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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행(四川行) 14
고색창연한 간판은 이곳이 예삿곳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간판의 한 가운데 쓰인 두 글자는 그런 확신을 확인시켜 주었다.
‘당문(唐門)’
커다란 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외당가(外唐家)가 나온다. 사천 당문 속에서도 무인이 아닌 사람들로써 진정한 당문을 받쳐주는 힘, 생산 인력들이었다. 그러나 무인이 아니라 해서 함부로 알 수는 없었다. 웬만한 하급 무인들은 뼈도 못 추리므로..... 당혜가 이곳 출신이었다.
그 외당가의 정중앙에 오장 넓이의 단단한 화강암 길이 잘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끝에 거대한 일주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큰 현판에 또다시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당가(唐家)’
진정한 당가의 직계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 독과 암기의 총본산인 당가가 바로 이곳이었다.
“확실합니까. 명경스님?”
“확신이라.... 일단 팔 할은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당가의 후원에선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정 일행이었다. 당패성은 일단 객잔을 나오면서 정천호에게 명경과 명각, 그리고 당혜를 인사시키고 분실현장을 돌아보게 했다. 한시진후 그들은 당가로 돌아왔고, 지금 그 결과를 놓고 향후 일정을 논의하는 중 이었다.
“흐음....소뢰음사의 흔적이라........ 허헛 이것 참........ 그렇다면 무림도 나서야 한다는 결론이군요.”
가주 당세극은 침음을 흘렸다. 명경대사가 성도위에서 소뢰음사의 무공을 확인하다니......
“소뢰음사에 ‘이화착이뇌속(梨花捉以雷速)’이라는 희대의 경공이 있습니다. 배꽃을 밟아 뇌전의 속도를 낸다는 신법으로서, 종이 한 장이라도 공중에 날리면 그것을 딛고 도약하는 신공이지요....... 그것의 특징은 단 한 가지, 워낙 내력이 강하고 많이 사용되는 관계로, 나무 같은 것을 스치면 그 색이 미세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쪽의 집기에서 그것을 확인 했습니다.”
명경은 말을 마치고 합장을 했다. 명경이 그렇게 까지 봤다면 맞는 것이었다. 고죽노인은 곰방대를 입에서 빼내며 말했다.
“그 참...... 아무리 소뢰음사지만 황제를 기만하다니.......그렇게 까지 해서 대체 뭘 얻겠다는 것인지......”
혀를 차며 고죽노인은 말을 맺었다. 당패성도, 당혜도, 소림의 두 승려도, 아무도 말이 없었다.
“거꾸로 짚는 것이 좋겠소.”
무정의 묵직한 저음이 울렸다. 일행은 그 말에 분분히 고개를 들었다.
“옥새는 아무나 쓸 수 없소. 그것이 가진 상징은 황제폐하께 국한 된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소.”
그렇다. 옥새라는 것은 결국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필요 없는 것이었다. 명경의 눈이 반짝였다.
“무시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차분히 짚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갔을지를 먼저 생각하자는 말씀이오이까?”
명경의 말이 떨어지자, 무정의 고개가 끄떡였다.
“그렇군요. 중원이든 세외이든 그 옥새가 효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을 찾자는 거군요!”
당패성이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허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왕의 자식들만 여섯 이상이었고 그 형제들만 넷이 넘었다.
“첫째인 희명공주가....이십 오세요...따라서 그 밑의 세자들은 너무 어리오.”
고죽노인이 곰곰이 짚으며 말했다. 물론 누군가 그들을 이용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변수가 너무도 많았다. 지금은 그런 것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흠.....형제들 중 셋째 강진왕(康晉王)은 풍류 자적한 인물이고, 넷째 군주세왕(君主世王)은 황제는커녕, 시골 서당훈장도 되지 못할 유약한 인물이니........”
당세극이 머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남은 것은 영친왕(榮親王)과 민흥왕(民興王)......
그들도 그리 심증(心證)이 가지 않았다.
“왕이나 세자 중,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정의 음성이 울렸다. 당세극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영친왕........영친왕은 지금 이곳에 있소, 그가 바로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진해서 내려온 도휘지사사요!”
당세극의 음성이 울리고 일행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함부로 용단 할 수 없었다. 상대는 황제의 큰형이었다. 침잠한 침묵만이 울렸다.
“아 근데, 이놈들은 어디가 쳐 박혀 있는 거야!”
고죽노인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상귀하귀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이 자리에서 이는 짜증을 받아줄 그들이 없다는 것에 다시 짜증(?)을 내는 그였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탁”
“대(大)”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탁”
“소(小)”
“............”
내원 근처 정자에서 세 명의 인물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상귀, 하귀 그리고 홍관주였다. 이들은 지금 노름의 일종인 주사위내기를 하고 있었다. 둘, 혹은 세 개의 주사위를 두개의 밥주발에 넣고 흔들어 나오는 눈의 합이 평균보다 크고 작고를 맞추는 내기였다. 주사위는 줄곧 상귀와 하귀가 흔들고 있었고, 홍관주는 맞추기만 하고 있었다.
“딱.......한번만 더 하겠소.”
그답지 않은 굳은 얼굴로 상귀는 말했다. 일말의 비장감도 서려있었다. 절대 그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탁”
“소”
상귀는 주발을 열었다. 일, 육, 이...... 소였다. 상귀와 하귀의 턱이 벌어졌다. 스무 번 이상의 내기를 다 맞춘 것이었다.
“......영감!............”
“...?........”
“존경스럽소!....”
“ ! ”
진지한 얼굴로 상귀가 말했다. 하귀도 말만 안했지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홍관주는 웃음이 나왔다. 참 이상한 놈들이다. 문득 이놈들을 처음 만날 때가 생각나는 그였다.
무정이 녀석들을 홍관주에게 인사시켰을 때 상귀의 반응은 어이없었다.
“크읍....... 우쒸 , 우리대장 잘 부탁해 영감..”
“...........”
홍관주는 백이십년 평생을 살면서 이런 대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 화도 안 났다. 그래도 요 싸가지 없는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문득 그의 눈앞에 술잔이 들어왔다.
그는 술잔을 내력만으로 공중으로 바스러뜨렸다. 술잔안의 술은 담겨진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중인들은 신기에 가까운 무공에 넋을 잃었다. 상귀와 하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홍관주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성님, 저 영감 사당패 출신이갑소.”
“음.... 그런 것 같다.”
“ ! ”
“ ! ”
태산을 앞에 두고도 모르는 촌 것 들이었다. 고죽노인라는 사람이 옆에서 뭐라고 하는 것같은데, 놈들은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이후 그들은 같이 당가로 왔다. 회의가 개최되자, 상귀와 하귀는 슬그머니 빠져 나갔다.
홍관주도 지겨운지 손사래를 치면서 나갔다. 이후 그는 천천히 여기저기 둘러보다, 정자에서 상귀와 하귀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영감, 영감은 평생 돈 걱정 안하고 살것소?...”
홍관주의 상념이 접혔다. 그는 상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응?.......아, 뭐.... 그거야 그렇지.”
“우~와..... 정말 부럽다.. 영감은 신선(神仙)이네 신선.”
하귀가 입을 쫙 벌리며 감탄했다. 어이없는 놈들이었다. 이놈들의 눈에는 세상을 뒤엎는 무공도 저 사기(詐欺) 주사위 놀이보다 못한 것 같았다. 홍관주는 아까 내기를 하면서 내공으로 주사위를 조종했던 것이었다. 그의 가슴이 살짝 찔렸다.
허나 돈 걱정 안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개방 출신이다. 구걸로 먹고 사는, 근데 왜 돈 걱정을 하겠는가?
“봤지 하귀야, 부단한 노력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쓰벌”
“알것소 성님, 힘차게 얼른 한번 돌려보쇼!”
그들은 다시 주사위를 돌리기 시작했다. 홍관주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문득 상귀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벌써 날이 졌나?’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돌린 그는 인상을 확 구겼다. 고죽노인과 무정이 햇빛을 가린 것이었다.
“쯧쯧, 건전한 생각은 들지도 않지?. 지겹지도 않냐 네놈들은.....에잉”
“큽...카악..튓,,,,,,, 어이 노친네, 비켜 안보여!”
“씰데 없는 짓 말고 일어나! 할일 생겼어”
“어....엉?.....뭐?”
한참 주사위를 돌리던 상귀는 고개를 돌렸다. 일이라니.....
“알아볼 일이 있으니 어서가자..... 중요한 일이야, 잘못하면 주여루(周濾樓)에도 화가 미칠지 몰라”
“뭐! 어떤 씁새야! 애덜 건드리는 게!”
“어떤 겁대가리 없는 쉐이가 거길 노린당가요?”
상귀와 하귀가 벌떡 일어서며 주사위를 팽개쳤다. 그들에게는 주여루란 곳이 중요한 곳인 것 같았다.
“가면서 말할 테니 어서 가자, 무대장은 어찌 할 텐가?”
고죽노인은 무정을 보며 말했다. 무정은 잠시 생각하다 말문을 열었다.
“일단 나는 서창으로 간다. 마대인의 서신을 전해야 한다.”
무정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옥새가 없어지든, 희명공주가 어떻게 되던 우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마대인의 부탁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서신? 마대인의 서신? 누구에게? 마은명에게?”
갑자기 상귀가 나서며 물었다. 무정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대인의 아들을 아나?”
무정의 말에 하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아따, 대장, 여기 도위지사사 영친왕의 책사가 마은명이오...... 하마터면 엇갈릴 뻔했고마.....”
“!........”
씁쓸한 표정이 무정의 얼굴에 걸렸다. 정말 하귀 말대로 엉뚱하게 서창까지 갈 뻔 했다.
대부인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서신은 아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홋, 홋, 그럼 이렇게들 하지....... 내가 상귀와 하귀와 갈 테니, 고죽은 정아와 가시게나....... 일 끝나면 아까 그....... 주여루란 곳에서들 만나기로 하지.....홋홋홋”
홍관주가 해결책을 놓았다. 아무래도 제일 나은 듯 했다. 허나 고죽노인은 백염주선 홍관주가 저놈들에게 후안무치한 일을 당할까 염려 되어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귀와 하귀가 하는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오옷, 노신선님이 같이 가신다니. 영광입니다.”
“글게요....... 형님이나 나나 꿈자리가 좋았던갑소.”
노신선님이란다. 자신에게는 ‘늙다리’, ‘노친네’, 혹은 ‘영감탱이’라는 호칭을 입에 달고 사는 놈들이 ......... 상대가 무공이 높은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일말의 배신감을 가지는 고죽노인은 두 눈을 부라리며 해야 할 일을 몇 마디 뱉고는 무정을 팔을 끌고 사라져 버렸다.
“성님....노친네....와 저런다요?”
“카악.....튓, 글쎄다. 낸들아냐?........ 가시죠 노신선님”
“홋홋홋, 흠...... 그럼 가볼까나?”
고죽노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기분 좋은 세 사람의 웃음만이 메아리치며 사라졌다.
무정일행은 성도안의 사천위로 향했다. 마은명에게 서찰도 전할 겸, 영친왕의 동태도 살필 겸해서 가는 길이었다. 중간에 당패성과 당욱, 그리고 명경과 명각이 합류했다. 마침 이들도 사천위에서 동태를 살필 요량이었다.
사천위의 정문에서 철패를 꺼내든 그는 당장에 마은명에게 안내되었다. 마은명은 후원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핫핫핫, 자네가 무정이로군.... 오늘에야 보게 되네 그려....... 아버님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하셨네.....”
마대인을 닮아 육척에 달하는 키, 서글한 봉목에 수수한 면포로 된 옷을 입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마은명(瑪恩?)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정입니다.”
무정은 포권하며 인사했다. 고죽노인, 당패성과 당욱, 명경과 명각이 그 뒤를 따랐다. 은명은 탁자를 가리키며 권했고 시비를 불러 차를 시켰다. 앉자마자 무정은 봉서를 내밀었다. 마은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가?”
“마대인의 서신입니다. 당신의 가문에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 그래?”
마은명은 편지를 뜯어 펼쳤다. 그리고는 흠칫하더니, 대소를 터트렸다.
“아핫하하하하하 역시 아버님다운 편지군, 무정 자네가 한번 보게나.”
마은명은 편지를 무정에게 넘겼다. 무정은 엉겁결에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다.
“ ! ”
아무 글씨도 없었다. 그냥 백지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은명을 보았다. 마은명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님은 전장에만 계셨네.......... 어머님은 그런 아버님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셨지........”
마운명은 창밖 이름 모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억을 더듬는 듯 했다.
“그런 어머님께 아버님은 한 줄의 편지도 보내지 않으셨다. 차라리 그냥 오시는 분이셨네...”
무정은 이해 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의 서신 한 장.......... 잘 오던 서신이 오지 않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럴 땐 차라리 연락을 안하니만 못한 것이 된다.
“무소식의 희소식이란 말이 있네, 이 편지는 그렇게 해석이 되네......... 하하하, 아버님이 자네를 정말 아끼시는군. 평생 안 쓰시던 서신도 보내시고.......하하핫.”
약간은 메마른 웃음이 무정의 귀에 들렸다. 친자식으로서의 서글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마은명의 눈이 어느 순간 정색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서신 한 장 전하는 일이라면 자네 혼자만 왔을 터이고.....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은명의 모습은 어느새 군부의 실세로 돌아가 있었다. 확실한위엄이 흘러 나왔다. 당패성은 감탄하며 말했다.
“짐작하셨겠지만, 옥새문제로 찾아 왔습니다.”
“음......”
마은명은 침음을 흘렸다. 이들이 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는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정말 난제였다.
“저희는 이곳에서 누군가 호응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
순간 마은명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거슬리는 발언이자. 위험한 발언이었다. 누구든 자신의 휘하에 배반자가 있다고 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백중백(百中百)의 경우였다.
마운명은 당패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패성도 질세라 마운명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
이윽고 마은명의 눈초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그는 무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정 무아우라 불러도 되겠는가?”
“그냥 정이라고 하십시오, 마대인께서도 그리 부르셨습니다.”
“그런가, 그래 정아, 그럼, 그렇게 부르도록 하마......”
살풋이 미소를 띄우며 마은명은 무정을 바라보았다. 왠지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었다.
“실은........... 자네들 생각이 맞네.......”
“ ! ”
무정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직접적인 시인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허나, 나의 부하들은 아닐세...방수(?手)는......영친왕일세!”
“...........”
고죽노인은 눈을 감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제발 아니길 바랬다. 다른 것은 몰라도 황권을 둘러싼 싸움은 치졸하고 무서웠다. 이젠 좋던 싫던 간에 사천성 전체로 일이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명경이 말문을 열었다. 마은명은 시선을 옮겼다. 정광이 넘치는 소림의 승려, 두 눈 가득히 현기가 보였다.
“저희 같은 일개 강호무부도 모두 알 수 있을 만큼, 뻔한 일입니다. 헌데 어떻게 폐하만이 이일을 모르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모든 혐의의 일 순위가 자신이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일을 벌이는 영친왕도 알 수 없긴 합니다만......”
“황상께서도 알고 계시네.”
“헛....”
당욱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뒤죽박죽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일을 벌이고, 또 알면서도 모른 척 한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영친왕의 반역은 반드시 치죄 되어야 할 문제일세. 난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고, 허나 문제는 희명공주이시네....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 모르는 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페하도, 영친왕도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일세.”
이것이었다. 마은명은 책사가 아니라 감찰임무를 띈 사람이었던 것이었고 그런 은명의 고충은 희명공주에 있었던 것이었다. 짐작컨대 옥새의 행방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만일 희명공주의 소재가 파악되고 구출된다면.......... 이곳의 어림군은 모두 영친왕에게 창끝을 겨누게 될 것이었다. 당패성의 눈이 빛났다.
“설마 영친왕이 세력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혹, 비호세력을 아십니까?”
“.....으음.....”
침음성과 함께 마은명의 눈이 감겨졌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당욱은 입이 바짝 타는지, 찻잔에 연신 손이 갔다. 이윽고 그의 눈이 떠졌다.
“서장의 소뢰음사와 아유타왕, 그리고............오이랏트네.”
“!.......”
순간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어갔다. 오이랏트란 단어에 무정의 살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은명은 말을 이었다.
“서장의 아유타왕에게는 이 사천성을..... 소뢰음사는 중원에 정식 사찰을........오이랏트는..........감숙성을 주기로 했네.”
“빠각!”
무정의 찻잔이 바스러졌다. 그의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나갔다. 용서 할 수 없었다. 감숙을 지키기 위해 그 얼마나 피 흘리며 싸웠던가, 헌데 그냥 바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이라면 왕이라도 살려둘 생각이 없는 무정이었다.
“허.... 무대장......진정하게 진정해........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고죽노인이 급하게 무정을 말렸다. 무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의 마은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실태를 깨닫고 살기를 줄여갔다.
“후...... 정아.........너를 혈신이라 부르는 이유를 조금 알겠구나”
소름이 돋은 온 몸을 추스르며 마은명은 말했다 과연 대단했다. 자신도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상태이긴 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저만큼의 살기는 다스릴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담담한 무정의 말이 울렸다. 마은명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괜찮다는 뜻인 것이다. 당패성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일단은 희명공주의 행방이 우선이군요...”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네..”
“음?”
당욱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은 그런데 왜 안 가는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사실 현 사천성 내의 영친왕세력도 만만치 않네. 함부로 병력을 돌릴 수는 없네, 게다가........바보가 아닌 이상, 병력을 이동시키며 적을 자극시키는 타초경사(打草儆巳)의 우(愚)를 범할 수는 더욱 없었네.”
괴로운 표정으로 마은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어딥니까?”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무정이 입을 연 것이었다. 마은명은 괜히 속 보이는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할 것을.......
“저는..... 오이랏트에 빛이 좀 있습니다.”
새파란 눈을 번쩍이며 무정의 입이 열렸다. 고죽노인의 고개가 끄떡였다.
“감숙성은...... 제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당하진 않겠습니다.”
무정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굳건했다. 마은명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서남 방향으로 가면 아예강(雅汭江)이 나오네. 그 강을 건너면 을와(日瓦)라는 산이 있네. 그 부근으로 추정 되네. 아예강을 건널 때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어 이미 국경수비대에 경계령을 내린 상태이네”
마은명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입을 닫았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한심하고 부끄러웠다.
무정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돌아섰다. 그의 동행은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얼떨떨했지만 곧 무정을 따라 나왔다. 명경대사만이 은근히 마은명을 노려보고 있다. 무언가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허나 그는 곧 무정의 뒤를 따라 나갔다.
마운성은 눈을 뜨고 물끄러미 저만치 사라져가는 무정의 등을 보았다.
“미안하구나..... 정아.......... 우형은 정말 무능하구나....”
천정으로 시선을 옮기며 그는 중얼거렸다. 정천호로부터 무정이 이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후, 애당초 그를 기다리던 마운성이었다. 또한 정천호로 하여금, 문제를 흘리게 한 것도 그였다. 처음부터 무정에게 기댈 생각이었던 그였다. 게다가........... 아유타왕과 소뢰음사의 이야기는 사실이지만, 오이랏트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꾸며낸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그의 서늘한 봉목으로 자책어린 눈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