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의 시작
남길순|(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파란시선(세트 0025)|B6(신사륙판)|145쪽
2018년 8월 20일 발간|정가 10,000원|ISBN 979-11-87756-22-4|바코드 9791187756224 04810
신간 소개 ▄
숨기고 싶던 분홍이 당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다
남길순 시인의 첫 신작 시집 <분홍의 시작>이 2018년 8월 20일,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에서 발간되었다. 남길순 시인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했으며, 순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남길순의 첫 시집에는 ‘분홍’의 감각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남길순 시의 ‘분홍’은 소녀취미는 물론 산뜻하고 당당한 분홍과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생명의 절정을 품은 말랑말랑함과 당도, 물기를 지닌 잘 익은 복숭아의 분홍빛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그런 생명에 필연적으로 꼬이는 벌레마저 한 몸에 품은 분홍에 가깝다. 생명의 절정과 수치심, 자기혐오의 정동을 동시에 품은 분홍인 셈이다. 또한 아픈 몸을 환기하는 ‘분홍’이자 나를 묶은 아버지의 복숭아나무를 떠오르게 하는 ‘분홍’이다. 수치심과 죄책감, 자기혐오 등 여성들에게 학습되거나 강제되어 온 정동이 남길순의 시에서는 분홍의 이미지로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 남길순의 시가 자연스럽게 여성의 역사를 환기하는 까닭은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이겠다.”(이경수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추천사 ▄
남길순의 시는 등단 초기부터 단단한 내공을 바탕으로 삶과 존재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초기작 「지저귀는 공원」에서부터 최근작 「백야」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다양한 풍경을 관통하여 보폭이 넓고, 시적 에너지가 충일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옹색한 현실의 질서와 숨 막히는 이해득실의 공간을 포월하여 꽃이 몸을 닫는 속도로 넓고 깊게 번지는 작품이다. 대상의 단순한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오의(奧義)를 잡아내어 시의 혁신성과 존재의 깊이에 이른다. 특히 오래된 역사의 이면을 현재의 삶과 연계하여 아우르는 존재에 대한 통찰은 시의 다층적 구조와 확장성에 크게 기여한다. 현상 너머까지 넘나들며 사물과 존재의 고유한 빛을 포착하는 남길순의 섬세한 감각과 탁월한 시안은 매우 소중한 시적 자산이다. 그는 앞으로도 ‘지저귀는’ 많은 사물들을 온몸으로 만나 존재의 내밀한 비의를 시의 언어로 옮겨 적으면서 쉬이 잊히지 않을 미지의 리듬이 될 것이다.
―홍일표(시인)
시인의 말 ▄
다만
떠도는 말은 색을 얻지 못하고
직언은 돌아오지 않는다
숨기고 싶던 분홍이
당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었다
분홍은 1그램의 수치(羞恥)
1그램의 당위
그것이 모자란
여름이
간당간당하다
저자 약력 ▄
남길순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했다.
순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 <시로 여는 세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차례 ▄
시인의 말
제1부
분홍의 시작 ― 13
소지 ― 15
달리기 새 ― 16
마네킹 아이 ― 18
백일홍이 피어 있는 연못 ― 20
붉나무가 따라왔다 ― 22
생강나무 숲 ― 24
약 ― 26
호수도서관 ― 28
백야 ― 30
그네가 있는 집 ― 32
귓밥 파는 밤 ― 34
기린은 꿈처럼 가만히 누워 ― 36
두 시의 호랑이 ― 38
제2부
삼척 ― 43
사리 ― 44
복사꽃 통신 ― 46
늑도 ― 48
서라벌의 아침 ― 50
해녀와 전복 ― 52
돌이 기르는 사내 ― 54
푸른 곡옥 귀걸이 ― 56
지저귀는 공원 ― 58
고구마와 새 ― 60
말날 ― 62
기다리는 사람 ― 64
눈사람 애인 ― 66
젓가락 행진곡 ― 68
제3부
길 ― 73
프로필 ― 74
호두 까는 인형 ― 76
수탉이 있는 마을 ― 77
오리온자리 찾기 ― 78
억새평전 ― 80
U ― 82
혀 ― 84
1억 4천만 년 전을 찾아서 ― 86
달집태우기 ― 88
항아리展 ― 90
여자만 일몰 ― 92
와온 ― 94
면앙정에 호랑이가 산다 ― 96
제4부
수평에 눕는 여인들 ― 99
포도알 유희 ― 102
고양이 되기 ― 104
모과 ― 106
얼굴 없는 사람 ― 108
소나무귀신 ― 109
새조개 ― 110
새벽 시장 ― 112
소피와 루체의 대화 ― 113
밀과 보리가 자란다 ― 114
칼 가는 노인 ― 116
까망베르치즈를 먹는 저녁의 대화 ― 118
매복 ― 120
타이거릴리 ― 122
해설
이경수 분홍의 기원과 탈주의 몽상 ― 124
시집 속의 시 세 편 ▄
분홍의 시작
숲은
어린 나의 무대
바위 속에 집을 그리면
입속에 꿈틀거리는 벌레들이 살아난다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곳엔 복숭아밭이 있었고
아버지는
담장 위에 더 높은 담을 쌓고
복숭아 속에
벌레들을 길렀어
꽃은
나무의 겨드랑이에 고여 있던 물이 피어오른 거야,
향기는 나무들의 숨 냄새…,
사방이 분홍인 방에 엎드려 써 놓은 일기를 읽으면
너는 어려도 모르는 게 없구나
벌레 있는 복숭아가 더 맛있는 거란다
아버지는 흰 광목으로 정성스럽게 내 발을 감싸고
복숭아나무에 나를 묶었지
뿌리에서부터 발작이 시작되면
연분홍 꽃들을 솎아 쏟아 버리며
뒤틀리고 작아진 발을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았어
노란 봉지에 복숭아를 싸 넣으며
더 많은 벌레들을 길렀지
치마 속으로
뱀이 기어들어 오고
분홍 물을 풀어놓은 복숭아밭 언덕 너머로
힘센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
백야
나와 같은 몸을 쓰는
또 다른 나와 마주칠 때가 있다
호텔에 누워 듣는 개 짖는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멀다
밤이 왔으나 죽지 못하는 태양
낮 동안
카프카의 무덤을 찾느라 묘지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카프카를 만났다
검은 묘비들이 살아 돌아오는 밤
클라이맥스로 짖어 대다가 일순간
고요해지는 하늘을 본다
유대인 묘지 끄트머리쯤에
내가 찾는 카프카는 누워 있었다
그를 찾아야만 하는 간절한 이유라도 있는 듯
각혈하는 장미 한 송이 놓고
돌아설 때
한동안 잠잠하던 병이 도진다
이 불안의 시작이 어디인지
여름밤은 스핑크스처럼 창문 앞을 지키며
돌아가지 않는다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리는
밤새 끙끙거리고
곁에 누워 있던 누군가 황망히 떠나간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너는
이불을 둘둘 말고 있다 ***
기린은 꿈처럼 가만히 누워
기린은 고서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기린은 상서로운 새이거나
기린은 다리가 긴 기차
나는 기차를 타고
기린은 평원에서 풀을 뜯다 돌아보고
나는 기린을 타고 떠난 할미새
기차는 손을 흔들며 울던 기린
기린은 그사이 키가 더 자라고
기린의 목은 차창을 넘어와 칭얼거리는 아이의 손을 핥고
기린은 주황색이 도는 갈색
패치 모양의 얼룩
크림색이 도는 황색 구름
산이 돌아 움직이고
낮달이 따라오고
휘날리는 소녀의 머릿결
눈물이 마르지 않은 손수건
내가 떠 준 보라색 스웨터
아직 지우지 않은 사진
사소한 변명과 김밥
기린의 혀는 거친 숨을 잘도 녹여 먹고
기차는 기린의 평원을 오래도록 감아 돌고
기분 좋은 기린의 목은 하늘에 닿고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기린은
구름을 피워 올리고
겨울에서 봄으로 기린의 목이 넘어가고
나는 기린의 목에 매달려
머나먼 나라에서
머나먼 나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