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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신 강림’과 구별되는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役事(중생의 사역)’
그러나 이제 그 문제보다 120 명 남녀 제자들이 여기에서 다 같이 똑같은 은사와 은혜를 받고 이제부터 나아가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성신 강림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성신 강림의 특수한 현상이라는 것은 일찍이 역사에 없던 일입니다. 또 역사에 한 번만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구약의 많은 기록과 그 전체의 가르침이 이날을 지향하고 있고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발생한 다음에 이 사실을 보면 성신의 이 역사役事는 역사歷史에 없던 희한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役事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모든 신자에게 꼭 반드시 발생해야 할 만한 일로 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에게 다 같이 필요한 성신님의 사역은 무엇인가 할 때 불신자인 사람, 즉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 나는 신생新生, 곧 중생重生을 하게 되려면 거기에 필요한 것은 물론 성신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신생 혹은 중생에서 성신님의 역사는 모든 신자에게 다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못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인 그 영원한 생명을 받는 그때 역사하시는 분은 성신님이시고, 그 큰 은혜를 사람에게 부어 주시고 직접 역사해 주시는 분은 성신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성신님의 역사가 그 사람에게 일어남으로써 중생하는 것이고, 또 성신님이 그에게 늘 역사하심으로써 그가 성신님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도 받고 충만함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순절에 발생한 이 성신님의 역사는 그러한 통상(일반)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새로운 이코노미 아래에서 제정되고 배제配劑된 바 ‘성신님이 어떤 신자에게든지 예외 없이 똑같이 역사하시는 그 중요한 과정의 그 어떠한 것도 표시하신 것이 아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 오순절 성신님의 나타나심은 그러한 사역이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새로운 배제配劑, 새로운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 아래서 성신님의 역사 내용은 크게 말하면, 첫째는 중생할 때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둘째는 중생케 하신 다음에는 늘 그 안에 거하시고 내주內住하시는 일입니다.
성신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에 그 사람의 몸도 “하나님의 성신의 전殿”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 20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신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됐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고 분명히 이야기하셨습니다. 성신의 내주 문제는 여러 군데서 가르치셨습니다.
중생한 다음에는 성신께서 신자 안에 늘 거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누구든지 다 참으로 중생을 한 이상에는 성신님께서 다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것이지, 성신님께서 따로 계시고 성신님 없이 나만 돌아다닌다는 그런 신자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신자라면 그것은 이름이나 명색만 신자이고 외면과 자기 종교 감정과 노력으로 종교를 만드는 신자이지, 참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후사後嗣로 지목해 놓으신 사람은 아닙니다. 이렇게 성신님께서는 신자 속에 내주하실 뿐더러 성신님께서는 그 사람 속에서 항상 충만 역사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의와 심판을 가지고 세상도 책망하시고, 신자도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요 16:8 참조) 죄를 짓고 잘못했을 때 성신께서 책망하시고 ‘무엇이 의다. 무엇이 심판이다.’ 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에게도 그렇고 신자에게도 그렇습니다. 모든 신자에게 성신님의 일반적인 역사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신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하면 그 안에서 하시려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려고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내주하시는 성신께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이뤄 주든지 이뤄 주지 않든지 하십니다.
…(중략)…
앞에서도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가르치시든지 인도하시든지, 찬송과 감사를 일으키시든지, 충만하셔서 성신의 열매를 맺게 하시든지, 큰 은사로써 사명을 가지게 하시든지, 이런 사역들은 신자가 성신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성신을 좇아 행하는 데에서만 얻는 것이고 일정한 장성의 분량이 차는 대로 얻는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성신과 상관없이 살고, 성신께 모든 것을 다 맡겨 의지하고 살겠다는 욕구도 없고 그런 생활도 없고, 시험이 있을 때 그것을 물리치면서 성신을 의지하는 것도 없으면서 덮어 놓고 그런 열매들이 나타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없으면 나타나는 것은 성신님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신님 역사의 결과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나 이상이나 노력의 결과인 것입니다. 신자도 어떤 불신자가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신님의 열매는 아닙니다.
…(중략)…
그런데 여기 이 오순절의 성신 강림의 특별한 사실들은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가 할 때, 중생이든지 내주든지, 혹은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을 하시든지, 또는 성신을 의지하고 살도록 권고하고 감화하신다든지 하는 사역, 모든 신자에게 하시는 이런 기초적인 일을 하고자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때 성신을 이렇게 특별하게 받은 문도들, “120 명쯤 되는 남녀 제자들은 하나도 중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라도 중생은 다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요 3:3,5)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새로운 생명을 가지지 않거나 중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 역사 이래 이 땅 위에 인류 사회 가운데 항상 존재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아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게 하신 나라입니다. 아담도 그렇게 노아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혹은 모세도 다윗도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고로 구약 시대에는 중생이 없어서 그 사람들이 중생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 점을 항상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한국 교회에 “구약 시대 사람은 멀리 오는 천국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 죽어서 음부陰府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모든 공로를 이루신 다음에야 음부에 가셔서 그 사람들을 다 살려 내심으로써 비로소 그 사람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됐다.” 하고 주장하는 괴상한 이론이 있었습니다. 이런 괴상한 이론을 일부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주장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그런 정당치 못한 이론을 귀담아 들을 것은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과 구약의 선지先知자들과 구약의 하나님 종들은 다 중생한 사람들이고 중생할 뿐만 아니라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 쓰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다 쓰고 한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는 것같이 여기에 모인 120 명 제자들도 이미 다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사실상 중생한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려고 시작하실 리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데리고는 일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았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치 우리가 시체를 볼 때 육신이 죽어 있듯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과 영혼이 다같이 존재의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20 명 사람들은 다 예수님 문도로서 과거에 주님을 따라다니던 사도들을 위시해서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실망하고 낙담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믿음을 복돋아 주셨고 새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의기意氣와 기대를 가지게 하셔서 이렇게 모아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특별하신 경영 가운데에서 이 사람들을 다 모아 놓으신 까닭에 이제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그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만으로는 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큰일, 혹은 (새로운) 역사歷史를 시작하기 위해서 성신의 특별한 능력과 은혜가 그들 위에 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신의 충만한 역사役事가 그들에게 지금 내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신 충만은 오늘날에도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오순절의 형식을 좇아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신 충만은 어느 시대이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요구하고 받아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의미 있는 일을 참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명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신 충만을 구체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역사歷史에 한 번 나타난 이 형식, 즉 새로운 오이코노미아의 역사 시작을 장식하고 선언하는 이 형식을 혼동해서 ‘언제든지 똑같이 이 형식(오순절)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더라도, 이런 사실이 없이도 과거를 경과한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군으로 다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이런 (오순절의) 사실이 있어야겠다.” 한다든지, 오늘날도 무슨 “방언을 해야겠다.” 한다든지, “성신이 우리에게 임해서 몸이 찌르르 하고 야단내야겠다.” 한다든지, “마음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야겠다.” 한다든지 해서, 이런 최초의 어떤 기이하고 법열法悅적이고 황홀한 상태를 아직도 요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령 그렇게 요구해서 받았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무슨 역사歷史를 만들었습니까? 그런 까닭에 이런 것들을 올바로 생각해서 항상 성신님의 역사役事에 대해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순절 성신 강림은 중생을 위한 성신 강림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간단히 성경을 몇 구절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6~7절을 보면,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신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중생, 곧 “성신으로 난 것은 영이다.” 하셔서 “성신으로 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신께서 중생케 하신다.’는 것을 특별히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요한 사도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되느냐?’ 할 때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난 자들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한 자들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는 이것이 중생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낳아 주시는 것이지, 내가 태어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중생자는 성신님께서 역사하셔서 낳으시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17절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신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신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신님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가 중생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중생이라는 것은 성신님이 그 사람에게 강림해 역사하셔서 그 생명의 성신의 법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살려 내시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강림하신 성신께서 그를 중생케 하신 뒤에 그대로 곧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오늘날 이 은혜의 시대, 새로운 이코노미, 새로운 경륜 하에서 거룩한 순서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즉 그리스도의 신인 성신이 그 속에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반드시 중생자 속에 성신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구약에서 성신님이 역사하신 방식이 오늘날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코노미’, 혹은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배제配劑’, 혹은 ‘경영’, 혹은 ‘행정, 혹은 ’디스펜세이션(depensation)‘이라는 말과 통하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법이 구약과 신약에서 서로 다르지만, 그럴지라도 중생에서 성신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고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와 계시는 성신님께서 오셨다가 적당한 시간에 또 나가기도 하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완전히 떠나 버리시기도 하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누누이 가르쳤습니다.
…(중략)…
그 다음 중요한 문제로서 오순절 때 임하신 성신의 문제를 보면, 사람이 역사歷史를 볼 때에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는데, ‘인류 문화를 얼마만큼 창달했는가?’ 하는 여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역사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일 중요히 볼 가장 중요한 역사의 관점은, ‘인류가 무슨 가치를 냈느냐?’ 하고 개인 개인이 각각 가지고 있는 별다른 가치관으로 가치론을 하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통치해 가셨느냐?’ 하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은 성신의 강림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의 경영, 혹은 오이코노미아의 어떤 사실을 이전과는 다르게 명백하고도 훨씬 은혜 깊게, 훨씬 현저한 영광으로써 다스리시는 역사, 거룩한 역사의 첫 개시이며 첫 선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의미에서 오순절 성신 강림은 특이한 위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특이한 역사적 의미를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제1권: 내 증인이 되리라.} 315쪽~323쪽.

첫댓글 어려운 듯 하지만 공부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글을 올려 주셔서 공감합니다^^
올려 주신 김홍전 목사님의 글에 흥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새로운 배제配劑, 새로운 디스펜세이션(dispensation) 아래서 성신님의 역사 내용은 크게 말하면, 첫째는 중생할 때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둘째는 중생케 하신 다음에는 늘 그 안에 거하시고 내주內住하시는 일입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내주하심과 중생을 동일하게 보는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한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는
성령께서 중생케 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말씀하셨네요
저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중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데
에스겔서를 보다가 혹시 중생하고 그리고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홍전 목사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네요.
간단히 적으면 ‘외소(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책망의 가시 채를 휘두르시며 다가오시는 성령, 그분의 바람)→내소(예정된 나무를 꺾어 믿음의 씨를 뿌리시는 성령)-중생-중생의 발현인 회심-칭의-점진성화→영화’라는 구원을 서정을 가진 개혁 신학 구원론에서 화살표(→)는 시간을 뜻합니다. 그리고 줄표(-)는 동시성을 뜻합니다. 동시성을 뜻하기에 ‘중생은 회심에 선행한다.’는 명제는 시간 우선순위가 아닌 논리 우선순위, 원인과 결과 관계를 뜻하는 명제입니다.
∎ 원인/중생: 전등불 스위치를 누른다. 수도꼭지를 튼다.
∎ 결과/회심: 전등불이 켜진다. 수돗물이 나온다.
항상 함께하는 ‘성령께서 하시는 중생 사역’과 ‘성령께서 중생자 안에 머무시는 내주 사역’을 동시성을 생각하며 구별해야 할 텐데, 시간 차를 둬 구별이 아닌 분리를 하면, 개혁 신학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위 본문에 방금 배경색을 칠한 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중생이라는 것은 성신님이 그 사람에게 강림해 역사하셔서 그 생명의 성신의 법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살려 내시는 것이다.”에서 “성신님이 그 사람에게 강림”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다음 링크 글 읽지 않으셨나 본데, 읽어 보십시오.
https://cafe.daum.net/1107/YlDw/15
@四季 朴埰同 사계님
"이와 같이 사람의 중생이라는 것은 성신님이 그 사람에게 강림해 역사하셔서 그 생명의 성신의 법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를 살려 내시는 것이다." 라는 김홍전 목사님의 말씀에서
강림을 저는 내주로 보지 않습니다.
Holy Spirit comes upon them 으로 이해합니다.
Holy Spirit dwells in them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외적으로 일하셔서 우리가 중생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중생한 후에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홍전 목사님의 말씀은 이해하겠는데
김홍전 목사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계님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가 없습니다.
@이지끼을 upon과 in으로 성령의 임재를 설명하면, 성령의 내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upon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지끼을 님은 ‘고넬료에게 임하신 성령은 upon이었는데, 세례를 받은 뒤 in으로 바뀌었다.’ 주장하고 싶으시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