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정년퇴임식 소회
김한곤(명예교수, 문과대학 사회학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2021년 십이월 어느 토요일의 오후, 나는 팔공산 자락의 행사장을 향하여 비교적 느긋한 마음으로 승용차를 몰고 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붉고 노란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던 경관과는 대조적으로 빛바랜 채 매달려 있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들이 왔다가는 사라져 간다. 몇 주 전 대학원 박사과정동창회 회장으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예상치 못했던 팬데믹 때문에 미루었던 정년퇴임 행사를 1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개최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COVID-19로 인하여 엄중한 시기이기에 염려되는 바가 없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마냥 사양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자고 해서 성사된 행사이기에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30대 초반에 부임하여 35년이란 세월을 함께한 영남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제법 쌀쌀한 날씨의 3월 첫째 주 월요일에 시작된 첫 강의 이후 팬데믹으로 온라인의 비대면으로 마무리된 마지막 강의까지 짧지 않은 세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이 추억으로, 때로는 회한으로 남아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면서 어느새 행사장에 도착하였다.
겨울날 초저녁 시간의 팔공산 자락은 피부로 느낄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아 을씨년스럽지는 않다. 행사장에는 행사준비의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고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김한곤 교수님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퇴임을 한 지 어느듯 십 개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퇴임을 눈앞에 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둠이 내리고 예정된 시간이 되자 동창회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고별강연의 순서까지 정년퇴임을 기리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팬데믹으로 엄중한 시기의 연말 토요일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경향각지에서 60 여명의 졸업생들이 참석하여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차가운 바깥 날씨와는 달리 실내는 따뜻한 온기가 온 몸으로 느껴진다.
여느 퇴임식처럼 덕담과 소회 그리고 기념품 증정 등 일련의 의식이 끝나는 듯하더니, 실내에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지도학생 중 한 명이 무대 앞으로 나와 스승의 은혜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가 실내를 채워가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졸업생들이 하나 둘씩 모두 일어나 장미꽃 송이를 들고서 나에게로 다가와 안겨주고 포옹을 하고 덕담을 건넨다. 가슴이 뭉클해 지며 만감이 교차한다. 이 순간, 이렇게 과한 축복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대학에서 보낸 삼십 여 년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으로 충만하다. 학위취득 후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성장해 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함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생긴다. 순간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간다.
행사의 끝자락에 초대된 성악가가 Feliz Navidad를 멋지게 부르면서 다가오는 성탄절 분위기와 함께 때늦은 정년퇴임 행사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였다. 정성스레 준비한 행사장 곳곳의 포토존에서 제자들과의 기념촬영 역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의 순간들이다.
올 한 해도 이제 두 달 남짓 남겨 두었으니 세월이 무척이나 빨리 흐른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정념퇴임을 한 지 어느새 두 해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은퇴 이후 나의 생활도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는 집에서 그다지 머지않은 텃밭에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들러 두 세 시간 소일을 하면서 보내며, 한 두 번은 친구나 지인들과 어울려 운동을 하면서 건강관리도 하는 편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3~4일은 여덟 평 남짓 소박한 나만의 공간으로 출근아닌 출근을 한다. 책도 읽고 글쓰기를 하기도 하고 연습삼아 틈틈이 악기를 가지고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그마한 자부심과 함께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간다.
요즈음도 가끔 주말에 교정에 들러 산책을 하노라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직장 생활을 영남대학교에서 무사히 마치고 명예교수로서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영남학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우러 나온다. 정년퇴임을 하면서 학교로부터 받아 사무실 벽에 걸어 둔 사진액자에는 멋진 학교전경과 함께 ‘飮水思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자성어의 뜻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하지만, 무탈하게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내는 나로서는 영남학원에 대한 고마움을 새삼 느끼곤 한다. 대학입학 지원자의 급격한 감소와 십 년 이상 지속되어 온 대학등록금 동결 등 대학의 대내외 여건은 녹록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일심단결하여 이 모든 어려움을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리라 믿으면서 영남학원의 무궁한 발전을 오늘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