선생님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논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히면서 토론을 하게 했는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 대부분이 명문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내가 잘 가르친 게 아니라, 책이 가르쳐 준 것”이라며, “책의 힘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체적인 사유(思惟)’다. 사람마다 그릇은 다르지만,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책이 가르쳐 준다고 허아람 씨는 믿는다. 최근 그는 책 두 권을 잇달아 펴냈다. 인디고 서원을 열고 운영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인디고 서원, 내 청춘의 오아시스》를 지난 연말에 냈고, 2월에는 ‘주제와 변주’에서 오간 토론 내용을 대담 형식으로 엮어 책으로 펴냈다. 인디고 서원의 취지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독서토론회를 끝낸 후 참가 청소년들과 함께. |
그런데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지만, 이런 서점이 운영이나 될까? 안 팔리기로 소문난 인문학 서적들만 팔고 있으니…. 허아람 씨는 “처음부터 5년은 밑질 각오하고 시작했다”며 웃었다. 그래도 점점 찾는 사람이 늘어서 희망적이라는 것. 무엇보다 “내가 즐거워서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공감해 주는 사람이 많고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다고 평가받으니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디고 서원 창립문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멀고 하염없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멀고 하염없는 꿈을 그 언젠가 이룰 수 있는 그날까지 인디고 서원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
2006.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