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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棲公墓碣銘 - 諱時文 禮安之龍頭山南雲谷午向之原卽故贈參判雲棲李公之藏也噫公之沒已百十有五年而無有顯刻玄 孫裕麟裕定等思所以表其墓述遺跡俾余銘之余固不堪而窃歎其篤於誠而敏於事也謹按公諱時文 字奎瑞姓李氏永川人麗季軍器少尹諱軒始居禮安之汾川至玄孫諱賢輔位崇品謚孝節世稱聾巖先 生先生之第五子曰縣監季樑縣監之孫曰主簿芸龍蛇亂背負陶山位版轉至紹修院亂定後還奉丁酉 又往火旺協贊禦賊是爲公七世祖曾祖諱東洙通德郞祖諱秀馦贈司僕正始居雲谷考諱英春贈吏議 妣淑夫人橫城趙氏通德郞永臣之女生以正廟辛亥甫四歲先公棄背自以不得承歡爲至痛事母夫人 盡誠不以貧窶有所闕養祭先所羞必前期偏置常以勤儉爲主苟有非義一毫不取至處族居鄕無間親 疎得其歡心盖所性然也癸巳丁內艱執禮不懈服闋淨處一室對案觀書時雲山李公彙載秉拂一方公 自少相識居又密通杖屨屢從至公沒李公輓曰與公相識自童年歲暮窮山共白顚雙屩隨身是坦道一 經敎子便良田汾陽尙有家聲遠雲谷便宜地界圓人去九原難復作哀詞題送更泫然可見其交好之深 也己未七月旣望續九老會于愛日堂越重陽又會肯搆堂時族兄无憫齋時養年高九十一鄕搢紳齊參 古溪李公彙寧作詩序其事公亦追與之會焉庚申二月五日考終于寢享年七十配貞夫人安東權氏忠 定公後思良之女有婦行後公十五年卒葬大峴鷹放嶝癸坐生二男四女長洙鉉壽同樞泗鉉通德郞權 政淳李鉉相金禮根趙鑽仁其婿也我大祖後承布濩坊谷其麗甚多雖乏宦業之繼承而猶此重名敎尙 彛倫白直庸行不失儒者氣象亦足以稱述貽謨而乃遯跡林間無所成名士固有命于天而不能不爲公 深慨者矣噫世遠人亡滄桑屢變公後孫亦多挈寓他境而尙以尊祖敬宗爲重莫非公風韻之攸在而餘 慶之所曁也盖聞醴泉之源靈液不渴其斯之謂歟銘曰 有美雲谷地符考亭松桂蓊鬱石泉鏘鳴碩人 攸芋考槃在玆鑿斯耕斯送光明時家有儒素詩禮本色于以修潔于以燕翼有裕其承宛遺澤遹追孝思 謀擧匠石鑱辭示後輝映楸松栢我豈夸辭庸揭幽宅 甲寅冬至節門孫龍九謹撰
운서공 묘갈명 - 휘 시문 예안의 용두산 남쪽 운곡의 오향(자좌) 언덕은 바로 돌아간 증 참판 운서(雲棲) 이공의 무덤이다. 아! 공이 돌아가신지 이미 百十五년인데 비석이 없어서 현손 유린(裕麟)과 유정(裕定) 등이 묘소에 비석을 할 생각으로 유적(遺跡-남긴 자취)을 기술(記述)하여 나로 하여금 명(銘)을 하라는데 나는 참으로 감당할 수 없으나 독실한 정성과 재바른 일처리에 저절로 감탄했다. 삼가 헤아리니 공의 휘는 시문(時文)이고 자는 규서(奎瑞)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영천인(永川人)이다. 고려 말엽에 군기시 소윤을 지낸 휘 헌(軒)이 처음으로 예안의 부네에 살았고, 그의 현손에 이르러 휘 현보(賢輔)는 벼슬이 숭정(崇政)의 품계이고 시호는 효절(孝節)이고 사람들이 농암(聾巖)선생이라고 불렀고, 선생의 다섯째 아들은 현감을 지낸 휘 계량(季樑)이고, 현감의 손자는 주부를 지낸 휘 운(芸)인데 임진왜란에 도산서원의 위판(位版)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다가 소수서원에 이르렀고. 왜란이 안정된 후에 돌아와서 봉안(奉安)했으며 또 정유재란(丁酉再亂)에 화왕산성에 가서 왜적의 방어를 도왔는데 이분이 공의 七대조부 이다.
증조부 휘 동수(東洙)는 통덕랑이고, 조부 휘 수혐(秀馦)은 증 사복시 정(正)인데 처음으로 운곡에서 살았고, 아버지 휘 영춘(英春)은 증 이조 참의이고, 어머니 숙부인 횡성 조씨(橫城趙氏)는 통덕랑 영신(永臣)의 따님이다. 정조 신해년(一七九一년)에 출생하여 四세에 부친이 돌아가서 (유업을)계승하는 기쁨을 얻지 못한 것이 원통함에 이르렀고, 모친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했으며 가난하여도 봉양을 빠뜨리지 않았고, 선대의 제사를 차리는데도 반드시 예전과 같이 차렸고, 항상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위주로 했으며 만일 옳지 않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취하지 않았고, 일가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서는 친하고 친하지 아니한 간격이 없어서 환심(歡心-즐거운 마음)을 얻었으니 대체로 천성이 그러했다. 계사년(一八三三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禮)를 집행하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상복(喪服)을 마치고는 집안에서 정결하게 거처하며 책상 앞에서 책을 보았고, 그때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공이 한 쪽에서 부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은 젊어서부터 서로 알고 지냈고 또 밀접하게 따라서 마음이 통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돌아가자 이공(李公)이 만사(輓詞)에서 이르기를 『나와 공이 서로 알기는 어려서부터이고/ 세월이 지나가고 늙으니 함께 백발이 되었네,/ 단짝이 되어 서로 따르니 옳은 도리는 탄탄하였고/ 한결같이 자제를 교육하니 편리하고 좋은 터전이 되었네./ 분양(汾陽-부네)의 훌륭한 가문이라고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고/ 운곡(雲谷)은 살기 좋고 지계(地界-지경)는 원만하네./ 사람은 저승으로 가서 돌아올 수 없는데/ 애사(哀詞-만사)를 읊으니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구나.』라고 했으니 호감을 가지고 깊이 사귀었음을 알 수 있다. 기미년(一八五九년) 七월 기망(旣望-十六일)에 애일당(愛日堂)에서 속구로회(續九老會)를 하고, 중양절(重陽節-九월九일)을 지나서 또 긍구당(肯?堂)에 모였을 때 족형 무민재(无憫齋) 시양(時養)공이 연세가 九十세로 높아서 한 고을의 진신(搢紳-점잖은 사람)이었고, 나란히 참석한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공이 지은 시의 머리에 그런 사실을 적었고, 공이 또한 더하여서 모임을 함께했다.
경신년(一八六○년) 二월 五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七十세였다. 배(配)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충정공(忠定公) 후손인 사량(思良)의 따님으로 부녀다운 행실이 있었고, 공(公)보다 十五년 후에 돌아가서 한티(大峴) 매방산등(鷹放山嶝) 계좌에 안장했다. 슬하에 二남四녀를 두었는데 장남 수현(洙鉉)은 수직 동추이고 사현(泗鉉)은 통덕랑이고 권정순(權政淳)과 이현상(李鉉相)과 김예근(金禮根)고 조찬인(趙鑽仁)은 사위들이다. 농암(聾巖)선조의 뒤를 계승했다고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서 아름다움이 매우 많았으며 비록 벼슬을 계승하지는 못했으나 이와 같이 유교를 소중히 했으니 윤리를 숭상하고 정직하고 떳떳하게 아뢰면서 선비의 기상(氣象)을 잃지 않게 행동했고, 또 도리를 물려주었다고 칭찬하고 기술(記述)하기에 충분했고, 임간(林間)에 은거하여 선비로서 이름을 드러낼 곳이 없어도 굳이 천명(天命)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았으니 공을 깊이 사무치게 느낀다. 아! 세대가 멀어져서 사람들은 돌아갔으며 세상이 여러 번 변했고, 공의 후손 또한 많은데 타지(他地)에 흩어져 살면서도 오히려 조상을 받들고 종친에게 공경함을 소중히 하여서 공의 풍도(風度-풍기)와 운치(韻致)가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남긴 경사가 미친 것이니, 아마도 예천에서 나온 소문에 신령함에 젖어서 마르지 않는다고 하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명(銘)을 이르니 아름다운 운곡(雲谷)은 지형은 고정(考亭)에 부합하고 숲은 울창하고 여울물 소리 쟁쟁하게 울리네 훌륭한 분 차지하여 은거한 곳 여기이니 개간하여 경작하던 지나간 영광을 시(詩)로서 밝히노라 소박한 선비 가정에 시례가 본래의 모습이요 정결하게 수양하고 자손들을 편안하게 도왔도다. 넉넉히 계승하여 남긴 은택을 완연히 따랐고 효성스런 추원의 도리로 장인을 시켜 돌을 다듬었네. 새긴 말씀은 후세에 빛나서 수풀에도 비치리니 내 어찌 과장된 말을 묘소에 떳떳이 게양하리오.
갑인년(一九七四년) 十一월에 문중후손 용구는 삼가 짓다.
註 ①명교(名敎) : 유교, 노자의 무영(無名)에 대한 상대어 ②임간(林間) : 임천(林泉) 즉 은거한 선비가 사는 곳 ③고정(考亭) : 복건성에 있는 지명, 주자(朱子)가 살았던 곳 ④연익(燕翼) : 조상이 자손을 도와 편안하게 함, 어진 신하가 임금을 보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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