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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지나치게 춥거나 더운 기후에서는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겨울은 춥고, 여름은 무더운 기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더위 피하기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문화 전반에 다양하게 영향을 끼쳤다. |
피서의 필요성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외부 기온이 상승하여 심한 더위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식욕이 떨어지며 기력이 쇠약해져 질병에 걸리기 쉽다.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오래 노출되면 일사병(日射病)에 걸리기도 한다. 따라서 뜨거운 한낮에 장시간 야외에서 일하는 것은 몸에 좋지 않으며, 피서(避暑- 더위 피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몸을 휴식하여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 |
피서를 즐긴 신라 사람들
울주 천전리각석은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모습을 담고 있다. 이곳은 신라 시대에 널리 알려진 피서지이기도 했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 소재. 국보 제 147호.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울주 천전리각석(川前里刻石- 국보 제147호)이 있다. 태화강(太和江)변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져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서기 525년 음력 6월 18일 새벽, 신라 23대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徙夫知) 갈문왕은 성스럽고 빛처럼 오묘한 멋을 가진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어사여추랑은 사부지 갈문왕이 사랑하는 누이였다. 이들의 행차에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 바위에 글을 새겨 넣는 작서인(作書人) 등 여러 사람이 동행했다. 이들의 행차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로 볼 때 로맨틱한 휴가를 즐기기 위해 피서지를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4년이 지난 539년 두 사람이 모두 죽은 후, 사부지 갈문왕의 부인인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와 그 일가족이 이곳을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바위에 글을 새겨 넣으며, 죽은 남편이 이곳에 온 이야기를 적었다. 천전리각석에는 여러 개의 글이 새겨져 있어 535년, 675년, 677년, 838년 등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신분을 가진 신라 사람들이 이곳에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곳은 신라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피서지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金庾信, 595~673) 가문의 사람들이 매년 봄철이면 재매곡 골짜기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했다고 하였다. 봄에 야유회를 즐겼던 만큼, 여름철에 서늘한 곳을 찾아 피서를 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 |
고려시대의 피서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은 1275년과 1279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수도인 개경을 떠나 상대적으로 서늘한 서경(西京)으로 피서를 갈 것을 계획했다. 왕은 신하들을 보내 미리 서경에 장소를 알아보도록 시키기도 했다. 고려에서는 관리들에게 삼복(三伏-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의 절기로 초복, 중복, 말복을 가리킴)에 3일의 휴가를 주었고, 이 기간에는 공사(工事)를 금하게 하여 여름에 사람들이 지치지 않게 했다.
또한 해마다 6월부터 입추까지는 얼음을 나누어주되, 신하들의 등급에 따라 3일에 1번, 혹은 7일에 한번 정도로 차이를 두기도 했다. | |
조선시대 임금의 피서
조선 역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임금도 피서를 가고, 신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주는 법이 정해져 있었다. 1396년 5월 태조(太祖, 재위: 1392~1408)는 여주 신륵사(神勅寺)로 피서를 떠났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탓에 시원한 신륵사에서 휴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대다수 임금들은 피서를 위해 수도인 한양을 떠나지는 못했다. 대신 한양 내에 있는 여러 궁궐의 건물을 옮겨 다니며 피서를 즐겼다.
1413년 6월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행차를 했는데, 이는 피서 때문이었다. 경복궁 경회루는 더위를 피하는 용도로 사용된 곳이기도 했다.
1453년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은 피서할 목적의 별실(別室)을 광연루(廣延樓- 창덕궁 인정전 옆에 건립한 누각으로, 경회루를 본떠 만든 것) 옛터에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광연루는 그 앞에 못이 파져 있어 시원한 곳이기에, 피서용 건물을 세운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5~1506) 은 1505년 창덕궁 후원(後苑)에 새로운 누각(新臺)을 경회루와 같이 짓게 하였고, 외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쌓게 하기도 했다. 조선은 청나라처럼 피서산장(避暑山莊)을 따로 거대하게 짓지는 못했지만, 임금들이 휴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궁궐 내에 마련하여 피서를 했다. | |
더위를 피하기 위한 한옥 구조
가야의 고상가옥. 고상가옥은 습기와 지열(地熱)을 차단해 창고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고상가옥이 장점은 한옥에 들어와 대청마루가 되었다. |
임금이 피서를 하는 건물들은 주변에 물이 있거나,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누각 형태의 집은 청동기시대부터 등장하는 고상가옥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상가옥은 땅의 열기와 습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흔히 열대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거형태다. 난방을 하지 않고 나무로 바닥을 지어 시원한 고상가옥의 장점은 한옥(韓屋) 구조에 들어와 대청마루가 되었다.
한옥은 가급적 남쪽을 향해(南向) 지어진다. 남쪽에는 앞마당이 있고, 건물 뒤쪽에는 뒷마당과 후원이 자리한다. 가장 선호되는 마을의 터 역시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뒤에는 산이, 앞에는 물이 흐르는 곳이다. 여름철 햇살에 마당이 뜨거워지면, 뜨거워진 공기는 위로 상승하게 된다. 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뒷산에서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이동한다. 이것이 여름철에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뜨거운 공기와 찬 공기의 순환을 대류(對流)현상이라고 하는데, 한옥은 이를 활용하여 대청마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해준다. 후원과 뒷산은 겨울철에는 추위를 몰고 오는 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남향 집에서는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남향으로 집을 짓는 것은 겨울을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한옥은 처마를 길게 하여, 햇빛이 직접 방안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다. 창덕궁 연경당(演慶堂)내에 위치한 선향재(善香齋)는 석양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건물 서쪽에 구리로 만든 차양지붕을 별도로 달았다. 긴 처마는 책을 보존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실내 환경을 만들었다. 요즘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처마는 더위를 차단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시설물이었다. | |
창덕궁 연경당 내의 선향재. 긴 처마가 햇빛을 차단해 건물 안을 시원하게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 |
우리 조상들은 대청마루 외에도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정자나 누각을 짓고 이곳에서 더위를 피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했다. | |
단옷날 임금이 하사한 부채
확 트이고, 그늘이 우거진 곳에서는 더위를 피할 수가 있지만,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때나 이동 중에는 더위를 가려주고 바람을 불러일으켜줄 도구인 부채가 필요하다. 부채는 기원전 2000년대 고대 인도와 소아시아의 철기국가인 히타이트 부조에 등장하며, 이집트 투탕카멘 왕(Tutankhamen, 재위: BC 1361-1352)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황금봉에 타조의 깃털을 붙인 부채가 가장 오래된 유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세기 유적인 경남 다호리 고분에서 출토된 옻칠이 된 부채자루가 2개, 경주시 탑동에서 기원전 1세기 중반 신라 건국시기 수장급 인물의 무덤(木棺墓)에서 시신의 얼굴을 가린 옻칠을 한 부채(漆扇子)가 출토된 바 있다. 우리 부채의 역사는 2천년을 훨씬 넘는다.
357년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 벽화고분에 그려진 주인공은 깃털로 만든 부채를 손에 들고 있다. 서기 600년경에 만들어진 오회분 4호묘에도 부채를 든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삼국시대에 부채가 귀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 |
408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에 그려진 주인공은 자신의 손에 부채를 들고 있지만, 그의 뒤에서 부채질을 해주는 두 명의 시종도 거느리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도 더위 때문에 부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더위가 시작되는 단옷날에 임금은 신하들에게 단오부채를 선물했다. 단오선에는 접선 (摺扇), 합죽선(合竹扇), 단선(團扇)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
부채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풍습은 단오부채다. 더위가 시작되는 무렵의 명절인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는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졌다. 이날 임금은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해준다. 단오부채는 고려 중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조선말까지 성행했다.
조선후기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임금이 새로 만든 부채인 단오선을 하사하는데, 제일 큰 것은 대나무가 거의 쉰 마디나 되어 이를 백첩(白帖)이라고 하고, 이를 얻게 되면 대부분 금강산 1만 2천봉 그림을 그려 넣는다고 했다. 임금이 부채를 선물하는 까닭은 이를 통해 왕이 너그러움과 덕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부채가 선물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더위를 쫓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
목욕으로 더위를 이겨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겨울철은 춥지만, 여름철에는 열대지방을 방불케 할 만큼 기온이 높게 올라가는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더위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여름철 더위를 극복하기 위한 목욕은 시대마다 그 풍습이 달랐다. [주서(周書)] (북주(北周, 557〜581)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가깝고 먼 사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냇물에서 같이 목욕을 한다.”고 하였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우리 조상들의 풍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 사서에 고구려의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떼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삼국과 고려시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우리 겨레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목욕을 매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황하 물이 더러워 목욕하기 어려운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깨끗한 하천에서 목욕을 하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특별나게 보였던 것이다.
의관을 갖춰 입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시대 선비들은 제사를 준비하며 목욕재계(沐浴齋戒)할 때가 아니면, 몸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더위가 체면으로 극복될 수는 없는 법. 법도가 지엄한 선비들도 더운 여름철이나 양의 수가 중첩되어 양기가 왕성한 날로 꼽히는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는 인근 산에 올라가 상투머리를 풀어 바람으로 빗질하며 날리고, 바지를 벗고 국부를 태양의 양기 앞에 노출시켜 바람을 쐬게 하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기기도 했다. 이는 양반 체면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해 생긴 풍습이었다. 하지만 너무 더울 때는 양반들이라도 웃통을 벗고 몸을 씻기도 했다. 더위가 체면마저 잊게 했던 것이다. | |
창덕궁 후원의 태극정. 창덕궁 후원 옥류천 주변에는 여러 정자들이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태극정 역시 피서를 위한 정자로, 임금이나 왕자 등이 독서를 하고 쉴 때 이용되었다. |
1849년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음력 6월 서울 풍속에 남산과 북악 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서울 서대문 밖 천연동에 있는 천연정(天然亭), 삼천동의 탕춘대(蕩春臺)와 정릉의 수석(水石) 등에는 술과 문학을 즐기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피서를 한다고 했다.
물론 생업으로 바쁜 농민들의 경우 한가롭게 산천을 다닐 수는 없고, 마을의 공용건물인 원두막에서 피서를 즐겼다. 또 체면 차릴 것 없는 농민들은 물로 등을 적시는 등목을 하며 더위를 이겨냈다. | |
더위를 파는 풍속
조선 시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노력은 정월 대보름날부터 시작되었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정월대보름날 꼭두새벽부터 사람들이 갑자기 상대방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서로들 온갖 꾀를 내어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득공은 이 풍습이 중국에서 입춘날 새벽에 서로 불러 봄의 피곤(春困)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날에는 나물의 외꼭지나 말린 가지, 말린 무잎을 삶아서 먹는데, 이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소개하고 있다.
삼복(三伏) 더위 중에 들어 있는 명절인 유두(流頭- 음력 6월 15)일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東流水頭沐浴) 날이었다. 유두날에 맑은 시내나 산간 폭포를 찾아가 머리를 감으며 몸을 씻고, 가져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지내는 풍습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와 조선 사람들도 이날에는 술을 마시고 놀면서 잔치를 했다. 이날에는 유두면(流頭麵), 밀전병(-煎餠) 등을 먹으며 휴식을 즐겼다. | |
더위를 피하기 위한 식품들
밀전병뿐만 아니라, [동국세시기]에는 여름철 보양음식으로 밀가루 국수에 오이와 닭고기를 넣어 백마자탕(白麻子湯- 깻국탕)에 말아 차갑게 먹는 깨국수를 소개하고 있고, 수박과 참외도 여름철 더위를 씻는 먹을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경도잡지]에서는 복날에는 개장(狗醬)을 먹는데, 개고기를 삶을 때에는 파뿌리를 넣으며 닭고기나 죽순을 추가하면 맛이 더 좋아지고, 밥을 말아 먹으면서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몸을 보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장과 함께 여름철에 즐겨 먹는 보양음식으로는 삼계탕(蔘鷄湯)이 있는데, 삼계탕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인삼 가격이 저렴해진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6개월 미만의 어린 암탉인 연계(軟鷄)를 푹 끓여먹는 백숙(白熟)이 삼복더위에 먹는 음식이었다.
궁중에서는 여름철 더위에 대비하여, 내의원에서 제호탕(醍醐湯- 오매육(烏梅肉)등으로 만든 청량음료)이나 옥추단(玉樞丹- 여러 음식의 독을 해독하는 약)을 만들어 임금께 바쳤다.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단옷날 쑥을 뜯어두었다가 먹거나, 익모초(益母草) 즙을 내어 마심으로써 더위에 지쳐 떨어진 식욕을 다시 돋우어 원기를 왕성하게 하는 방법으로 더위를 이겨냈다. | |
밤을 함께 보낸 죽부인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 가장 힘든 것은 열대야(熱帶夜) 현상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죽부인(竹夫人)으로, 대나무의 서늘한 기운에다 통풍이 잘 돼 잠에 쉽게 빠지게 한다. 죽부인은 홑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몸에 직접 밀착하지 않게 하는 장점도 있다. 죽부인의 사용은 고려시대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가전체 소설인 [죽부인전]을 통해 볼 때, 이미 고려시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은 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잘 수 있게 해주어, 부인이란 호칭까지 붙여졌다. 서울 남산한옥마을 소장품. |
여름철 의복으로 입는 등거리. 등을 덮을 정도로 걸쳐입는 홑옷으로, 무더운 여름날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
여름철 의복으로 가장 좋은 것은 가볍고 시원한 모시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아 매우 귀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등나무 덩굴을 가늘게 하여 등거리(등등거리)를 만들어 옷이 살갗에 닿지 않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하거나, 팔에 끼는 토시를 착용해 옷 사이로 바람을 통하게 했다. 이 외에도 화문석 돗자리, 통발, 평상 등의 피서 도구도 무더위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
20세기 이후 크게 달라진 피서 풍습
청남대(靑南臺)는 충청북도 청원군 대청댐 부근에 위치한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1983년 12월 5공화국 때에 만들어졌다. 20여 년 동안 대통령 일가의 피서지 기능을 해오다 2003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
청남대이양합의서. 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단 하루 청남대를 사용한 후, 곧 청남대를 전면 개방하고 지역 주민에게 돌려줄 것을 지시했다. 그해 4월 18일 충청북도에 이관된 이후 청남대는 국민 모두의 휴식처이자 관광지로서 거듭났다. |
더위에 지치기 쉬운 여름에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갖게 하는 피서 풍습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피서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는데, 특히 20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피서 풍습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예가 해수욕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해수욕을 즐기지 않았었다. 해수욕은 18세기 유럽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고, 우리나라에는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부산 송도해수욕장이 개설되기 시작해, 인천 월미도, 원산 송도원 등에 연이어 개장하면서 차츰 새로운 피서법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선풍기, 에어컨의 보급으로 부채의 사용이 크게 줄었으며, 정자에 모여 시를 읊고 술을 마시는 풍속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거의 사라져 버렸다. 또한 약수나 제호탕 등의 음료 대신에 상점 냉장고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청량음료로 더위를 식히게 되었다. 또 거주지 인근의 산이나 냇가에서 피서를 즐기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해외의 유명 피서지나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거나 대규모 시설을 갖춘 물놀이 공원에서 피서를 즐기는 등의 새로운 피서 풍습이 등장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