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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金大有, 1479∼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극일(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맹(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준손(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일손(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 당하였다.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그는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 濯纓年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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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足堂先生年譜 (삼족당선생연보)
解釋 : 2008. 6. 19. 金 順 大
原文 : 三足堂先生逸稿. 卷1-3 金大有(1479~1552)著 金載坤1903跋 古3648-10-805, 三足堂先生文集 金大有 著 守庵亭 1935 한古朝46-가1401 ,
李朝成宗十年己亥七月七日先生生於道州雲溪里少微洞先生五代祖遯翁公諱伉自金海始卜築于雲溪里而子孫因居焉{先生生於此或云外土坪杏亭村東池塘上基卽胎址豈生于雲溪里而後移于池塘上基耶}
조선 성종 10년 기해(1479년)7월7일 선생은 도주(현 청도)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5대조는 둔옹공 휘항으로서 이 분이 김해로부터 옮겨와서 운계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자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나 혹은 외토평 행정촌 동쪽 연못의 당상기가 태지(낳아서 태를 묻은 곳)라고 하니 어쩌면 운계리에서 출생하신 후 연못의 당상기로 이사를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先生諱大有字天祐號三足堂己卯禍作見機歛退築精舍其郡東雲門山下愚淵上以壽終焉有水月臺醉醒亭獨樂臺樂天堂風雩臺舞雩臺雲水亭訥淵亭曲川堂諸勝地永川風水洞又有遺址云
선생의 휘는 대유이고 자는 천우이며 호는 삼족당이다. 기묘사화를 당하여 정황을 보고 물러나 그 군의 동쪽 운문산 아래의 우연 위쪽에 정사를 짓고 오래도록 살았다. 수월대, 취성정, 독락대, 락천당, 풍우대, 무우대, 운수정, 눌연정, 곡천당등의 여러 명승지가 있고 영천의 풍수동에도 또 유허지가 있다고 한다.
○先生卽節孝慕菴公之曾孫濯纓文愍公之從子王父曰南溪公諱孟皇考曰東窓公諱駿孫也受業於叔父濯纓先生登薦於先正趙靜庵
선생은 절효 모암공(휘극일)의 증손이며 탁영 문민공(휘일손)의 조카이고 조부는 남계공 휘맹이고 부친은 동창공 휘준손이다. 숙부인 탁영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벼슬에 천거되었는데 조정암(조광조)보다 빨랐다.
先生孝友出天學問淵博氣宇超凡識度明亮南冥曹先生稱其優於乃叔之論松溪申先生稱其軒豁不拘底氣宇之語鄕擧稱其恢有經濟之手平生無一點疵缺云
선생은 효도와 우애가 충만하였고 학문은 깊고 넓었으며 기상은 일반인을 뛰어 넘고 지식의 정도도 분명하고 명석하였다. 남명 조선생(조식)이 말하기를 그의 우수함은 숙부(휘일손)보다 낫다고 하였고 송계 신선생(申季誠, 1499-1562)은 말하기를 그의 기상은 막힘없이 높고 넓어 훤히 터져 있다고 하였고 동네사람들이 추천하며 말하기를 그가 관리하고 다스리는 솜씨는 평생 한 점의 흠도 없다고 하였다.
可以知先生之大略而亦可見家庭之敎訓師友之淵源有自來矣遯翁公與鄭圃隱從遊慕菴公學於吉冶隱南溪公學襲家庭而又師金江湖濯纓先生又學於佔畢齋金先生得聞圃冶所傳程朱之學而又與寒暄一蠧爲道義交千載道學淵源之正脈萃發於一門祖孫叔姪之的傳何其盛且偉哉
이로서 가히 선생의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고 또 가정에서의 교훈도 알 수 있으며 스승과 친구를 사귐에 대한 연원이 그 나온 곳이 있는 것이다. 둔옹공(휘항)은 정포은(정몽주)와 교유하였고 모암공(휘극일)은 길야은(길재)에게서 배웠으며 남계공(휘맹)은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또 그의 스승은 김강호(김숙자)이다. 탁영선생은 또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에게서 배우면서 포은(정몽주)과 야은(길재)이 전하는 주자학을 배웠다. 또 한훤(金宏弼, 1454~1504) 일두(鄭汝昌, 1450년∼1504)와 같이 도의로서 사귀어 천년동안 내려오는 도학에 대학 연원의 바른 맥을 모아 한 가문에서 시작하여 조부와 손자(휘맹과 대유) 숙부와 조카(휘일손과 대유)가 전하였으니 어찌 융성하고 위대하지 아니한가.
◎成宗十三年 壬寅先生四歲(성종13년 임인, 1482년 선생 4세)
十月東窓公與仲弟梅軒公俱捷謁 聖科伯居第二仲居第一 上特命以兄弟之序定甲乙之次是榜策取十一人而東窓公伯仲俱捷第一甲榜時佔畢齋金先生有爲送榮親序及詩二首
10월에 동창공(부친,휘준손)이 동생 매헌공(휘기손)과 같이 알성과의 시험을 보아 형은 2등, 동생은 1등을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형제의 순서로서 갑과 을의 차례를 정하라 하고 이 시험에서 11명을 뽑았는데 동창공과 동생은 제일인 갑과로 뽑혔다. 이 때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이 축하의 의미로 시 2편을 친히 써서 보내왔다.
○東窓公生于魯山二年甲戌成宗三年壬辰中司馬時年十九至是登甲科越四年丙午中重試官至弘文館直提學位居淸要膺士林重望
○동창공(휘준손)은 노산(단종) 2년 갑술(1454년)에 태어나 성종3년 임진(1472년)에 사마가 되니 이때 나이는 19세였다. 갑과에 합격한 후 4년이 지나 병오(1486년)에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은 홍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청도에 살면서 선비들의 두터운 명망을 받았다.
○先生天分豪邁識度明亮年方四五歲敎以文字一聞輒記至是聞先大夫伯仲氏俱捷大科歎曰士雖以文業進身事君然道學直工㔫可篤實其立志高遠之重略可見矣
○선생은 천성이 호탕하고 식견이 밝고 명석하여 나이 4,5세에 글자를 한번 듣기만 하면 쉽게 기억하기에 이르렀다. 선대부(휘맹)께서 형과 동생(휘준손, 기손)이 둘 다 대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선비라는 것은 글을 배우고 몸을 닦아 임금을 모셔야 하나 더욱더 의지를 세우고 높이는 것을 중시해야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成宗十四年癸卯先生五歲(성종14년 계묘, 1483년 선생 5세)
九月十一日辛丑丁王考南溪公憂○南溪公生于太宗庚寅八月一日戊午中生員進士辛酉登文科官至司憲府執義享年七十四中宗丙寅 贈吏曺參判○十一月庚戌葬南溪公于水也山乾坐原
9월11일 조부이신 남계공(휘맹) 별세하였다. ○남계공은 태종 경인(1410년) 8월1일에 출생하여 무오(1438년)에 생원과 진사가 되고 신유(1441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은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고 74세에 별세하셨다. 중종 병인(1506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1월 경술(21일)에 남계공을 수야산 건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成宗十七年丙午先生八歲(성종17년 병오, 1486년 선생 8세)
先生始受小學於叔父濯纓先生○八月濯纓先生中生員第一進士第二九月丙戌大闡中興策名○十月十六日東窓公中重試○十二月甲戌東窓公陞弘文校理梅軒公爲吏曹佐郞濯纓公拜正字時人謂之金氏三珠○先生前妣淑夫人李氏生員設之女無育忌二月十八日墓所失傳○繼妣淑夫人高氏司導寺正台翼女生先生忌冬十二月十二日李氏墓所失傳高氏墓在水也山先兆西岡子坐原
선생이 숙부인 탁영선생에게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8월에 탁영선생이 생원시험에서는 1등 진사시험에서는 2등을 하였다. 9월 병술(44일에 해당?)중흥책으로 유명해졌다. ○10월16일 동창공이 중시에 합격하였다.○12월 갑술(3일)에 동창공(휘준손)이 홍문관 교리가 되고 매헌공(휘기손)이 이조좌랑이 되고 탁영공(휘일손)이 정자에 임명되었다. 이 때 사람들은 이 3사람을 김씨삼주(김씨의 세 보배)라 하였다. ○선생의 첫 모친은 숙부인 이씨로써 생원을 지낸 이설의 따님이나 자녀가 없었고 기일은 2월 18일이며 묘소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음의 모친은 숙부인 고씨이고 사도시정을 지낸 고태익의 따님으로 선생을 낳았으며 기일은 겨울 12월 12일이다. 이씨의 묘소는 전하지 않으나 고씨의 묘소는 수야산 선영의 서쪽 산의 자좌 언덕에 있다.
◎成宗十九年戊申先生十歲(성종19년 무신, 1488년 선생 10세)
八月延謁南秋江洪篠叢禹楓階于雲溪本第時三賢來訪濯纓先生故延之○九月壬
申雲溪精舍始成講學于此先是濯纓先生卜築于舊宅之東臥龍峯下至是始成扁其外軒曰雲溪精舍小樓曰詠歸李傭軒仲鈞書之又築臺于舍之東麓刻書曰濯纓臺鑿方塘于臺前引水匯之曰天雲潭名其引水曰活水
8월에 남추강(남효온, 1454~1492), 홍소총(홍유손, 1431∼1529), 우풍계(우선언, 1444~1514)가 운계에 있는 본가를 찾아왔을 때 3분이 탁영선생을 방문하였다. ○9월 임신(12일)에 운계정사가 세워지고 학문을 강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탁영선생은 옛날 집 동쪽의 와룡봉 아래에 집을 짓고 책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바깥 집을 운계정사라하고 작은 누각을 영귀라 하였는데 용헌 이중균이 글을 썼다. 또 정사의 동쪽 기슭에 대(臺)를 쌓고 글을 새기기를 탁영대라 하였다. 탁영대의 둑에 구멍을 뚫어 물을 끌어 들였는데 이것을 천운담이라 이름짓고 그 물을 활수라 하였다.
◎成宗二十年己酉先生十一歲(성종20년 기유, 1489년 선생 11세)
二月延謁一蠹鄭先生于雲溪精舍時先生年甫十餘歲侍叔父延接諸賢己有老成之器故一蠹奇之曰季雲跡者必此兒也○十一月戊午拜餞濯纓先生于郊外時濯纓先生赴 召除遼東質正官
2월에 일두 정선생(정여창)이 운계정사를 방문하였을 때 선생의 나이는 불과 10여세로서 숙부를 모시고 여러 현인들과 만나보았는데 어른 티가 있었다. 그래서 일두(정여창)가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계운(휘일손)의 뒤를 이을 아이는 분명히 이 아이다 라고 하였다. ○11월 무오(4일)에 탁영선생이 객지로 나가 작별하였다. 이때 탁영선생은 요동 질정관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갈 때이다.
◎成宗二十一年庚戌先生十二歲(성종21년 경술, 1490년 선생 12세)
三月慰謁濯纓先生于雲溪本第時濯纓先生還自京師歸于雲溪丁巳有 旨賜濯纓駱山園亭○先是己酉春東窓公以弘文應敎懇乞歸養 上不許特命度支買城東山
亭一區以 賜令奉親來居之至是將赴天嶺上疏請還 賜第 上復以賜濯纓是月先生拜餞東窓公天嶺{時除咸陽郡守}○四月辛亥延謁寒暄堂金先生于雲溪精舍時寒暄聞濯纓自京還第故來訪約觀伽倻山
3월 탁영선생이 운계의 본가에 오셨을 때 찾아뵈었다. 이때 탁영선생은 서울에서 운계로 돌아왔고 정사(5일)에 임금으로부터 탁영에게 락산원정이 주어졌다. ○이보다 먼저 기유(2월27일) 봄에 동창공이 홍문관 응교로서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겠다고 간절하게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특별히 명하여 성의 동쪽 산의 정자의 한 부분을 사서 부모님을 모셔와 살라고 주었다. 그러나 상소를 올려 받은 집을 돌려주겠다고 하여 임금이 다시 탁영에게 주었다. 이 달에 선생(휘대유)이 동창공이 가실 때 배웅하였다. {이 때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4월 신해(29일)한훤당 김선생(김굉필)이 운계정사를 찾아왔다. 이때 한훤은 탁영이 서울로부터 고향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방문한 것이며 가야산을 보러 가자고 약속하였다.
◎成宗二十二年辛亥先生十三歲(성종22년 신해, 1491년 선생 13세)
四月戊申慰謁濯纓先生于雲溪拜受小學集說時濯纓先生以書狀官赴京師見禮部員外郞程愈得小學集說而還
4월무신(3일)에 운계의 탁영선생을 찾아뵙고 소학집설의 책을 받았다. 이때 탁영선생은 서장관으로서 서울(명나라의 서울)에 가서 예부에서 소학집설의 책을 얻어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成宗二十三年壬子先生十四歲(성종23년 임자, 1492년 선생 14세)
九月甲申哭仲父梅軒公時梅軒公無子濯纓先生亦無嗣故濯纓祭仲兄文有伯氏只有一子之語蓋歎嗣續之晩也○十月又聞南秋江訃音十一月又聞佔畢齋訃音悲悼不已
9월 갑신(16일)에 작은아버지 매헌공(휘기손)이 별세하였다. 이때 매헌공은 아들이 없었고 탁영선생도 역시 아들이 없어 탁영이 작은형님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썼는데 큰형님도 단지 아들 하나만 있다한 것은 대개 후사(자손)가 늦은 것을 한탄한 것이다. ○10월에 또 남추강(남효온)이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고 11월에 또 점필재(김종직)의 부음을 듣고 비통함을 그치지 못했다.
◎成宗二十四年癸丑先生十五歲(성종24년 계축, 1493년 선생 15세)
八月覽叔父四十八咏詩而壯之時濯纓先生賡 御製詩而寓陳戒之辭矣
8월에 숙부(휘일손)의 48영시(48개의 시)를 보았는데 장엄하였다. 이때 탁영선생은 임금이 지은 시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인데 임금에게 아뢰고자하는 말을 적은 것이다.
◎燕山二年丙辰先生十八歲(연산2년 병진, 1496년 선생 18세)
先生配淑人碧珍李氏縣監樑之女聘年月日未詳○二月濯纓先生還雲溪先生閱昭陵復疏三篇甚壯之○閏三月二十九日丁丑丁王母貞夫人龍仁李氏憂貞夫人刑曺參議讓之女生于太宗甲辰二月二十四日○五月二十七日戊子葬貞夫人于南溪公之墓左{涵虛亭撰墓碣銘明年丁巳佔畢齋金先生撰墓誌}
선생(휘대유)은 부인으로 숙인 벽진이씨로써 현감을 지낸 이량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2월 탁영선생이 운계로 돌아왔다. 선생은 소릉(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을 참배하고 상소문 3개를 올렸는데 아주 장엄하였다. ○윤3월 29일 정축에 할머니인 정부인 용인이씨가 별세하였다. 정부인은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의 따님으로 태종 갑진[1] 2월24일에 태어나셨다. ○5월27일 무자에 정부인을 남계공(휘맹) 묘옆에 장사지냈다. {함허정, 洪貴達, 1438~1504)이 묘갈을 찬하고 다음해 정사년(1497년)에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이 묘지를 찬하였다.[2]}
[1]태종시기에 갑진년은 없다. 갑진년은 1424년으로 세종시기이다. 태종때는 갑신년이 있는데 1404년이다. 辰은 ‘진’과 ‘신’의 두가지 발음이 있는데 아마 ‘신’으로서 申자를 辰 자로 잘못 기록한 것 같다.
[2]김종직의 생졸은 1431~1492로서 1497년에 묘지를 찬했다는 말은 이상하다.
◎燕山四年戊午先生二十歲(연산4년 무오, 1498년 선생 20세)
七月五日丙申濯纓先生以史事被逮使命至淸道時濯纓公在咸陽先生馳至藍溪告以故濯纓公色不動言笑自若一蠹謂濯纓曰士類之禍自此始矣濯纓曰此必克墩發史事也吾其不還願伯勗爲道自愛一蠹曰勿多言吾亦從此逝矣濯纓微笑不答已而都事至示以拿命濯纓卽就庭下北面四拜訖夷然就道
7월5일 병신에 탁영선생을 사화로 체포하기 위하여 관리가 청도에 왔을 때 탁영공은 함양에 있었다. 선생(휘대유)이 남계(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로 달려가 이 변고를 고하였으나 탁영공은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웃음을 띠었다. 일두(정여창)가 탁영에게 말하기를 사림(선비)들에 대한 화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자 탁영이 말하기를 이는 분명히 극돈(이극돈)이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만든 일이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형께서는 도를 세워 스스로 아껴라 고 하였다. 일두가 말하기를 많은 말을 하지 말아라. 나 또한 너를 따라서 죽을 것이다. 고 하였으나 탁영은 미소를 띠며 대답하지 않았다. 도사(금부도사)가 체포하라는 명령서를 보이자 탁영은 즉시 마당으로 나아가 북쪽(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길을 떠났다.
辛丑就因義禁府夜被鞠闕庭進供狀乙巳又就鞠南賓廳十七日戊申有旨議刑二十七日戊午被禍濯纓與嚮之子汎仲雍文炳談笑如平日從容就刑午正一刻也
신축(7일)에 의금부에 갇히고 밤에 대궐마당에서 심문을 당하여 조서를 올렸다. 을사(11일)에 또 남쪽의 빈청에서 심문을 당하고 17일 무신[1]에 임금으로부터 형(刑)을 결정한 지시가 내려왔고 27일 무오에 화를 입었다. 탁영은 향지자(嚮之子?)인 범,중,옹,문,병과 평일과 같은 몸가짐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사형은 정오(12시) 1각(15분)에 행해졌다.
[1] 7월 무신은 7월14일임, 17일은 신해임
是日天地晝晦陰雲四塞暴雨如注大風從東南起折木飛瓦都人士女莫不顚仆股栗雲溪之水血流三日東牕公及先生並坐竄湖南自是儒林喪氣學舍蕭然父兄相戒曰學而應科則止勿求仕進云庚申權葬于楊州之石橋原朴兆年{字期叟}與濯纓先生家入營窆于此
이날 하늘과 땅은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고 구름이 사방에 끼었고 폭우가 쏟아 붓듯이 내렸고 거센 바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도시 사람들과 선비나 여자들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다리를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운계의 물은 핏빛으로 3일간 흘렀다. 동창공과 선생과 관계있는 사람들은 호남으로 달아나 숨었다(버려졌다. 유배되었다.). 이로부터 유림은 상심한 기분이 되어 학사는 숙연해지고 부형들은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공부해서 과거시험을 치는 것은 하지 말고 벼슬자리에도 나가지 말라 하였다. 경신(26일)에 양주의 석교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박조년[1]{자는 기수}이 탁영선생 집에 들어와 이 묘소를 돌보았다.
[1]朴兆年; 연산군 때 정랑을 지냈음
◎中宗元年丙寅先生二十八歲(중종원년 병인, 1506년 선생 28세)
九月戊寅有 旨洗寃復爵○是時東窓公在湖南南原謫所見燕山政亂社稷將危與柳濱李顆等謀推戴 中宗傳檄京師{檄文詳見濯纓年譜}檄未至而朴元宗柳順汀成希顔等以 慈順王大妣命放燕山于喬桐奉 晉城大君卽位是爲 中宗大王盡革弊政首洗戊午之冤復其官爵錄其子孫宥還被竄人封東窓公燕川君 贈南溪公吏曹參判恩赦如初
9월 무인(2일)에 임금의 지시로 억울함을 씻고 관직을 회복했다. ○이때 동창공이 호남 남원의 귀양지에 있으며 연산군이 정치를 어지럽힘을 보고 사직이 장차 위험해 질 것이라 생각하여 유빈(?∼1509), 이과(1475∼1507)등과 같이 모의하여 중종을 추대하기로 하고 서울에 격문을 돌렸으나 {격문의 상세한 것은 탁영연보에서 볼 수 있다.}격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박원종(1467∼1510), 류순정(1459∼1512), 성희안(1461∼1513) 등이 자순왕대비의 명령을 받아 연산군을 교동으로 내쫓고 진성대군이 즉위하니 이분이 중종대왕이다. 낡은 정치와 우두머리를 혁파하고 무오의 원한을 씻어주고 그 관적을 회복하고 그 자손들을 용서하여 귀양지에서 돌아오게 하였으며 동창공을 연천군에 봉하였다.
○冬十月二十四日庚午改葬濯纓公于木川鵲城山○初濯纓先生之被逮也貞夫人金氏在木川聞之涕泣不食十日而不死復進食及先生遇害號擗泣血屢絶復甦三年之內極盡誠禮柴毁骨立服闋之日先生自湖南至夫人金氏謂先生曰吾無育願以汝弟大壯奉汝季父之祀又曰我死之後必以我祔葬汝季父之遺骸言訖而慟哭更衣定席翛然而歿卽七月二十七日己卯也先生稟于東窓公使第二弟大壯奉其祀
○겨울 10월24일 경오에 다시 탁영공의 묘소를 목천의 작성산으로 옮겼다. ○처음에 탁영선생이 체포될 때 정부인 김씨는 목천에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는 울면서 10일 동안 식사도 하지 않았으나 죽지 않았으며 이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또 선생(휘일손)이 화를 당한 후 가슴을 치고 울며 피눈물을 흘리고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3년 동안 정성과 예를 다하여 제사를 지내었으며 몸이 많이 쇠락하였다. 상복을 벗는 날에 선생(휘대유)이 호남에서 부인(탁영부인)에게로 가니 김씨(탁영부인)가 선생에게 하는 말이 나는 자식이 없으니 원하건대 너의 동생 대장으로 하여금 너의 막내 숙부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여라. 또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꼭 나를 너의 막내 숙부유해 옆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통고하며 옷을 갈아입고 바르게 앉아 날개가 찢어지듯이 돌아가시니 7월 27일 기묘날이다. 선생은 동창공에게 아뢰어 둘째 동생 대장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中宗二年丁卯先生二十九歲(중종2년 정묘, 1507년 선생 29세)
八月中庭試壯元直赴進士科九月七日中進士一所禮曹上試刑曹參判安潤德二所掌樂院上試刑曺判書姜渾是榜金絿李延慶柳仁淑趙如晦諸賢皆當世聞人也先生登初場進士榜第七人○十二月十日丁東窓公憂先生永歸田舍居喪祭禮一遵朱子家禮鄕人服其善居喪三年內未嘗見齒一不到家以奉兆墓{後人名其山曰殯山墓在土坪後山子坐原 壬申三月立碑}
8월에 정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시험의 자격을 얻었고 9월7일 진사에 합격했다. 1소(所,장소)는 예조에서 보았는데 시험 감독관은 형조참판 안윤덕(1457∼1535)이고 2소는 장락원이고 시험 감독관은 형조판서 강혼(1464∼1519)이었다. 이 시험에서 김구(1488년~1534), 이연경(1484∼1548), 류인숙(1485∼1545), 조여회(?)의 여러 선비가 합격했는데 모두 당시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이었다. 선생은 첫 시험인 진사시험에서 7등을 하였다. ○12월 10일 동창공이 별세하시어 선생은 시골로 돌아가 상제를 지냈는데 오로지 주자가례를 준수하여 마을사람들이 그 착함에 감복하였다. 상례를 치르는 3년동안 이빨을 보이지 않고 한번도 집에 가지 않고 묘소를 받들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산에 이름 붙이기를 빈산이라 하였다. 묘소는 토평의 뒷산 자좌언덕에 있다. 임신년(??) 3월에 비를 세웠다.}
◎中宗三年戊辰先生三十歲(중종3년 무진, 1508년 선생 30세)
八月丙子返葬濯纓先生{墓在水也山南溪公兆下東岡戌坐原貞夫人金氏移葬祔右}
8월 병자(11일)에 탁영선생 묘를 고향으로 옮겼다. {묘는 수야산 남계공(휘맹) 선조 아래의 동쪽 언덕 술좌에 있고 정부인 김씨도 그의 오른쪽에 이장하였다.}
◎中宗四年己巳先生三十一歲(중종4년 기사, 1509년 선생 31세)
十月二十六日丁繼妣淑夫人南原梁氏憂{夫人直長普判女祔葬于東窓公墓左俱有表碣}
10월26일 작은어머니인 숙부인 남원양씨가 별세하였다. {부인은 직장을 지낸 양보판의 따님으로 동창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했는데 묘표와 묘갈이 있다.}
◎中宗七年壬申先生三十四歲(중종7년 임신, 1512년 선생 34세)
三月立東窓公墓碑先生服闋後嘗讀書于海印寺禪定庵{時與雷溪兪好仁相就夜話兪贈數絶有二十年來理白魚伴猿禪定閱三餘之句 先生所答詩未可攷也}
3월에 동창공의 묘비를 세우고 선생은 상복을 벗었다. 이후 해인사의 선정암으로 가서 책을 읽었다.{이때 뢰계 유호인(1445~1494)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호인이 몇 줄의 시를 지어 주었는데 ‘20년 동안 흰 물고기가 원숭이와 같이 도를 닦아 삼매경에 이르니...’ 하는 3개정도의 구절로 되어 있으나 선생이 답한 시는 알 수 없다.}[1]
[1]유호인은 1494년에 죽었으니 1512년에 선생과 만날 수 없다.
◎中宗十三年戊寅先生四十歲(중종13년 무인, 1518년 선생 40세)
四月庚戌與淸道章甫建紫溪祠{士林以濯纓古宅雲溪精舍爲祠宇名曰紫溪以享濯纓先生蓋取被禍時溪水血流之異也 萬曆戊申並享節孝三足堂} ○秋以行誼遺逸拜典牲署直長未幾辭歸
4월 경술(42일에 해당?)에 청도의 청년들과 자계사를 건립하였다. {사림이 탁영의 옛집인 운계정사에 사우(사당)를 건립하면서 이름을 자계라 하고 탁영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대개 이는 화를 당할 때에 계곡의 물이 핏빛으로 된 이상한 일이 있어서 일 것이다. 만력 무신년(1608년)에 절효(휘극일)와 삼족당(휘대유)을 같이 모셨다.} ○가을에 행실이 바르므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전생서 직장이 되었으나 잠시 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中宗十四年己卯先生四十一歲(중종14년 기묘, 1519년 선생 41세)
二月乙巳蒐輯濯纓先生遺稿經始鋟刻付諸本祠{時觀察使慕齋金安國捐廪以相其役又爲之文以序之}
2월 을사(41일에 해당?)에 탁영선생의 유고를 모아서 처음으로 발간하게 이르렀고 본 사당의 여러 내용들을 첨부하였다. {이때 관찰사 모재 김안국(1478∼1543)이 그 직분에 맞도록 비용을 보태 주었고 서문을 썼다.}
○四月十日赴薦科殿試 ○先是戊寅 上方求行誼之士金慕齋按節嶺南修剔巖穴人才淸道士林推先生第一拜參奉又拜典牲署直長又靜庵趙先生建議薦科其秋 上命京外審覈才行兼備者一百二十人至是設殿試 上御勤政殿 命製策問其畧曰治效未著人心漸至澆漓民生日就困窮必有其致可得明言其效歟伊欲民安物阜風俗於變復唐虞之治其道何由云云
○4월10일 전시(殿試)에 추천되었다. ○이보다 먼저 무인(14일)에 임금이 행실이 바른 선비를 구할 때 김모재(김안국)가 영남지방을 다스리면서 뼈를 깎아서 바위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수양한 인재를 구하자 청도의 선비들이 선생을 제일로 추천하였다. 따라서 참봉에 임명되고 또 전생서 직장이 되었다. 또 정암 조선생(조광조)이 천과(현량과)를 건의하였다. 그 해 가을에 임금이 지방에 사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을 엄격히 조사하여 120명을 추천하라 하여 전시 시험을 치렀는데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가 시험문제를 내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다스림의 효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 백성들 마음에 차츰 스며드는데 백성들 삶이 날로 곤궁해 지면 반드시 힘써 얻으려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효과를 분명히 말하라.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물건을 산더미처럼 쌓아두면 풍속이 당우(중국의 요순시대)가 다스리던 것처럼 바뀔 수 있을 것인데 그 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등이다.
○是月十四日對策中賢良科卽拜成均典籍遷戶曺佐郞兼春秋館記事官又遷正言辭不就是榜登二十八人掌令金湜居第一先生居二十一屢拜不就後除漆原縣監居三月化行邑人示如神明因謝歸家食時羣小用事指爲僞學盡收官爵科第先生見幾歛退築室于雲門山下愚淵之上扁其堂曰三足蓋取壽足榮足食足之義也托興漁獵翛然自得有遯世無憫這意思
○이달 14일에 대책에 대한 답을 잘 써서 현량과에 합격하고 즉시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겼다. 또 정언으로 옮겼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시험에 28명이 붙었는데 장령 김식(1482∼1520)이 1등하고 선생이 21등을 하였다. 임명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이후에 칠원현감으로 3개월을 지내면서 교화가 읍민들에게 퍼져 백성들은 신과 같이 여겼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군소 무리들이 일을 만들어 <현량과를> 허위의 학문이라 하고 관작을 모두 빼앗고 과거를 없앴다. 선생은 이시기에 물러나기를 원하여 운문산 아래의 우연(우매한 연못의 뜻)위 한쪽 귀퉁이에 집을 짓고 그 당호를 삼족이라 하였는데 이 뜻은 나이도 이정도면 만족하고 영예와 먹을 것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낚시하고 사냥하는 것을 즐기면서 스스로 세상에서 몸을 피하여 고민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았다.
○邑誌云謹按前輩之論先生高風雅量達識明見平生無一點物累則豈肯以飮食爵位享壽爲自足名其堂而累其心耶己卯錄附會非先生之本意而果以是傳於後豈不惜哉嘗見禮記曰君子不失貌於人不失色於人不失口於人是故君子貌足畏也色足莊也言足信也以此三足爲堂名則信合先生之德矣觀者詳之或云漁樵耕三者爲足未知孰是兵燹之餘其詳未傳豈不惜哉
○읍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삼가 선배들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선생은 높은 풍채와 아량과 지식과 사물을 밝게 보는 눈을 가졌으며 평생 흠이 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즉 먹을 것과 벼슬과 나이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고 이를 그 집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그 마음에 누가 있겠는가. 기묘록(기묘사화)에 실려 있는 글은 선생의 본뜻이 아니다. 이 결과가 후세에 전해진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예기를 보면 군자는 사람들 앞에서 체모를 잃지 아니하고 얼굴색을 잃지 아니하고 실없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군자는 체모는 충분히 경외함이 있어야 하고 얼굴색은 충분히 장엄함이 있어야 하고 말에는 충분히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로서 3족(三足)을 집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선생의 덕과 잘 맞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간혹 고기잡고 사냥하고 농사짓는 3가지를 3족이라고 말하는데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의 여파로 그 상세한 것이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한가.
○十二月十六日罷薦科士禍大起二三奸凶{一凶南衮二奸沈貞洪景舟}同謀搆禍滔天蔽日儒林喪氣靜庵被謫俄而 賜死一時淸流波及無遺先生超然遠覽淵然湥識獨漏密綱君子此之梅南昌郭有道之先見也先生自經己卯之禍不求聞達屛居雲門與曺南冥郭警齋申松溪爲道義交日講經理或出漁獵優遊度世晦迹終老已至三十餘年矣
○12월16일 천과(현량과)가 폐지되고 사화가 크게 일어났는데 2~3사람의 간흉{1흉 남곤(1471∼1527), 2간 심정(1471~1531), 홍경주(?∼1521)}들이 같이 모의하고 사화를 구상하여 하늘을 잠기게 하고 해를 가려 유림들이 화를 입었다. 정암(조광조)는 귀양가서 죽임을 당하여 한꺼번에 청류파(젊은 사림파)가 단절되었다. 선생은 초연히 먼 곳의 연못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알아차리고 촘촘한 조사에도 혼자 빠져나갔다. 군자는 이처럼 매화나무가 울창한 성곽에도 길이 있다는 선견이 있었다(?). 선생은 스스로 기묘사화를 지나면서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욕심내지 않고 집을 가려 막고 운문에서 살았다. 조남명(조식), 곽경재(곽순,1502~1545), 신송계(申季誠, 1499~1562)와 같이 도의로서 사귀었다. 날마다 경리(經理)를 강의하고 간혹 밖에 나가 낚시하고 사냥하여 넉넉하고 즐겁게 살다가 종적을 감추었으니 30여년 간 이었다.
嘗遺粟於南冥南冥不受以詩復之曰於光亦不受此人劉道原所以胡康侯至死貧不言先生㴱懲家禍所著文集燒去不傳然以濯纓年譜今始現世推之其或兵燹之中遺失歟寓興詩三首主守完山李顯行旣跋矣
일찍이 남명(조식)에게 밤을 보내었으나 남명이 받지 않고 시를 지어서 돌려주기를 사마광(司馬光)에게서도 받지 않는 이 사람은 유도원(송나라 때의 청렴했던 선비)이다. 그래서 호강후(송나라 사람)도 죽을 때 까지 가난함을 말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선생에 대한 자료를 모우고자 하였으나 가문이 화를 당하여 훌륭한 문집들이 불태워져서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나 탁영연보가 지금 세상에 나타났으니 이를 추천하며, 간혹 나머지는 전쟁 때문에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취미로 지은 시 3편이 전해지는데 옛날 우리고을의 수령이었던 완산 이현행(1700년도 초기사람)이 발문을 지은 것이다.
◎中宗三十九年甲辰先生六十六歲(중종39년 갑진, 1544년 선생 66세)
先生托興漁獵時在山中聞 中廟昇遐卽解六箇鷹絛放之而歸北向四拜而慟哭之有放鷹詩朴逍遙亦次韻(同見下詩集}○南冥嘗訪先生共宿中夜呼其字覺其睡曰余忘了不告也聞朝廷將以公爲持平朝夕擬望云先生蹶然起曰此誰之言南冥大笑先生頹然還臥亦此客亦誑我也南冥曰渠有才器常思施用故吾以此試之又常稱先生有廊廟才蓋其有許多手段才局也先生雖見幾歛退致君澤民之心未嘗忘于懷矣至是聞大行訃音益悲痛之
선생이 낚시와 사냥으로 즐겁게 살고 있을 때 산중에서 중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6마리의 매를 풀어서 날려 보내고 돌아와 북쪽을 향하여 4번 절하고 통곡하였다. 방매시(매를 놓아준 것을 읊은 시)가 있는데 박소요(박하담,1479~1560)가 또한 이어서 지었다. (아래 시집을 보라) ○남명이 일찍이 선생을 방문하여 같이 잠자리에 들어 밤중에 그의 자(휘대유의 字)를 불러 깨워 말하기를 내가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소문에 들으니 조정에서는 장차 공을 지평으로 삼을 것이라고 하니 아침저녁으로 생각해 보고 기다려보라 고 하자 선생은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하자 남명이 크게 웃었다. 선생은 쓰러지듯 돌아누우면서 이 손님이 나를 속이려 하는구나 하였다. 남명이 말하기를 그대가 곧은 뜻과 재주로서 항상 이를 펼쳐 보고자 하므로 내가 이를 시험하여 본 것이라 하였다. 또 항상 선생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고 한 것은 대개 여러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선생은 비록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임금에게서 물러나 백성의 마음을 돌보면서 임금을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속에 품었다. 그러니 임금이 승하했다는 부음을 듣고 더욱 비통해 했다.
◎仁宗元年乙巳先生六十七歲(인종원년 을사, 1545년 선생 67세)
六月二十九日有 旨復薦科復授紅牌○時諸賢紛紛赴 召如或不及而決於去就者惟先生與李延慶申遵美數三人也復科授典籍先生爲鄕大夫勸起三受祖餞竟至大邱而還時先生聞有 命促裝不齎糧而行或者告以道遠粮絶何以繼之先生笑曰國家起我輩於久廢己爲除拜縣官自當繼食到京師可受厚祿何憂粮絶人莫測其由一日馳往百里謂其從曰習閑己久遽作遠行我疾作不可以行乘輿以返
6월29일 천과(현량과)를 회복시키라는 임금의 지시가 있었고 홍패를 다시 받았다. ○이때 여러 선비가 허둥지둥 부름을 받고 갔으나 간혹 도착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가지 못한 사람은 오로지 선생과 이연경(1484∼1548)과 신준미(1491~1562) 3사람이었다. 과거가 회복되어 전적의 관직을 받고 선생은 향대부가 되어 이 소식을 듣고 대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선생은 왕명을 듣고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가면서 먹을 양식도 준비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길도 먼데 양식이 떨어지면 어떻게 계속 가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우리들을 오랫동안 버려두었다가 다시 불러 고을의 관리로 임명하신 것은 당연히 먹을 것도 줄 것이고 서울에 도착하면 많은 녹봉을 받을 것인데 어찌 양식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하루에 말을 달려 100리를 가면서 그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한가롭게 지내던 것이 몸에 배여 갑자기 먼 길을 오니 병이 나서 더 이상 갈수 없다하고 수레를 타고 돌아오고 말았다.
○十月初十日還罷科 明廟卽位文定王后垂簾時由奸臣李芑所啓也○先生識度明亮嘗見南冥曰吾平生雖遇難事一思之再思之則有何難知事也盖有此識鑑故己卯之禍獨漏密綱
○10월10일 다시 과거가 폐지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섭정)할 때 간신 이기(1476~1552)가 상소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지식의 정도는 밝고 넓어 일찍이 남명을 보고 말하기를 내 평생 비록 어려운 일을 만났으나 한번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운 일도 풀린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식견과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고 기묘사화 때 잔 그물(촘촘한 조사)에도 혼자 빠져 나갔다.
◎明宗三年戊申先生七十歲(명종3년 무신, 1548년 선생 70세)
正月辛丑編濯纓先生年譜草本成五月竹醉日附年譜跋○時先生隱居愚淵精舍己禍三十年矣命門人盧遂製三足堂記其後栗谷李先生撰三足堂序其畧曰主人先生霜松潔操水月虛襟爲孝爲忠道己盡於早世宜仁宜智癖又成於晩年云爾曺南冥周愼齋金鶴沙金藥峯徐華谷諸賢並有慕韻愼齋撰淸道客舍重建記有雲門丈規畵之語先生監柒原時撰武陵誌及詩韻精舍煌燼於壬亂兵火純祖癸未重建舊堂又甲午重修謂堂爲臺而主守錦城朴齊尙撰記
1월 신축(24일)에 탁영선생연보를 편찬하여 초고가 완성되었고 5월 죽취일[1]에 연보에 발문을 붙였다. ○이때 선생은 우연정사에 숨어살고 있었는데 이미 화(기묘사화)가 지난 지 30년이 되었다. 문인인 노수(盧遂)에게 명하여 삼족당기를 짓게 하고 그 후 율곡 이선생이 삼족당서를 찬하였다. 이의 대략적인 내용은 ‘주인선생은 서리 내린 소나무와 같이 청결하고 물과 달을 부리고 생각을 비워서 효도하고 충성하였으니 그 도리를 젊었을 때 다 하여 마땅히 인의와 지혜의 습관이라고 하겠으며 또 늙어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조남명(조식), 주신재(周世鵬, 1495~1554), 김학사(金應祖, 1587~1667), 김약봉(金克一, 1522∼1585), 서화곡(徐元履, 1596~1663)등 여러 선비가 시를 썼고 신재(주세붕)는 청도객사 중건기를 찬하여 운문의 그림에 그 말씀이 있다. 선생이 칠원현감일 때 무릉지를 찬하고 또 시도 썼다. 정사(精舍)는 임진왜란 때 타버려 순조 계미년(1823)에 구당을 중건하고 또 갑오년(1834)에 당(堂)을 중수하여 대(臺)가 되었는데 그 고을 수령인 박제상이 찬한 기록이 있다.
[1]竹醉日; 대나무가 술에 취한다는 뜻으로 5월13일, 이때 대나무를 심으면 잘 산다고 함.
◎<明宗>四年己酉先生七十一歲(명종4년 기유, 1549년 선생 71세)
十一月二十八日哭弟昌寧公于南原別庄○昌寧公生于 成宗二十四年癸丑時寓居
南原仍卒有二弟大畜大雅
11월28 동생인 창녕공(大壯,1493~1549)이 죽어서 남원의 별장(別庄)으로 갔다. ○창녕공은 성종 24년 계축(1493년)에 태어나 이때(1549년)는 남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연이어서 두 동생인 대축(1496~1546?)과 대아(1499~?)가 죽었다.
◎明宗五年庚戌先生七十二歲(명종5년 경술, 1550년 선생 72세)
時丁遊軒有奉呈詩一首明年辛亥又有奉答詩一首與偉人賦一篇{詩見詩集}
이때 정유헌(丁熿, 1512~1560)시 한편을 보내왔고 다음해인 신해년(1551년)에도 또 답방으로 시 한편을 보내왔는데 위인부(위인을 노래한 문장)1편도 같이 보내주었다. {시는 시집을 보라}
◎明宗七年壬子先生七十四歲(명종7년 임자, 1552년 선생 74세)
二月二日先生易簀于愚淵上三足堂享年七十四先生晩以宗系爲憂臨終遺命曰若承宗子孫無后則以庶子孫承宗永奉宗祀士林稟于朝家 御命承嫡錄用子孫葬于堂北之金谷艮坐原申松溪挽有涵養性情能主靜操存思慮自無邪之句
2월2일 선생이 우연위의 삼족당에서 별세하셨다. 향년 74세였다. 선생은 만년에 종계(가문을 잇는 사람)로서 임종을 당하게 되어 유언을 하기를 만일 뒤를 이을 자손이 없게 되면 서자라도 뒤를 이어 영원히 종가의 제사를 받들라하였다. 사림에서 조정에 품신하니 임금의 명령으로 서자도 적자가 되어(承嫡) 자손으로 기록되었다. 장지는 당(堂)의 북쪽 금곡 간좌 언덕이다. 신송계(申季誠, 1499~1562)의 만장에는 조용한 성품을 가져서 생각하고 살피는 것에 간사함이 없으셨다 하였다.
◎明宗十年乙卯(명종10년 을묘, 1555년)
丁遊軒又有書懷詩一篇又寄先生嗣男詩一篇{同見詩集} ○四月九日淑人碧珍李氏繼逝祔葬于先生墓左明年丙辰九月日南冥曹先生題其墓表其畧曰如公盖世雄天下士辨局宏㴱勿勿乎其仁言論激勗僴僴乎其義龍州趙先生絅贊其言曰此二句可謂晝出三足堂人稟者矣又曰濯纓之不得死三足之不盡展布雖若天之薄乎賢者萬世之名永長存與天地不朽則其厚何如哉芝蘭焚而后香聞寶劍埋而後氣騰吾於濯纓三足堂亦云觀於是言則先生之大畧可見矣
정유헌(丁熿, 1512~1560)이 또 회시(懷詩) 한편을 보내오고 선생의 봉사손에게도 시 한편을 주었다. {같은 시집을 보라.} ○4월9일에 숙인 벽진이씨가 돌아가시어 선생의 묘소 좌측에 안장하였다. 다음해 병진(1556년) 9월일에 남명 조선생이 그 묘표를 적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공과 같은 세상의 뛰어난 천하의 선비는 말솜씨나 재량이 넓고도 넓다. 그 선한 말과 논의는 격하제면 굳세고 굳세다. 그 의(義)를 용주(지금의 평북 용천?) 조선생(누구?)이 아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두 구절로서 가히 삼족당의 인품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탁영의 억울한 죽음과 삼족(三足)의 다 펴지 못함은 하늘의 도움이 약했기 때문인가 현자의 영원한 이름은 영원히 존재하여 하늘과 땅 같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그 두터움이 어떠한가. 지초와 난초는 타버려도 향기가 남고 보검은 묻어버려도 기운이 날아오르니 우리 탁영과 삼족당이 이와같다. 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들어보면 선생에 대해서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다.
◎宣祖元年戊辰(선조 원년 무진, 1568년)
十月十日有 旨復薦科傳 敎削奪南衮官爵以正其凶慝害善之罪而未果後十年
丁丑復薦科
10월10일 천과(현량과)를 회복하라는 임금의 지시가 있었고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으며 정의로서 그 흉폭하고 사특한 죄를 물었다. 그후 10년이 못되어 정축년(1577년)에 천과가 회복되었다.
◎宣祖十一年戊寅(선조 11년 무인, 1578년)
秋士林以紫溪祠爲書院先奉安濯纓先生
가을에 사림에서 자계사를 서원으로 하고 먼저 탁영선생을 봉안하였다.
◎宣祖十二年己卯(선조 12년 기묘, 1579년)
十一月蘇齋盧先生撰賢良薦科榜目跋{榜目二十八人安潞主其事與金穎男沈喜壽議集錢謀鋟悉依故例}
11월 소재 노선생(盧守愼, 1515∼1590)이 현량천과방목의 발문을 썼다. {방목의 28인 인 안로(安潞)가 주로 그 일을 김영남(1555~1617), 심희수(1548~1622)와 같이 의논하여 비용을 모아 모든 사실을 인쇄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옛 사례에 따른 것이다.}
◎宣祖四十一年戊申(선조 41년 무신, 1608년)
春重建紫溪書院先是祠宇毁于壬亂兵燹至是重建並享節孝公三足堂兩先生
봄에 자계서원을 중건하였다. 먼저 이 사당은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중건하고 절효공과 삼족당의 양 선생을 같이 모셨다.
◎光海主七年乙卯(광해군, 7년 을묘, 1615년)
重修祠廟{先是壬子趙黔澗爲淸道郡守因郡人曾營紫溪書院董廟成奉安三賢又祭三賢墓所}
사당을 다시 수리했다.{이보다 먼저 임자년(1612년)에 조검간이 청도군수가 되어 군의 사람들이 자계서원을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하니 사당을 다시 고치고 3현을 봉안하게 되었으며 3현의 묘소에 제사를 드렸다.}
◎仁祖二十六年戊子(인조 26년 무자, 1648년)
十二月四日重修廟宇進士陽川虛嵰撰上樑文{時郡守徐元履院長前平壤縣監息城李儼崇禎十六年癸未建輔仁堂金鳴遠製上樑文時郡守柳信男院長前參奉李重慶後郡守錦溪黃應奎撰仙巖祠移建記
12월4일 사당을 다시 수리하고 진사인 허겸이 상량문을 찬하였다. {이때 군수는 서원이(1596~1663)가, 원장은 전 평양현감 식성(현재 재령) 이엄이었다. 숭정 16년 계미(1643년)에 보인당을 짓고 김명원이 상량문을 지었다. 이때 군수는 류신남이고 원장은 전참봉 이중경이었다. 그 후 군수 금계황응규(?)가 선암사의 이건기(옮겨 세운 기록)를 찬하였다.
◎顯宗元年庚子(현종 원년 경자, 1660년)
二月慶尙道儒生李光鼎等上疏請 賜額同春宋文正公爲吏判莚奏六月禮曺回啓{禮判尹絳}藝文館額入啓{大提學李一相}備三望紫川紫溪{落點}紫淵
2월 경상도 유생 이광정 등이 상소를 올려 현판의 액호를 청하였다. 이해 봄에 송문정공(송시열, 1607~1689)이 이조판서가 되어 계속해서 상소하였고 6월 예조에서의 의견{예조판서는 윤강(1597∼1667)}이 있었는데 예문관에서 액호를 의논할 결과{대제학 이일상(1612~1666)}3개를 준비하였는데 자천(紫川), 자계(紫溪), 자연(紫淵) 중 자계로 정해졌다고 했다.
辛丑正月二十一日藝文館祭文入啓{左承旨臣洪處亮次知啓工曺參議知製敎臣李慇相製進}故儒臣金克一都承旨臣金馹孫正言臣大有三人同享慶尙道淸道郡紫溪書院{奉額官禮曺佐郞李馥寫額寫宇官金義信}
신축년(1661) 1월21일 예문관에서 제문을 지어 올렸다. {좌승지 홍처량(1607∼1683)이 대신 올린 서류, 공조참의 지제교 이은상이 지어서 올림}이 글에는 옛 유학자 김극일, 도승지 김일손, 정언 대유 이 3인은 경상도 청도군 자계서원에서 같이 향사하라고 되어있다. {액호를 받들고 간 사람은 예조좌랑 이복(1626∼1688)이고 액호의 글씨를 쓴 사람은 사우관(寫宇官) 김의신이다}.
賜額祭文畧曰鄕黨咸推是先揀掄束帛之聘有賁丘園賢良策士善類是授與奪何預時有享屯彭澤歸田邑民攀轅優遊水丘三足名軒沉冥韜晦馹召徒煩樂在自適誓不素飧遺躅尙存鄭卿謝墩
액호를 달 때의 제문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향당 사람들 모두가 추천하여 옛 선현들 중에서 가려서 뽑았는데 큰 언덕과 동산이 있어 현량 책사의 선한 선비들에게 이를 주고 뺏는 것에 어찌 관여하겠는가. 이때에 고향으로 돌아오니 읍민들이 수레에 매달리고 물가의 언덕에서 같이 즐겼으나 삼족이라 이름붙인 이 집은 침체되고 희미해졌다. 숨어있던 무리들을 불러 올렸으나 괴로움과 즐거움이 자신에게 있으므로 적당히 경계하고 소박하게 지낸 자취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벼슬이 겹치고 돈독함에 감사한다.(?)
寒岡鄭文穆公製奉安文畧曰厥有令姪天分甚高家庭殊行湖海眞豪偉量宏度超識遠見世路威夷所守不變沉冥鞱晦莫窺其際測其所存綽乎
한강 정문목공(鄭逑, 1543~1620)이 봉안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훌륭한 조카가 있었으니 천성이 아주 고귀하고 가문에 화가 미쳤을 때 호남으로 갔으니 진실로 호방하고 위대함이 많고도 넓다. 먼 일을 내다보고 위엄으로서 변함없이 이곳을 지켰으나 허물어지고 어두워지니 엿볼 수도 없구나. 이 때 그 여유로움을 보존할 지니.
經濟常享祝文曰內蘊經濟外事沉冥桑梓千秋仰止儀刑{請 賜額疏 賜額文春秋享祝詳見附錄之中}
경제가 올리는 축문에서 이르기를 안으로는 다스림과 구제에 힘썼으나 바깥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고향에서의 오랜 세월동안 의례를 우러러봅니다.{액호를 내려달라는 청원. 사액문과 춘추향축은 부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顯宗六年乙巳(현종 6년 을사, 1665년)
九月二十五日有 旨贈奉列大夫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者{節孝贈中訓大夫司憲府執義同日追 贈事濯纓 敎旨庚子三月十一日先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官直提學尙瑞院正者}
9월 25일 임금의 지시가 있었는데 봉열대부 홍문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증직하라 하였다.{절효(휘극일)는 중훈대부 사헌부집의로 증직하고, 같은 날 탁영을 추증하였는데 경자년(1660년) 3월11일에 먼저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자에 증직의 교지가 있었다.}
◎顯宗八年丁未(현종 8년 정미, 1667년)
時新創詠歸樓{時院長前參奉李光義崇禎記元後二甲申重創時院長李景濂又紀元後三己卯重修詠歸樓時院長主倅安東后人金履健製樓序文光山後人金光泰製樓重修記時有司金顯相李益慶}
이때 새로 영귀루가 창건되었다. {이때 원장은 전참봉 이광의이고 숭정 기원후 2갑신(1704년)에 다시 수리할 때에 원장은 이경렴이었다. 또 기원후3기묘(1759년)에 영귀루를 수리할 때에 원장이 거느리는 사람인 안동김씨 김이건이 루의 서문을 지었고 광산김씨인 김광태가 루의 중수기를 썼고 이때의 유사는 김현상, 이익경이었다.}
◎純祖三十年庚寅(순조 30년 경인, 1830년)
二月慶尙道儒生金相閏等疏三先生 贈諡未徹秋八月三道儒生李浚等疏請 贈
諡諡九月吏曹回 啓請議大臣判書徐能輔回 啓依 允十一月大臣獻議請先 濯纓先生爵諡蒙 允節孝三足堂兩先生未蒙 允
2월 경상도 유생인 김상윤 등이 상소를 올려 3분 선생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다. 가을 8월 3도(경상, 전라, 충청)의 유생인 이준 등이 시호를 내려달라 청하여 9월에 이조의 의견과 판서 서능보의 의견은 허락한다 하고 11월 대신들이 다시 청하여 먼저 탁영선생에게는 관작과 시호를 내리라 하였으나 절효와 삼족당 두선생은 받지 못했다.
◎憲宗八年戊申(헌종 8년 무신, 1848년)
時南原士林建社洞書院聯享東窓公<梅軒公>濯纓文愍公三足堂公道淵亭公<晩悔堂公>{祠廟上樑文典籍丁昌夾製常享祝文通政大夫成均館祭酒兼 經筵官唐城洪直弼製通訓大夫弘文館知製敎應敎延安金英秀書}
이때 남원의 사림에서 사동서원을 건축하고 동창공, <매헌공>, 탁영문민공, 삼족당공, 도연정공, <만회당공>을 같이 제향하였다. {사당의 상량문은 전적 정창협이 짓고, 상향축문은 통정대부 성균관제주 겸 경연관인 당성홍씨인 홍직필이 짓고, 통훈대부 홍문관지제교 응교인 연안김씨 김영수가 썼다.}
◎唐宁十年癸酉(현 임금(고종) 10년 계유, 1873년)
十月日始竪淑人碧珍李氏墓碑{先是戊辰朝令毁各道鄕賢祠後辛未又毁各道額院祠盡毁於其時}
10월일에 처음으로 숙인 벽진이씨의 묘비를 세웠다. {이보다 먼저 무진년(1868년)에 주정에서 각 도의 향현사를 철폐하라 하였고, 그 후 신미년(1871년)에 또 각 도의 액원사를 철폐하라하여 그 시기에 모두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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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8세(世) 대유(大有) : 삼족당선생(三足堂先生)
삼족당선생 김대유(金大有)는 중조(中祖) 김관(金管)의 8세손(世孫)으로, 직제학공(直提學公) 김준손(金駿孫)의 장자(長子)이며 탁영(濯纓)선생의 장질(長姪)이다. 선생은 성화(成化) 15년 서기 1479년에 청도군 이서면 운계리(雲溪里)에서 출생하였는데 자(字)는 천우(天祐),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천성(天性)이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총명(聰明)하여 4.5세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한번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8세 때 모친인 고씨(高氏)가 별세하므로 숙부(叔父)인 탁영선생이 일찍이 어머니 여윔을 측은(惻隱)하게 생각하여 각별히 사랑하며 소학을 가르쳤다. 후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선생에게 수학하였는데 일두선생도 그 총명하고 착함을 늘 칭찬하였다고 한다.
서기 1498년 20세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친 직제학공(直提學公)과 함께 호남으로 귀양 갔다가 서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9년 만에 풀려나왔다. 이듬해 서기 1507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삼족당선생행장(行狀)에는 정시(庭試)에 장원(壯元) 합격한 것으로 기록됨) 동년 12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3년 여묘(廬墓)하였고, 서기 1509년에 계비(繼妣) 남원양씨(南原梁氏)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하였다.
중종(中宗) 13년 서기 1518년에 전국에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한 선비를 천거(薦擧)하게 되는데, 여러 관아(官衙)에서 선생을 천거하는 추천장(推薦狀)의 글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관찰사(觀察使) 김안국(金安國)은 「아버지 등창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고,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한 번도 웃지 않고 흙막 속에서 시묘(侍墓)하였고, 형제들에게 좋은 농토(農土)를 다 나누어 주면서 자기는 박토(薄土)를 가졌으며, 숙(叔)의 신주(神主)를 지성으로 모셨다.」고 하였고,
승정원(承政院)에서는 「효도와 우애(友愛)가 지극하고 기운(氣運)과 도량(度量)이 탁월한 사람이며 지식(知識)이 밝고 넓다.」고 하였으며,이조(吏曹)에서는 「효(孝)스럽고 우애(友愛)함이 하늘에서 내리었다.」고 하였고,
사관(四館)에서는 「기품(氣品)이 초범(超凡)하고 식도(識度)가 환하게 밝다.」고 하였고,
고향(故鄕)에서는 「아버지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고 부모상에 3년이나 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며, 한 번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벼슬은 처음에 참봉(參奉: 종9품)에 제수되고 이어서 서기 1518년에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 종7품)에 옮기었으나 곧 사임하고, 본군(本郡) 동쪽에 창고를 만들어 세곡(歲穀)을 저장토록 하여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중종(中宗) 14년 서기 1519년에 현량과(賢良科)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典籍: 정6품), 호조좌랑(戶曹佐郞: 정6품), 춘추관기사관(記事官: 정6품)을 겸하였고, 사간원정언(正言: 정6품)에 이배(移排)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으니, 다시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하므로 부임하여 혜정(惠政)을 베풀어 치적(治績)이 많아 고을을 다스린 지 3개월 만에 덕화가행(德化嘉行: 덕으로 교화하여 선행함)하여 백성들이 신명(神明)처럼 모셨다.
같은 해 서기 1519년 11월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실각(失脚)하자 현량과도 폐과(廢科)되어 선생은 난세를 피하여 청도 금곡(金谷) 운문산(雲門山)에 들어가 정자(亭子: 삼족당(三足堂))을 짓고 당대의 석학(碩學)들과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독하고 낚시와 사냥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살았다.
인종(仁宗) 1년 서기 1545년에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조정에서 홍패(紅牌: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리는 증서)가 내리므로 선생은 소명(召命)에 응(應)하여 대구까지 갔다가 병을 핑계로 청도에 되돌아왔다. 그때 부름 받은 선비들은 모두 나라의 부름에 달려갔으나 선생과 오직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의 시의(時宜)에 맞는 용단(勇斷)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한 것은 절사신(節史臣) 탁영의 직필(直筆) 못지않은 용기로 후세에 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명종(明宗) 7년 서기 1552년 3월 2일에 삼족당 정자(亭子)에서 74세의 일기로 별세하니 묘(墓)는 정자의 북쪽 금곡산 에 장례하였다.
선조(宣祖) 1년 서기 1568년 군수(郡守) 이의경(李宜慶)이 선생이 본 고을 백성들에게 베푼 은덕이 크다고 하여 본군(本郡) 동쪽 사창(社倉) 옆에 사당을 지어 박소요(朴逍遙)선생과 함께 제향(祭享)하였고, 선조(宣祖) 41년 서기 1608년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중건(重建)하여 절효선생, 탁영선생과 함께 배향(配享)하였고, 광해군(光海君) 12년 서기 1620년에 우연서원(愚淵書院)을 세워 선생과 박소요(朴逍遙)선생, 곽경재(郭警齋)선생을 향사(享祀)하였고, 인조(仁祖) 원년 서기 1623년에 박종주(朴宗冑)가 선암(仙岩)에 사당을 옮겨 세웠고, 현종(顯宗) 6년 서기 1665년에 홍문관응교(應敎: 정4품)에 추증(追贈)되었다. 또 헌종(憲宗) 14년 서기 1848년에 남원(南原)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향사하였다. 선생을 모신 사당은 청도 자계(紫溪)서원을 비롯하여 장수 사동(社洞)서원, 지도(智島) 연계사(蓮溪祠), 익산 동산(東山)서원, 승주 송천사(松川祠) 등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선생의 성품(性品)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선생은 서실(書室)에서 홀로 가끔 장가(長歌) 만무(慢舞: 마음 내키는 대로 추는 춤)하였는데 가인(家人)들이 그 뜻을 측량하지 못했다. 사냥을 한 후에는 크고 작은 것만 서로 비교해 보고 고기는 먹지 않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기 1544년 사냥하다가 중종(中宗)의 승하(昇遐) 부음(訃音)을 듣고 새매 여섯 마리를 풀어 날려주었다. 좋은 농토(農土)와 제전(祭田) 등은 모두 아우인 대장(大壯)에게 주어 탁영선생을 봉사(奉祀)케 하고 박토(薄土)를 가지고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돌아가신 후에도 자제(子弟)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게 하였다.
선생의 호를 삼족당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다음 두 가지로 아려져있다,
남명 조식이 찬(撰)한 김대유전(金大有傳)에는 「공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이가 60이 지났으니 수(壽)에 족하고, 사마시(司馬試)와 천과(薦科)에 올라 대성(臺省: 사헌부, 사간원의 벼슬의 총칭)을 역임하고 현인(縣印)도 찼으니 영(榮)도 족하고, 조석(朝夕)의 공궤(供饋: 음식을 줌)에 주육(酒肉)이 걷히지 않으니 식(食)도 족하다. 그러니 나의 호를 삼족당이라 하리라.」하였고, 또 문인 소암(小庵) 노수(盧遂)의 삼족당기문(記文)과 대동보(大同譜)에는 「삼족(三足)이란 시냇물과 산이 아름다워 족하고, 시원한 바람과 달이 풍족하고, 음아(吟哦: 시를 읊음)하는 것이 풍족(豊足)하도다.」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학자들은 선생의 인품과 식견(識見)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 그가 찬(撰)한 삼족당서(三足堂序)에서 「주인 선생은 상송(霜松)과 같이 결백(潔白)한 지조(志操)요, 수월(水月)같이 청명한 회포(懷抱)이네, 충효(忠孝)의 도리는 소년시절에 다하였고, 인지(仁智: 자애롭고 지혜가 뛰어남)의 취미는 만년(晩年)의 성벽(性癖)이 되었네.」
남명(南冥) 조식(曺植): 김대유전에서 「나는 일찍이 남의 인격을 評하지 않으나 오로지 공께서는 천하에 제일가는 선비의 자품(資品)을 가지셨다. 그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과 도량은 널리 사람을 용서하고 글과 역사에 능한 선비였으며 굳세고 힘찬 모습으로 활 쏘는 법과 말 타는 법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호걸(豪傑)이었다.」
송계(松溪)선생: 삼족당행장에서 「헌헌(軒軒: 뛰어난 모양)한 대장부(大丈夫)로서 굳세고 힘찬 기상(氣像)이 뛰어났다.」
박병제(朴甁齊)선생: 「모든 행하는 일에 있어서 예의에 어긋남이 없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 「안으로는 경학(經學)에 밝고 밖으로는 엄(嚴)하고 깊으며 굳세다.」
권남강(權南岡)선생: 맑고 깨끗하게 흐르는 시냇가에서 두루 노시며 마음을 즐기고 공작(公爵), 후작(侯爵)을 눌러 보는 뜻을 가지셨다.」
김학사(金鶴沙)선생: 「선생은 우주간(宇宙間)에 계시지 않으나 만고(萬古)에 그 이름은 맑고 깨끗하다,」
김해김씨(金海金氏) 대동보(大同譜)에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성종(成宗) 서기 1479년에 출생하여 중종(中宗) 정유(丁酉)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유(乙酉)년에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다. 이조(吏曹)의 추천장에는 「효(孝)스럽고 우애(友愛)함이 하늘이 내었다.」라고 되어 있고, 사관(四館)의 추천장에는 「기품(氣品)이 초범(超凡)하고 식도(識度)가 환하게 밝다.」라고 하였으며, 고향에서의 추천에서는 「아버지의 종기를 입으로 빨았으며 부모상(父母喪)에 3년이나 이를 들어 내보이지 않았으며 한 번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경술(經術)과 재행(才行)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 제현(諸賢)의 추천을 받았다. 벼슬이 사관원정언(正言: 정6품)에 이르고, 후에 칠원(漆原)의 수령(首領: 현감(縣監))이 되어 치적(治績)과 교화(敎化)가 뛰어나 수령이 된지 3개월 만에 남녀(男女)가 길을 따로하였다.(즉 그만큼 남녀가 유별(有別)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간신(奸臣)들이 등용되어 일을 하니 공은 사임(辭任)하고, 세상을 피해 초야(草野)에 묻혀 운문(雲門)의 우연(愚淵) 위에 집을 짓고 낚시와 사냥하는 것으로 취미로 삼고 유유자득(悠悠自得: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아니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 편히 삶)해서 문달(聞達: 명성이 높아짐)을 구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살아도 조금도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없었다.
남명 조식선생과 더불어 날마다 경서와 성리학을 강독하고 도회(韜晦: 재지(才知)나 학식(學識)을 감춤) 자락(自樂)하며 당호(堂號)를 삼족(三足)이라 하였으니 삼족이란 시냇물과 산이 아름다워 풍족하고, 시원한 바람과 달이 풍족하며, 음아(吟哦)하는 것이 풍족하다는 것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삼족당의 서문을 지었다.
가화(家禍)를 깊이 조심(操心)하여 문집(文集)을 모두 불태워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는데, 그 후에 유고(遺稿)를 주워 모아 책 한권을 겨우 만들었으나 인쇄하지는 않았다. 농사(農事)와 집을 나눌 때 제전(祭田)과 묘직이 등을 모두 아우인 대장(大壯)에게 주어 탁영선생을 봉사(奉祀)하게 하고 박토(薄土)를 가지고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가정(嘉靖) 임오(壬午)년 서기 1552년 2월 74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군(郡)의 동쪽 우연(愚淵) 북쪽 금곡산에 간좌(艮坐)이다. 묘비명(墓碑銘)은 남명 조식선생이 찬하였다. 현종(顯宗) 을사(乙巳)년 서기 1665년에 홍문관응교(應敎: 정4품)에 추증되고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벽진이씨(碧珍李氏)로 을유(乙酉)년 4월 9일에 별세하였다. 부친은 현감(縣監) 이량(李樑)으로 경은(耕隱)선생의 후손이다. 묘는 부군(夫君)과 쌍분(雙墳)이며 묘비가 있다.」
발췌, 편집 :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김해김씨(金海金氏) 서원대동세보(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金海金氏) 삼현파(三賢派) 계보해설(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김대유 의 묘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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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생 대장이 죽고 연이어 두 동생 대축, 대아가 죽었다라고 연보에 나와있으니 대유 할아버님이 제일 장수하셨군요.
대축, 대아 할아버지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싶은데 정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