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친일파였으며 늙어서는 전두환에게 축시를 바친, 정치적으로는 옳지 못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제적 인물 미당은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소설가 김영하 씨는 지난 2000년 미당이 작고한 뒤, 영화잡지 ‘씨네 21’(2001)에 이렇게 썼다. 이렇게 쓸 만하다. 작품만큼 삶이 논란이 되는 시인이 미당 서정주(1915~2000)다. 그는 한국의 토속성을 언어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한편으론 일제와 독재에 부응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난과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의 고향인 전북에서조차 그를 기리는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미당의 역사적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수용하고 비판하면서 그의 좋은 작품들을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지켜가는 길은 없을 것인가. 미당의 문학적 성취와 함께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전북의 문화적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방안을 10부에 걸쳐 모색한다.
△생애와 작품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다. 그는 1933년부터 2000년까지 68년 동안 창작활동을 하면서 15권의 시집과 10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1933년 동아일보에 투고했던 ‘그 어머니의 부탁’에서부터 시집인 <화사집>(1941), <귀촉도>(1946),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를 비롯, 마지막 발표작품인 ‘2000년 첫날을 위한 시(중앙일보 2000)’까지 서정시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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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마재 마을에 있는 미당생가. |
그는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뒤, 부안으로 건너가 1929년까지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년 뒤 인촌 김성수의 집안에서 세운 중앙고보 입학시험에 낙방했지만, 김성수 가의 농사 마름이었던 아버지의 정성으로 보결입학했다고 전해진다.
1930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지지 시위 주모자 중 하나로 퇴학당했고, 1년 뒤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권고 자퇴 당했다. 1933년 선배인 배상기의 안내로 박한영 대종사 문하생으로 입문해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다음 해 봄까지 수학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당선되고, ‘시인 부락’이라는 동인지를 주재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국민시인’ 으로 호명될 만큼, 평생에 걸쳐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주옥같은 작품을 생산했다. 서정주 사단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시인이 되려면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한국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시, 소설, 수필, 르포 등 11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해 인생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 결과 미당은 지난 2000년 사후, 기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가 작고한 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지난 2001년에는 질마재 마을의 미당시 문학관이 지어지고, 중앙일보 등이 후원하는 미당문학제, 백일장 등이 열리고 있다.
반면 박정희 정권 때 국민의 월남 참전을 고무찬양하고 1987년 전두환 생일 축시 ‘처음으로’를 발표한 점 등은 현재도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가 검인정 교과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미당의 시가 많이 사라졌고, 지난 2005년 대통령 직속기구로 발족된 친일반민족진상규명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다.
△한국문단에서의 위상과 기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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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 시문학관. |
한국문단에서 미당은 분명히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9년 발표된 김춘식 교수의 논문 “자족적인 ‘시의 왕국’과 ‘국민시인’의 상관성”에 따르면, 미당은 1955년 ‘서정주 시선’을 발간한 직후, 문단적 위상이 ‘국민시인’으로 올라갈 만큼 확고해졌다. 당시 문단과 독자들은 한국전쟁 이후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미당의 시편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미당은 당대의 문학적 자장 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했다.
당시 그에 대한 찬사를 통해서도 위상을 알 수 있다. “서정주는 시의 정부다(고은 시인)”, “부족 방언의 요술사(유종호 교수)”,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시인(김재홍 교수)” 등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문단에서 미당의 이러한 위상은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 대두한 친일청산담론과, 그가 보여준 신군부에 대한 옹호태도는 미당의 ‘신화적 위상’을 약화시켰다. 이후 미당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한국문학의 거장’과 ‘반민족적 기회주의 지식인의 전형’사이를 오가게 됐다.
미당이 죽은 후에도 그의 정치적 행적과 문학적 성취에 대한 찬반의 평가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다. 그의 시는 한국문학의 성취에 대한 평가의 한 척도로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다.
한국문단에서 미당에 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미당의 문학과 정치적 행보를 별개로 보고 그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자는 논의, 다른 하나는 미당이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도 독재정권을 찬양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의 문학성도 비판받아야 한다는 논의들이다. 마지막으로는 미당의 문학과 정치적 행보를 구별해, 정치적 행보를 비판하면서도 문학성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근에는 마지막 관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올해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인 서정주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도내에서는 김동수 백제대 명예교수, 송하선 우석대 명예교수 등 원로급 문인이 중심이 된 미당문학회가 만들어졌고, 지난 4일에는 미당시낭송회가 창립했다.
또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지난 2001년부터 탄생 100주년을 맞은 문학인을 기리는 행사를 여는 가운데 올해는 아동문학가 강소천, 평론가 곽종원, 시인 박목월·서정주, 여성 소설가 임순득·임옥인, 극작가 함세덕, 소설가 황순원 등 8명을 선정했다.
이들 단체와 행사에 참여한 원로급 학자와 문인은 미당이 친일과 독재 찬양의 논란이 있지만 공과 과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다.
전정구 전북대 교수는 “미당의 과오는 시대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며 “그의 과오를 변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간 진영논리에 매몰돼 미당을 평가하지 않았는지 반성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봉준 경희대 후마니타스 객원교수는 “미당의 공과 과 모두 그의 문학과 직결될 수 있다” 며 “균형잡힌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당문학회의 김동수 회장은 “미당의 문학적 가치를 정치적 관점과 직결시켜 폄하하거나 아예 우리의 문학사에서 배제시켜서는 안된다” 며 “너무나 아까운 문학적 성과와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