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은중경
부모님에 대한 은혜는 끝이 없으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구나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가득한 집안에는 항상 여유가 있고 나아가 대를 이은 자식 농사도 훌륭하다.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1980년 벽두였다. 추운 겨울인데 마침 매제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서예가를 집으로 안내한 일이 있다. 그는 이미 동아대전에서 특상을 받은 바 있어 전도유망한 서예가로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개인적으로는 고교 선배님 이었다. 그가 바로 하석(何石) 박원규(朴元圭)였다. 당시 고향에서는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석전(石田) 황욱(黃旭), 남정(南丁) 최정균(崔正均) 선생 등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고 하석은 강암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더구나 하석은 창(唱)에도 일가견이 있어 취미로 즐긴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친은 아끼시던 통북(소 한 마리 가죽 전체로 만든 북)을 가져오게 하셨다. 햇수로는 150년도 훨씬 넘은 문화재 급 북이었다. 그로 하여금 잠시 창을 하게 하신 후 장단을 맞추시더니 제대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북을 흔쾌히 선물하셨다. 이후 그는 최고의 고수가 되어 전국대회에서 3명 중에 뽑혔다.
그 후 30여년이 지나 수소문 끝에 압구정동에 있는 그의 서예연구실인 석곡실(石曲室)로 찾아갔다. 상가 2층에 있는 연구실은 규모가 컸는데 각 종 서적과 서예관련 자료가 가득하고 묵향이 은은하였다. 서가에는 그 옛날 눈에 익은 통북이 놓여있어 매우 반가웠다. 그는 이미 서예 분야 대가의 반열에 올라 명성이 높았다. 더구나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취업하지 않고서도 평생을 공부하고, 글씨를 쓰고, 경전을 강의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선친의 시비(詩碑) 건립에 필요한 글씨를 부탁하였다. 나중에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가면서 양주와 금일봉을 준비하였다. 전한 시대(前漢 時代)의 글씨를 찾아 정성들여 쓴 글씨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가져간 선물을 내놓으니 일언지하로 거절하였다. 돈을 받으려면 한 자에 1 백만 원 씩은 받아야 하는데 과거 선친에 대한 흠모와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냥 양주만 받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 어느 회사의 대표이사로 근무하면서 문득 초빙강연에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차례 부탁을 드려 어렵게 실행하게 되었다. 이 때 주요 주제 중의 하나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는 부모의 은혜가 크고 깊음을 설명하는 불교경전이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의 내용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H회장 하면 너무도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의 선친도 이미 일제치하에서 고위 관직을 거친 분으로 신문사 사장을 하신 분이다. 여러 형제들도 잘 성장하여 각 분야에서 성공을 하였으며, 누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가와 결혼하였다. 나아가 후손들도 모두 명문 대학을 나와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손자 모두 역시 수월하게 자라고 있다하였다. 이런 모든 사항이 바로 부모님의 은혜에서 비롯한 것이니 그 은혜에 보답코자 이를 명필의 솜씨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몇 차례 상의를 한 결과 우선 『부모은중경』을 쓰되 광개토대왕 비문체로 쓰고, 글씨가 들어가는 장소와 공간의 크기를 정하였다. 가로 150㎝, 세로 330㎝ 82장에 광개토대왕 비문체로 써낸 2162자의 『부모은중경』은 한국서예 사상 가장 장대한 작품이다. 하석은 당초 우리한지(韓紙)로 작업하려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 규격의 종이 제작이 불가능해 중국에 특별 주문했다. 먹도 우리 것으로 하려 했으나 질감이 마땅치 않아, 450년 역사의 일본 먹 제조원인 고매원(古梅園)의 금송학(金松鶴) 50자루로 작업했다. 금송학은 1년에 25자루 정도만 제작해 내는 최고품질의 먹이다. 물은 백두산 천지에서 길어왔다. 준비와 병행하여 세부적인 서체를 연구하고 각 글자마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별도의 작업실을 정해 보좌를 받으며 글씨를 쓰는데 6 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시작하는 시묵(試墨) 행사와 작업을 끝내는 세연(洗硯) 행사를 진행했다. 세연 땐 명창 안숙선의 소리에 하석이 북채를 들었다. 그야말로 한 위대한 예술작품이 탄생한 순간으로 단순히 돈으로만 평가하는 수준을 초월하여 인간 승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작품을 주문한 H 회장은 저택 내에 별도의 부모님을 위한 사당을 만들어 마무리를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과 실천은 돈이 많다고 이룰 일이 결코 아니다. 근본적으로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극한 효성과 정성이 부족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변의 부자인 친구에게도 권유할 생각이다.
하석은 타고난 건강으로 아침 6시가 되면 연구실에 나와 먼저 먹을 갈고 글씨를 쓰면서 경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항상 젊은이처럼 언행이 밝고 가지런하여 신체단련에도 부지런하다. 더구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깊은 학식과 품격이 소나무처럼 고고하다. 갑골문자와 동파문자의 서체도 연구하여 빼어난 조형미(造形美)를 표현하였으며 계속해서 서체를 연구한다. 수시로 오랫동안 경전을 강의하고 글씨 쓰기를 가르치는데 회원 다수가 각각 저명한 인사들이다.
모처럼 연락이 되어 26일에 연구실에서 만나 이왕이면 저녁 식사도 같이 하기로 하였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서예와 관련한 고견은 물론이고 삶의 지혜를 듣기 위함이다. 현대판 선비의 전형이며 추사 이후 최고 명필이라고 칭송을 받는 한 시대의 인물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2022.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