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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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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훈민정음 스크랩 보은미래신문, 세조와 신미대사
향상일로 추천 0 조회 70 14.11.14 15: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의 영산김씨 가문에서 부친 김훈과 모친 여흥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벼슬에 등과한 후 태종 때에 영의정까지 지낼 수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섭렵하고 출가 입산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장경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된 경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서로된 원전을 보기 위하여 범어 공부를 하였다.

범서경전이 부처님 뜻에 가장 근접한 경전이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인이 많아 배우기 쉬운 구리들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침조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우리글을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글을 만들데 집현전을 확장하고 장안에도 우수한 학자들이 많지만 이번엔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집현전에 초빙하여 가장 배우기 쉽고 이해하기 쉬워 누구나 속히 터득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발탁된 신미선사

그 중 유일하게도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선사가 세종대왕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 한글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하여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를 한끝에 신미선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토도 달아 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고 우리글이 만들어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 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의 노래를 지었다. 그 후 세종대왕은 신미선사의 수고를 치하하고 보답으로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사에 주불 아미타불과 좌우보처관음세지 양대보살을 복각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 도총섭밀전정법비지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 지어 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선사께 사호 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 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 정인지 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최초 발기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께 돌리자하여 신미선사가 쾌히 승낙하니 그 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 문헌 등에 신미선사가 집현전에 참석함까지도 밝히지 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거기에 대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유생들은 신미선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을 주도한데 대하여 과소평가하기 시작하여 언문인 부녀자들이 뒷방에 앉아서 친정에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시 글(쉽다는 말)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이냐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미선사는 세종대왕의 뜻에 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 것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아다.

유생들은 유서에만 능했고 신미선사는 불경, 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여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도 한번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선사의 뜻한 바대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이 머물러 있었기에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으로 세종대왕은 수양대군을 명하였다.

수양대군이 존경했던 인물 신미선사를 찾아온 곳 속리산

수양대군은 오래도록 학자들을 보살피면서 그 중에서 신미선사를 가장 존경하였다. 한글이 신미선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덕이 높으며 지혜가 뛰어나고 점잖고 용모도 거룩하기 때문이었다.
한글을 마치고 신미선사는 집현전에서 나와 속리산 복천사로 돌아오고 그 동안 세월이 흘러 세조인 문조에게 전위하고 문종께서는 병약하시어 일찍이 서거하시자 12세 되는 어린 나이에 단종이 즉위를 하시니

수양대군이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간신들은 어린 왕을 가지고 형식만 취할 것이 아니라 “수양대군께서 직접 정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하고 수차례 간청하였으나 세조는 불응하며 “날 보고 역모를 하란 말이냐?” 하고 신하들을 호되게 꾸짖는다. 신하들은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집권 할 것을 강요하니 하는 수 없이 혁명을 일으켰다. 단종은 영월로 귀양을 보내고 수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어느 날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네가 아무리 용상이 탐이 나기로서니 어린조카를 살해까지 할 수 있느냐! 이 더러운 놈아!” 하고 얼굴에다 침을 뱉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었다.

그 당시에는 혁명중이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병에 대한 관심이 적다가 어느 정도 민심이 수습이 되자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인지라 약을 써도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심신이 불안하고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용상을 보니 쳐다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산으로 들어가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으나 그러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소나무를 보고 연 걸린다 외친 세조

그리하여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 날 신미선사가 생각이 나서 신미선사를 찾아뵙기로 마음을 정하고 사전통보를 한 뒤에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청주에 와서 2일간을 쉬고 보은 말티재 밑(현 대궐 터)에서 하룻밤을 자고 세조 10년 갑신 2월 28일 신해일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세조께서 타신 연이 소나무가지에 걸릴 것 같으므로 세조대완이 이를 보고 “연 걸린다! 연 걸린다!” 하니 연을 낮추기 전에 가지가 ‘번뜩’ 들어주어 연이 상하지 않았다. 세조대왕은 하도 이상하여 연을 멈추고 그 사실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소나무에 대한 처리문제를 이야기하던 중 한 신하가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임금임을 알아보는 소나무이니 벼슬을 줌이 옳은 줄 아옵니다” 하고 아뢰자 세조께서는 “무슨 벼슬을 주면 좋겠는가?” 하시자 신하는 “정이품벼슬을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 자리에서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지금의 장관급을 말함)

스님들과 약속대로 정에에 복천사에 당도하니 당대의 큰 스님이신 신미선사와 수미, 학조, 학열, 사지등 많은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법당으로 안내 참배케 하고 3일간 기도와 법문을 듣고 마음이 평안하여졌다. 마음의 안정을 얻은 세조대왕이 환궁할때에 신미선사는 아뢰길 “강원도 오대산을 가면 월정사가 있고 월정사 위에 상원사가 있으며 상원사 위에 중대가 있습니다. 중대는 우리나라 오대 적멸보궁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궁입니다.(부처님 머리부분사리를 모신 곳임)그러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단월도 가는이가 적고 건물은 도괴직전입니다. 대왕께서 복원을 해주시면 그 공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대왕은 즉지 “나라에서 복원해 드리지요. 이곳에서 보궁복원에 감독할 분을 보내주세요” 하여 그 자리에서 학열스님을 보궁복원 감독으로 임명하여 보내었다. 학열스님이 걸어서 월정사 입구 월정거리에 당도하니 벌써 강릉쪽에 나라에 수세 바칠 것을 상원사 적멸보궁 복원비로 올리라는 통첩이 전달되어 곡식들을 모두 머이에 이고 등에 지고 월정사 거리로 빽빽하게 들어간다.(그 당시 인부노임을 곡식으로 환산함) 복원을 마치고 같은 해 유월에 낙성식을 하면서 신미선사는 오대산에 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세조대왕을 초빙하였다.

“보궁복원이 다 되었으니 대왕께서도 적멸보궁 낙성식에 참석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초청을 하니 세조대왕은 쾌히 승낙을 하고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유월 염천에 해는 길고 많은 신도들 앞에서 왕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옥대를 매었으니 땀을 흘려 부스럼이 가렵고 따가우나 손으로 만질 수도, 긁을 수도 없고, 하루 종일 괴로움을 겪다가 날이 저물고 어두워 밤 9시에 3경의 종을 치자 조용하다 다시 박이 분주함으로 “어찌하여 밖에 소란스러우냐? 하자. ”요소요소에 군사를 배치하느라 그러합니다.“ 하였다.

세조대왕은 “ 이 산중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하고 경호원들을 모두 들어가 자라고 하였다.
그것은 산골 시원한 물에 몸을 자유롭게 씻고자 함이었다. 밤 10시쯤되니 너무 조용한데 경호원들은 방에는 들어갔으나 잘 수가 없어 자라하여 방에는 들어갔으나 잠은 이룰 수 없었다. 이는 아직까지 단종편에서 자객들이 칼을 품고 암행기회만 노릴 때였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을 친견한 세조

세조대왕은 우수 달밤에 물소리 나는 쪽을 찾아 나섰다. 달은 구름이 가리어 어둡고 구름이 지나가면 환히 밝았다. 물소리 나는 계곡 바로 옆은 길이요. 길옆이 계곡인지라 길 둑에서 왕관과 옥대 곤룡포등을 모두 벗어 개울 옆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개울둑에 앉아 발을 담구고 몸을 씨으니 하루종일 햇볕이 안드는 숲속에서 흐르는물이라 차기가 얼음물 같았다. 한참 기분좋게 씻고 있는데 갑자기 통~ 통! 뛰어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대왕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뒷모습을 보니 7~8세 되어 보이는 꼬마동자였다. 지나가는 꼬마를 향해 “야! 꼬마야 너 어디 가느냐? 예 저 마을에요. 너 이리와. 내 등을 좀 밀어다오” 하자. “예 해드리죠” 하며 꼬마가 다가오더니 두팔을 둥둥 걷고 물을 꼬막손으로 찍어다 바르며 문지르니 시원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여 장난이 벌어졌다. 대왕께서는 “야! 꼬나야 너 마을에 내려간다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하고 약속하나 지켜야 할 것이 있느니라“ 꼬마는 ” 예. 무엇입니까?“ 제가 그 약속을 꼭 지키어 드리겠습니다."

대왕께서 말씀하였기를 “다른 것이 아니고 너는 마을에 내려가거든 대왕의 몸에 손을 대었다고 하지마라”(당시 국법으로 왕의 몸에 손을 대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꼬마는 “예 절대 그 약속을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제 약속하나 지키셔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오냐. 내 너의 약속을 지킬테이니 너의 약속은 무엇이더냐” 꼬마 동자가 하는 말이

“대왕께서는 어디 가셔서 이 골짜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고 나무에게도 하지 마세요” 하고 하는 말을 듣고 “문수보살” 하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등을 밀었던 꼬마는 인홀불견이었다.
세조께서는 무릎을 탁치며 성현을 옆에다 두고도 몰랐으니 한스러웠다.

문수보살인줄 알았더라면 개인에 관한 일이나 국사에 대한 일들을 자문을 받을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눈을 뜨고도 성현을 몰라보았으니 후회해도 이젠 부를 수도 따라 갈 수도 없었다. 옇라튼 기분이 상쾌하여 의관을 정장하고 침실로 돌아와 단잠을 잤다.

이튼날 아침에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문밖이 환히 밝았고 땅바닥엔 지난밤에 없었던 검은 벌레 같은 것이 많이 날려 있었다. 무슨 벌레가 들어왔나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움직이지 않으니 벌레는 아니었다. 양팔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보니 그 많았던 부스럼이 모조리 다 떨어져 전신은 흉터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세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종이를 가져오라하여 달밤에 본 동자를 종이에다 그려서 그대로 조각케 하였다.
그리고는 점안의식을 거쳐 상원사 큰 방에 모시게 하였다.
지금의 산원사 큰방에 모셔져 있는 바로 그 문수동자이었다. 그리하여 세조대왕께서는 마음의 병은 속리산 복원사에 계시는 신미선사로부터 치유 받았고 육신의 병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보살님 가피로 모두 낳았다. 그 후 6~&년간 정사를 잘하였으며 지금도 상원사 앞에 세조대왕의 관광 옥대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목욕을 하였다하여 관대거리라 부르고 있다.

신미선사는 세종, 문종, 세조 3대왕에게 존경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에 세로 부임한 주지스님이 신심이 나서 문수동자를 모신 탁자를 청소하면서 문수동자상 밑을 닦기 위하여 문수동자상을 들자 점안시 복장물을 봉하고 창호지로 봉하였던 종이가 삭아서 복장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속에서 세조가 입었던 등지개와 봉안했던 사리, 세조대왕의 딸이 쓴 축원문등이 나와서 지금의 상원사에 보관하고 있다.

<위 내용은 속리산 복천암 월성 큰스님이 정리하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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