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회 ♡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金炳淵]
* 此日彼頃 寂莫江山今百年[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 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 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 뿐입니다."
"그래요 ?"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 단념한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 "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듯 한데. 말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
여인은 상을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어떻게 아셔요."
"부인의 얼굴에 그렇게 씌여 있습니다."
"제 얼굴에요?"
"그렇습니다.
바깥 양반도 안계신 모양인데 소생이 해드릴수 있다면
오늘 밥값으로라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각별히 바쁜 몸도 아니니까요."
여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
관상을 보실줄 아세요 ? "
"허허 ,
관상을 볼줄 안다기 보다 어려서 부터 '주역과 역서' 를 읽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의 삶을 조금 들여다 볼줄 알지요."
김삿갓은 여인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자 이렇게 말했다.
"맞았어요.
저는 이년전에 혼자가 되었지요.
오늘은 큰집에 제사가 있어 집안 식구들은 모두 그쪽으로 보내고 지금은 저 혼자 있지요 .
그리고,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을 해주십시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으신것 같은데."
여인은 삿갓의 말을 듣고 잠시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사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에게 집안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꺼려졌는데
저의 긴박한 사정을 짐작하고 계신듯 하여 의논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안에 복잡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산송(山訟)이 한 건 있습니다."
"산송이라면 묘자리에 얽힌 송사를 말씀하시는 것 입니까 ? "
"예, 이년전 춘삼월에 어느 고명한 지관 한 분이 우리집에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 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저희 남편을 위해 좋은자리 하나를 보아 달라고 그 지관에게 청을 하였습니다.
지관은 우리집에 열흘경 머물면서 이 근방 산야를 두루 살펴보고 마침내 한 자리를 택해 주더군요.
여기서 이십리쯤 북쪽으로 가면 '갈매봉' 이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 남향 자리였지요.
그때 지관에게는 쌀 열섬을 사례로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한달쯤 지난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물론 그 명당자리로 장례를 모셨지요."
"그렇다면 일이 잘된 것이 아닙니까 ? "
김삿갓은 흥미를 느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되었지요.
정말 명당자리 덕분인지 주막에 장사가 부쩍 잘 되지 않겠어요 .
애초부터 주모를 따로 두고 하는 장사였지만 장사가 잘 되어 남편 죽은 시름을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가을 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는거예요.
대신 저 위에 주막이 잘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사란 잘 될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요.
한데 지난 여름 어느날 밤, 꿈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
"여보, 내집 울타리에 침범한 자가 있어 도무지 잠을 잘수 없다" 며 말을 하는 것이에요.
그 꿈을 깨고나서 하도 이상해 남편 산소를 찾아가 보았지요. 그런데 가보니 이게 웬일이래요!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무슨일이 있었소이까?"
"남편 묘 옆에, 그러니까 봉분 오른쪽 우청룡(右靑龍) 쪽으로 웬 묘가 하나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도 기가막혀 알아보니까 새로생긴 이 묘는 건너마을 안 진사 아버지 묘였던 것이예요.
해서 급히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집 말이,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부친 묘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더니 그곳에 모시라 하기에 묘를 썻노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 이장을 하라 하였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을 것이니 우리보고 이장을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차일피일 하면서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관이 양쪽 집에다 같은 묘자리를 팔아먹은 게로군요.
하지만 산소는 이쪽에서 먼저 썼으니 나중에 쓴 안 진사네가 마땅히 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
썼더라도 파가는 것이 법이거늘 그나저나 송사를 받은 안진사네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송사까지 내니까 파가겠다고 하는데 어디 실천에 옮겨야지요.
관가에서도 이렇다할 결정도 하지 않고요. 아무래도 관가에서 뇌물을 받아 먹고 어물정 미루고 있는듯 싶네요."
"그렇다면 사또께 직접 송사를 해야 하겠군요."
"그렇게 할수 있을까요 ?"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무렴요.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송사를 하지요."
"선비님 께서요?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쓸것을 준비해 주십시요."
여인은 불이낳게 밖으로 나가더니 종이에 붓과 벼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자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掘去掘去 彼隻之恒言[굴거굴거 피척지항언] -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고
捉來捉來 本守之例題[착래착래 본수지예제] -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고을 사또님이 겉으로만 하는 말인데
今日明日 幹坤不老 月長在[금일명일 간곤불노 월장재] -
이토록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니 천지는 늙지않고 세월만 흐를 것 이오
此日彼頃 寂莫江山 今百年[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
이토록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니 천지는 늙지 않고 세월만 흐를 것 이오,
이핑게 저핑게 하는 사이 쓸쓸한 강산은 어느덧 백년이 될것 이로다.
이핑게 김삿갓이 이렇듯 쓰고 붓을 놓으니 여인이 경탄을 한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과연 선비님은 명문장가 이시군요."
이 말을 듣고 김삿갓도 놀랐다.
여인이 글을 보고 뜻을 알았다는 것인데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 여인이 말을 하는데,
"내일 사또가 이 글을 보시면 저희 집 산송 처리를 더이상 미룰수 없다것을 알게 될것 입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써드린 보람이 있소이다.
헌데 실례의 말씀 같소이다만 주막이나 하시면서 지내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김삿갓이 이쯤 말을 해놓고 여인을 빤히 쳐다 보았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것은 아니지만 본래 시댁은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 이었지요.
허나, 윗대에 이르러 뭔가 잘못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여 불운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나 이곳까지 살림을 옮겨오게 되었지요.
이곳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접한 곳으로 봄과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길손들이 많아
주모를 두고 심부름 하는 머슴을 서넛 두고도 장사는 잘 되었지요. 안진사네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말입니다."
여인의 말씨는 무척 차분했다.
그러나 벼슬은 어떤 벼슬을 하였었고,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밝히려 하지 않았다.
"내 처음부터 내력이 있는 집안분 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생각이 맞았소이다.
그럼 대접을 잘 받았고 , 이만 떠나 가겠소이다."
김삿갓은 삿갓을 찾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황망히 그를 만류한다.
"바쁘신 길이 아니라면 며칠 쉬었다 가세요.
내일 써주신 글을 관가에 낼 터인즉 그 결과를 보시고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삿갓도 휑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가까이 말해 본 것 조차도 얼마만 인가 ?
그는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 앉았다.
"부인이 혼자 계신다 하는데 외간인 제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 "
"그런것은 쾌념치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선비님이 아니셨던들 내일 사또께 청원서를 낼수 있었겠습니까 ? "
김삿갓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길가의 방이라 유하시기 불편하실 터이니 안채로 드세요.
주인께서 쓰시던 사랑방이 있습니다."
김삿갓은 일이 매우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않고 앞선 여인을 따라 사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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